발간물PUBLICATION

이슈페이퍼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연구원의 발간물입니다.

현안과 정책 제148호_송용진_명나라가 유럽에 뒤진 이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10-17 01:21:16
  • 조회수 : 1973
현안과 정책 제148호
명나라가 유럽에 뒤지게 된 것은, 유럽에서는 그리스의 과학철학 정신을 이어 받아 과학(수학)을 ‘진리 탐구’ 정신에 입각하여 연구한 반면, 중국은 즉각적인 실용성이 없는 과학적 연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신의 섭리(자연의 섭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을 매우 중시하였고 따라서 과학자들은 신분도 높았고 유명하기도 하였다. 21세기의 우리나라는 명나라와 매우 흡사하다. 수학이나 기초과학을 연구자들에게조차 연구의 실용적 가치를 먼저 따지고, 수학자나 기초과학자들은 대학이 아니면 일자리도 거의 없다. 그나마 최근에는 기초과학을 키운다며 연구비 예산을 늘리고 기초과학연구원(IBS)에 터무니없이 많은 예산을 쏟아 붇고 있지만, 대부분의 (젊은) 과학자들은 그 혜택을 받고 있지 못 하다. 연구과제의 지나친 대형화는 연구 생태계를 교란시킬 뿐, 기초과학의 진정한 발전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다. 이제는 노벨상과 같은 허상은 잊어버리고, 차분하게 과학의 기초부터 내실을 다져야 할 때이다.
 
유럽의 진리 탐구의 정신
 
약 600여 년 전 유럽에 중국으로부터 세 가지 문명의 이기(종이, 나침반, 화약)가 전해졌고 이는 유럽의 획기적인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아직 당시까지는 중국의 과학기술의 수준이 유럽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유럽은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종교가 사회 전반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사상, 문화, 과학의 발전에 제약을 받아온 반면, 중국은 여러 민족들이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생존경쟁을 벌이며 인재를 등용하고, 과학과 경제 발전을 중시하여,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500년 전쯤에(시기는 꼭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유럽은 명나라의 과학기술을 앞지르게 되었고 그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중국이 발전에 있어서의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유럽은 과학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른 것이다. 중국은 그 이후에 벌어진 과학기술 수준의 현격한 차이로 인하여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현격한 군사력의 차이를 보이며 참혹한 패배를 하게 되고, 지금까지도 유럽에게 과학적, 문화적으로 압도당하고 있다.

이러한 역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완벽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론 복잡한 사회적, 역사적 요인을 찾아야 할 것이고,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매우 전문적인 연구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많은 요인 중에서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을 하나 들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유럽은 '진리 탐구'의 정신에 입각하여 과학을 발전시킨 반면, 중국은 그러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유럽의 진리 탐구 정신은 우선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이 크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자들은 논리적인 사유를 통한 자연의 섭리에 대한 연구를 매우 숭고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과학철학은 종교의 절대적인 지배력이 감소되던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경지의 과학을 연구를 시작하던 학자들에게 학문 연구의 기본 정신과 방향이 되었다.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신에 대해서는,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는 거의 같은 개념을 가진 말이고,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리 탐구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스콜라 철학자들도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결국 진리 탐구와 논리적 사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그 이후 과학자(수학자, 당시에는 과학과 수학의 구별이 없었고, 이들은 그냥 mathematician이라 불렸다)들에게 공부할 때 갖는 기본 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뭐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기독교의 오랜 독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과학발전에 있어서 오랜 시간동안 장애 요인이었지만, 르네상스 이후에는 진리 탐구라고 하는 과학철학을 낳는 데에 있어서 정신적인 배경이 되었다. 결국 기독교는 유럽의 과학 발전에 있어서 병 주고 약 준 꼴이 된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과학자들의 과학적 발견은 그것이 바로 실용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곧바로 경제적, 군사적 가치로 이어지지 않는 기초 순수과학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각적인 활용에 치중하다 보니,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실무담당자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따라서 과학이나 기술은 고상한 학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학자들의 사회적 신분도 낮았다. 결국 유럽에서는 태양계의 구조와 운동원리, 뉴턴의 역학, 세균의 존재와 면역법, 원자와 분자의 구조, 미적분학 등의 발견되고 활용될 때, 중국은 그 이전의 오랜 세월동안 유지해 왔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과학적 지식은 축적되기 어려웠고, 한 명의 과학자가 평생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정도의 과학과 기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 했다. 유럽에서 이루어지듯 과학의 기본적인 원리를 깨닫고, 그 원리들로부터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는 누적형 발전이 중국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구도였던 것이다. 유럽으로부터 배우지 않았다면 동양은 아직도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몰랐을지 모른다. 설혹 그 수준을 넘었더라도 기본적인 역학, 원자와 분자의 기본적 구조, 세균, 세포 등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사실들을 독자적으로 깨닫지 못 했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나라는 예전의 명나라와 유사
 
명나라가 유럽에 뒤지게 된 이후 500년이 흐른 현대의 우리나라는 당시의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나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은 아직도 기술과 그것의 실용성에만 관심이 있고, 진리 탐구를 추구하는 순수과학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왜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한 듯하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순수과학은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줄 아는 듯하다. 심지어는 올림픽 금메달과 노벨상의 사회적 존재 가치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듯하다.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받을 때 거의 한국연구재단에 의존하고 있는데, 순수 수학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조차 연구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할 때, 그 연구가 IT BT 등의 어떤 기술에 속하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어디에 쓰이는 지를 서술(선택)해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연구비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실제 활용되는 기술과의 연관성이 없는 순수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신청할 때 거짓말을 하든지 연구비 신청을 포기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과거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모방하고 하던 시절의 패러다임을 버리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수학이나 기타 순수과학은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가? 우선, 연구에 있어서, 수학과 일부 순수과학에서 추구하는 가치나 사회적 존재 의의와 보통의 과학 또는 기술이 갖는 가치는 그 분야의 연구 결과의 사회적 가치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 과학(특히 실험 과학) 또는 기술에서는 연구의 결과와 새로운 발견 자체가 중요하다. 즉,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고 한다면, 그 논문에 실린 연구 결과가 자체에 그 가치의 대부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과 일부 순수과학은 그 논문의 연구 결과보다는 그러한 연구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학자의 실력’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 것이다. 사회는 그러한 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통해 향상된 그들의 과학적, 수학적 실력의 활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기초과학자들의 사회적 의의를 이해하고 그들이 활동할 영역을 보장해 주고 그들의 실력을 활용할 수 있어야 우리나라도 진짜로 어려운 최첨단 분야인 우주항공 분야나 국방 분야, 신 IT 기술 등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1940년대 초 순수과학자들의 힘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그 15년 후 소련은 순수과학자들의 힘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 이후 냉전의 시기를 겪으며 우주항공분야에서 두 나라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도 뒤를 이어 이 분야에 뛰어들어 서로 앞을 다투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들의 50년 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따라가기는커녕 아주 먼발치에서 그들의 경쟁을 쳐다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과 중국은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일본은 올해에도 노벨 과학상(생리학 분야)을 수상하였고, 우리나라 언론은 과거에도 그랬듯 왜 일본은 노벨과학상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못 받는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일반 국민들 정서도 비슷할 것이다.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에서 큰 차이가 나듯이 과학의 수준에 있어서 일본과 우리나라의 과학의 수준은 차이가 크다. 일본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역사도 길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역사도 우리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다. 우리나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기는 하지만, 정작 문제는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과학과 기술이 갖는 사회적, 경제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고, 과학기술 육성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정하는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20여 년 간 인공위성을 우리 기술로 쏘아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아직 쏘아 올리지 못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최초로 우리나라 땅에서 나로호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일본은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순수 자기 기술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심지어는 2003년에 먼 소행성을 관찰하기 위해 쏘아 올린 하야부사라는 탐사선이 2010년에 기적적으로 귀환하여 일본 국민들은 물론이고 온 세계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너무나 큰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결국 핵심적 차이는 수학과 기초과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수학적, 과학적 실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나라에는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그러한 차이를 불러 온 것이다.

중국도 현재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나 기업들의 기술 수준은 우리에 비해 뒤지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오랜 공산주의 체제의 후유증일 뿐이고, 항공우주산업이나 국방산업 등에서는 우리를 크게 앞서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우리를 앞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은 너무 쉽게 예측가능하다. 중국은 늦게 출발하였지만 그러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이 있고 또한 그들의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이 있고 기초과학자들이 자긍심을 갖고 자기 연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순수 기초과학자는 국가의 자원이라는 인식 하에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수학과 순수 기초과학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수학자들은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 외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다. 연구소도 기업도 받아주지를 않는다. 교수가 되어서도 어려운 이론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분야보다는 논문 쓰기 쉬운 분야로 몰린다. 수학은 논문 쓰는 게 다른 과학 분야보다도 어려운 데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논문 수를 늘려야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하고 있는 높은 수준의 이론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수학자나 기초과학자들에게 논문을 몇 편을 썼는가를 묻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수학자들은 논문에서 밝혀낸 연구의 결과보다도 그러한 수준의 연구결과를 낼 수 있는 ‘실력’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일부 다른 순수 기초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적, 과학적인 소양과 전문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을 국가적 자원 활용 차원에서 육성하고, 그들에게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즉,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주항공 산업뿐만 아니라 IT, BT, 빅데이터, 머신러닝, 드론 등의 각종 첨단산업기술 분야에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리과학연구원과 같은 국가출연연구원의 신설도 필요하고, 기존의 각종 국가출연 연구원에 수학이나 기초과학 연구자들에게 일자리 제공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더욱 필요한 것은 물론 일반 기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이라 하겠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국민들이 기초과학의 사회적 의의와 그것의 속성, 육성의 필요성 등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도 물론 기초과학 육성의 필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재단의 연구비도 매년 조금씩 늘고 있고, 소위 풀뿌리 연구비도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 예산을 쓰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은 과학 연구의 생태계를 교란할 뿐 오히려 정상적인 과학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이 기관은 원래 지난 정부에서 대선 공약사업인 과학비지니스벨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으로, 원래 취지는 국제적인 과학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큰돈을 주어 초빙하고, 오랫동안 거주하게 함으로써 국제적인 과학 연구 허브로 키운다는 것이었는데, 그 특별법이 국회를 통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세부 사항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 사업의 애초의 취지는 완전히 상실된 채, 그저 대형 연구과제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많은 연구비여서 과제책임자는 연구자에서 관리자로 전환이 되어야 하고, 보통의 연구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한다.

기초과학 육성에는 연구비 지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연구하는 사람이 자긍심을 갖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젊은 연구자들이 당연히 기존 연구자들보다 더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일자리나 연구비가 부족하다. 일부 중견 연구자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독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학과 과학기술에 있어서 지난 30여 년 간 눈부신 발전을 해왔고 발전 속도로만 따진다면 우리와 견줄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벨상과 같은 허상은 잊어버리고, 차분하게 과학의 기초부터 내실을 다져야 할 때이다.

 
File
paper.jpg [97.5 KB] (download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