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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269호_정삼만_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을 통해 본 남중국해 분쟁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1-29 17:42:10
  • 조회수 : 703

현안과 정책 제 269호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을 통해 본 남중국해 분쟁


글 / 정삼만(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흑해의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남중국해의 여러 섬이나 암초들이 사실상 중국의 소유로 되어가고 있다. 군사적 침략을 통해야만 확보 가능한 이러한 전략적 목표들이 전시도 아닌 평시에, 그것도 백주에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습 아닌 기습의 방식으로, 공개적이지만 의도불상의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대응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적시·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은 소위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을 적용한 결과이다. 이 전략의 ‘점진적’이고 ‘애매모호’한 특성은 이미 1967년도에 발행된 토마스 쉘링(Thomas C. Schelling)의 저서『무기와 영향(Arms and Influence)』에서 제시되었다. 회색지대전략과 관련하여 지난한 문제는 이 전략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 모색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익숙한 우리로선 이 두 극단의 중간 영역인 ‘회색지대(gray zone)’에 대해선 낯 선 만큼 우리가 이 전략의 적용 대상이 되었을 때 안보 위기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주변국이라는 상대는 늘 진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이어도나 독도 등도 언제든 주변국에 의한 회색지대전략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전략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효과적인 사전대응책 마련이 긴요하다.

 

 2018년『미태평양사령부(US Pacific Command)』는『미인도-태평양사령부(US Indo-Pacific Command』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명칭의 변경엔 분명한 메시지가 있지만 충분히 읽혀지지 않고 있다. 미태평양사령부는 이미 태평양과 인도양 모두를 담당구역으로 관할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명실상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존의 이름을 변경,『미인도-태평양사령부』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 새로운 이름에 어떤 깊은 속뜻이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명칭 변경의 이유에 대해 수긍이 갈 것이다. 그 이유는 남중국해(South China Sea)의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엔 일본이 기여한 바가 크다. 아베 총리가 2007년 인도를 방문, 인도 국회에서 연설할 때 연설제목이 ‘두 대양의 합류(Confluence of the Two Seas)’였다. 본래 합류(confluence)라는 용어의 핵심개념은 합류 그 자체보다는 합류 이후 새롭게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인도(Indo)와 태평양(Pacific) 두 단어 사이에 나열을 의미하는 점(·)이 아니라 두 단어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하이픈(-)이 있음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18년『미태평양사령부(US Pacific Command)』는『미인도-태평양사령부(US Indo-Pacific Command』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명칭의 변경엔 분명한 메시지가 있지만 충분히 읽혀지지 않고 있다. 미태평양사령부는 이미 태평양과 인도양 모두를 담당구역으로 관할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명실상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존의 이름을 변경,『미인도-태평양사령부』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 새로운 이름에 어떤 깊은 속뜻이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명칭 변경의 이유에 대해 수긍이 갈 것이다. 그 이유는 남중국해(South China Sea)의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엔 일본이 기여한 바가 크다. 아베 총리가 2007년 인도를 방문, 인도 국회에서 연설할 때 연설제목이 ‘두 대양의 합류(Confluence of the Two Seas)’였다. 본래 합류(confluence)라는 용어의 핵심개념은 합류 그 자체보다는 합류 이후 새롭게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인도(Indo)와 태평양(Pacific) 두 단어 사이에 나열을 의미하는 점(·)이 아니라 두 단어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하이픈(-)이 있음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림 1 ] 인도·태평양의 합류지점과 진행 방향

 

 

  그렇다면 인도양과 태평양의 합류지점은 어디이며, 두 대양이 합류하여 새로운 큰 물줄기가 되었을 때 그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위 그림이 나타내듯 인도양과 태평양의 합류지점은 남중국해 하단이고, 새롭게 흘러가는 방향도 남방의 호주 쪽이 아닌 북방의 남중국해 쪽이다. 미국이 왜 기존의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명칭을 새롭게 변경하게 됐는지 그 이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남중국해는 해양운송뿐만 아니라 어로자원, 석유 및 가스와 같은 에너지 자원, 그리고 광물자원 등이 풍부한 전략적 해역이다. 이 해역은 현재 국제분쟁수역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해역이 부의 원천이지만 분쟁의 대상은 해역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 해역에 분포되어 있는 암초나 산호초, 간출암 등과 같은 각종 지형지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해역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지형지물들이 ‘섬(island)’이란 법적 지위를 획득한 후 영해나 접속수역, 대륙붕이나 배타적 경제수역 등과 같은 법적 ‘권원(entitlement)’들을 확보한다면 해저를 포함한 해역전체에 대한 주권적 통제나 관할권을 손쉽게 행사할 수 있다. 거기에다 인공적 과정이나 법적 과정 등을 통해 일단 형성된 섬에다 군사적 수단을 설치하면 유사시 인근해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마저 가능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우려상황들이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야심찬 행위에 의해 점점 현실화되어 가고 있지만 이 해역에 국가의 핵심이익이 걸려있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선진강국들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는 중국이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는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색지대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전략개념에 대한 이론적 측면의 상세한 설명보다는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재미있는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게임이론의 대가이자 2005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 메릴랜드대 교수 토마스 쉘링(Thomas C. Schelling)이 1967년도에『무기와 영향(Arms and Influence)』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소위 ‘전략적 점진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흥미로운 한 예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의 핵심은 회색지대전략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 할 만하다. 원본의 내용을 다소 수정 및 보완해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한 엄마가 자기 어린 아들에게 “물에 들어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water)”고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는 엄마가 아들에게 내린 레드라인(red line)으로서 일종의 넘어서는 안 될 문턱(threshold)이다. 아들이 이 문턱을 넘는 순간, 즉 물에 들어가는 순간 처벌이나 제재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로선 엄마가 설정한 이러한 레드라인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의 목표는 어떻게 해서라도 엄마로부터의 제지나 제재 없이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는 것이다.

  아들은 한참 골몰히 생각하더니 입수를 한다. 하지만 입수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둑에 걸터앉고서 두발만 물에 담근다. 이때 수심은 무릎까지다. 엄마는 아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이 입수는 했지만 무릎정도의 수심인데다 신체 전체는 둑이라는 뭍에 걸터앉은 상태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물에 들어간 상태가 아니라고 인식,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다.

  잠시 후 아들은 앉은 자리에서 서더니 더 나아가지 않고 그 곳에서 선 상태로 정지한다. 아들이 물에서 수영하다 익사할 수도 있음을 염려해 원천적으로 입수를 금지시키는 것이 엄마의 의도인지라 아들의 행동에 놀라지만 아들이 앉은 곳에서 단순히 서있는 상태이기 때문이 수심의 변화는 없다. 그래서 엄마는 이번에도 아들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아들은 조금 있다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다 일정 지점에서 멈춘다. 하지만 아직까지 수심의 변화가 없는 곳까지이다. 이를 본 엄마는 다소 염려하지만 아직까지 수심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이번에도 종전처럼 침묵모드를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아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아들은 잠시 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심이 점점 깊어진다. 이를 본 엄마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들은 수심이 배꼽에 이르는 곳까지 가다가 다시 최초 걸터앉은 둑까지 되돌아온다. 아들은 이처럼 최초위치와 최종위치 사이를 오가는 왕복행위를 반복한다. 엄마는 아들의 행동을 제지할지 아니면 더 두고 볼지 깊은 고민을 시작한다. 최종수심이 최초수심보다 더 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왕복행위로 인해 최초수심과 최종수심 간의 평균수심만을 생각하게 되어 수심의 심한 변화를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두 곳의 평균수심과 최종수심 간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번에도 아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아들은 계속해서 수심을 약간씩 늘려가며 최초 위치에서 그 곳까지 왔다 갔다 하는 왕복행위를 계속한다. 엄마 역시 계속 수심이 약간씩은 증가되지만 그래도 아들의 왕복행위와 이로 인한 평균적 수심의 변화가 아직까진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고 인식, 계속되는 아들의 행동에 별다른 금지나 저지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은 이러한 점진적 방식으로 엄마의 특별한 제지 없이 점점 수심의 깊이를 더해가다 결국 수심이 목에 찬 곳에 이르러 수영을 시작한다. 이를 지켜본 엄마는 뒤늦게야 깨닫고서 아이에게 외친다. “좋아, 그 곳에서 수영은 하되 내 시야 밖에선 하지 마라!”

  이 예화는 아들이 엄마에게 회색지대전략을 적용, 엄마가 설정한 레드라인(red line or threshold)을 우회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한 국가가 설정한 레드라인은 상대가 이를 넘을 시 전쟁까지도 불사해야 만 하는 그야말로 꼭 지켜야 하는 공약으로서 그 국가의 사활적 이익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레드라인을 상대와의 군사적 충돌 없이 통과하려면 고도의 전략적 지혜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위 예화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전략적 점진주의(strategic gradualism)와 애매모호함(ambiguity) 등이다. 이처럼 회색지대행위는 지켜보는 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수 있지만 그 행위들의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없어 적시 대응이나 효과적인 억제를 어렵게 한다. 예컨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행위에 대해 미국이 설정하고 싶은 레드라인은 중국이 인공섬이나 지형지물 등을 형성, 사실상의 군사기지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중국이 이러한 레드라인을 우회해서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는 곧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모종의 거대한 게임을 하고 있다면 조만간 승자와 패자의 구별이 확실시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같은 회색지대전략의 점진적 특성이나 애매모호함 등은 중국의 해상원전굴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함·대공미사일, 대공·대함레이다, 대함·대공포, 지휘·통제시설 등과 같은 군사전력을 운용하려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특히 수중의 잠수함을 지휘·통제하려면 소형 발전소 정도의 전력이 필요할 만큼 어마어마한 전원공급이 필요하다. 물론 산호초, 간출암, 소형 암초위에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유사시 고정목표로서 적에 의한 선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약성이 존재한다. 이런 경우엔 해상 이동형 원전이 최적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동 가능한 전력공급자이기 때문에 유사시 적의 선제에 덜 취약하다는 장점이 건조의 명분이 될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해상원전선박이 군사기지가 된 한 섬에 정박하여 전력을 공급할 때 만약 적이 이를 공격하는 경우 방사능 오염이라는 대재앙을 고려해야하고 결국 이러한 공격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남중국해 전체가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죽음의 바다, 저주의 바다가 되어 이로 인한 세계 경제적 파급효과를 고려한다면 공격보다는 포기가 더 합리적 대안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해상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유기업 5개를 묶어 산하에 해상원전 개발 전문회사를 설립한 상태이고, 조만간 원전 20여기를 건설할 것이다. 또한 이들 원전을 영유권 분쟁수역인 남중국해에 배치할 가능성이 높아 미국을 비롯한 유관 당사국과의 마찰도 예상된다. 중국의 이러한 원전건설은 일종의 에너지 주권으로서 타국이 이에 대한 특별한 레드라인 설정과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이러한 원전을 군사적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때서야 이에 대한 레드라인 설정의 필요성이 호소되겠지만 때는 이미 늦을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회색지대전략의 진수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두고 볼 때 이미 50여 년 전에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회색지대전략을 적용할 것이라는 것을 사실상 예견한 토마스 쉘링(Thomas C. Schelling)의 혜안이 돋보일 뿐이다.

  현재 남중국해는 세계 두 번째 무역항로이고 한 해 4만여 척의 선박이 통과하는 세계 해상 물동량의 3분의 1이 거쳐 가는 곳이다. 또한 중국 석유 수입량의 80%, 한·일 석유 수입량의 90% 이상이 통과하는 해상길목이고, 세계에서 4번째로 석유가 많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이 해역은 태평양과 인도양에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여 이 곳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미·중 간 패권경쟁이 불가피 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도 이 곳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인공섬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있고, 미국 또한 항해자유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항행자유작전(freedom of navigation operations)'을 강행하고 있다. 물론 이로 인한 양국 간 물리적 충돌은 당장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점점 고조되고 있는 긴장국면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현재 미국과는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과는 깊은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미국이 주장하는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법적 원칙과 대화를 통한 평화적 문제해결을 지지해 왔다. 하지만 외교적 수사(修辭)만으론 우리의 국익을 실현할 수는 없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용하는 현실세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인 바, 남중국해에서 우리의 국익을 구현시키기 위해선 국제법규 및 규범의 준수뿐만 아니라 구체적 행동이 수반되는 힘 있는 외교도 필요하다. 이에 현재 우리에겐 외교적 수사보다는 외교적 지혜(智慧)가 더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