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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실 게이트’와 87년 체제, 그래서 시민주권 혁명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11-07 14:32:43
  • 조회수 : 1377

경향신문 오피니언 [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대통령 박근혜와 최순실 일가는 한 몸이 되어 국기문란, 국정농단, 국민우롱, 부정축재, 무당통치라는 해괴한 반국가 범죄를 저질렀다. 걸핏하면 국격을 말하던 자들의 손에 의해 나라는 기울어서 조롱거리가 되었고, 분노한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박순실’ 게이트의 지휘자는 최순실인지 몰라도 범죄 행위를 집행한 총책임자는 박근혜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에서 이들의 지시를 받아 범죄행위에 가담한 수많은 종범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즉각 공직에서 물러나 엄정한 수사를 받고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박근혜를 앞세워 권세를 누려온 소위 친박 정치인들도 공범이다. 이들은 당장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숙해야 하며, 범죄행위에 가담한 자들은 수사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 새누리당은 박순실 게이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진 해산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이런 조치들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박순실 게이트는 특정 집단의 일탈이라는 문제를 넘어 우리 헌정체제의 처참한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가 가장 비극적으로 노정된 것이다.


6·10 민주항쟁으로 우리는 군부독재를 끝장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성취했지만, 시민주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1987년에 얻은 것은 절름발이 민주주의였다. ‘87년 체제’의 한 축은 3권분립마저 무력화시킬 정도로 막강한 소위 제왕적 대통령을 제도화한 헌법과 관련 법률들이다.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정당과 국회는 무력화되고, 대권을 향한 권력투쟁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대권경쟁을 위해 패거리를 지어 당권 싸움, 공천권 싸움을 해대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 되어 버렸으며, 정책을 만들어내고 갈등을 조정하는 생산적인 정치는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87년 체제’의 다른 한 축은 지역주의를 근거로 기득권화한 정당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시스템이다.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정당 설립 및 선거운동 등 정치적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법제도 때문에 지역주의 기득권 정당에 대항하여 새로운 선택지를 내놓는 정치적 경쟁이 성립하기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정치시장이 유효경쟁이 사라지고 독과점화되니, 저질 정치가 지속된다. 공적 가치에 헌신적이며 유능한 인재보다는 당 실력자들의 욕심을 채워줄 인사들이 공천을 받기 십상이다. 이런 식의 정치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경제권력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패거리 정치는 반드시 정파의 이권집단화를 초래하고, 그 결과 유력 정치인들은 재벌에 기대거나 조종당하는 신세가 되기 쉽다. ‘87년 체제’하에서 정권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재벌공화국은 변함이 없었다. 국가는 뒤로 물러나고 시장에 모든 걸 맡긴다고 하는 정책, 즉 경제권력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장화 일변도의 정책은 거의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여야 간에 정책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지적한 사실이다.


이번 박순실 게이트를 보면 최씨 일가와 그에 빌붙은 자들이 해먹은 액수가 수백억원인지 수천억원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챙긴 이득은 재벌이 챙긴 이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삼성그룹은 최순실과 정유라가 독일에 세운 회사에 약 35억원을 보냈다고 하고, 정유라에게 10억원 상당의 말을 사줬다는 보도도 있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모금에 앞장서 200억원을 출연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돈을 썼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래봤자 1000억원을 넘을까? 반면 법인세 인상을 막아낸 것 하나만 해도 삼성이 받은 혜택은 적어도 그 수십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대선 당시 국민적 합의였으며 박근혜의 제1호 선거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오히려 정부가 규제완화와 노동개악 등 정반대의 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었음을 고려하면, 수백배의 수익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씨 일당에게 돈을 뜯겼다는 재벌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만, 이들 모두 사실은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이다. ‘87년 체제’가 결국 재벌공화국을 낳았음을 직시해야 한다. 절름발이 민주주의 아래서는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지고 젊은이들이 아무리 ‘헬조선’이라고 비명을 질러도 재벌공화국은 변하지 않는다. 현 위기의 진정한 극복은 시민주권을 확립하는 헌정체제 개혁에 있다. 야권 정치인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헌정중단 사태를 우려한다. 하지만 헌정은 이미 박근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낡아빠진 절름발이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되살려야 할 까닭은 없다.


시민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해야 한다. 대통령 권력만 차지하면 아무리 비상식적 행위를 해도 견제할 수 없는 제도, 헛소리를 지껄여도 장관들은 받아 적고 공영방송은 찬양하게 만드는 제도를 확 바꿔야 한다. 하지만 권력구조 문제는 사실 부차적이다. 시민주권을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 전면적인 비례민주주의와 진정한 지방자치 등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 모든 정당이 득표비율대로 의석을 나누어 갖는 비례민주주의다.


이 제도는 군소정당의 국회 진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기성정당에 더 잘하라는 경쟁의 압력을 가하며, 사회경제적 약자나 소수자 집단 등의 이해가 잘 대변될 수 있도록 하며, 다당제에 입각한 연합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잘 이루어져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비례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6월 항쟁의 혁명적 열기는 여야 정치인들의 타협을 통해 절름발이 민주주의에 갇히고 말았다. 우리는 역사의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시민주권을 위한 총체적 개혁을 시민 주도로 이루어내는 꿈, 시민주권 혁명의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입력 : 입력 : 2016.11.03 20:57:00 수정 : 2016.11.03 21:01: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032057005&code=9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