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물PUBLICATION

이슈페이퍼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연구원의 발간물입니다.

현안과 정책 제8호_박동천_수양동우회 사건과 통합진보당 사건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1-18 10:41:36
  • 조회수 : 3298
 
개인의 내면, 다시 말해 개인의 양심, 신앙, 사상, 가치관 등을 국가 권력이 통제할 길은 없다. “삼군의 지휘권은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했던 공자의 언표는 동양에서도 고전적 격언으로 전승되어 왔다. 서양의 경우, 종교개혁을 위한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와 관인(寬忍, toleration)의 원리를 근대 사법의 대원칙으로 자리매김했다. 권력에 의한 통제는 기껏 외면적인 복종이나 자아낼 수 있을 뿐, 내심의 반감과 혐오를 더욱 키우게 된다는 이치를 깨달은 결과이다.

그렇지만 권력은 언제나 개인의 내면을 통제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전근대 사회에서든 근대 사회에서든, 권력이 때로 이러한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은 상존한다. 근대 사회가 전근대 사회와 구별되는 특징은 그러므로, 권력이 개인의 정신과 영혼을 통제하려들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유혹에 넘어간 권력의 시도가 공론의 감시와 견제에 의해 성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개인의 내면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도를 법이 가로 막을 수 있는지 여부는 법치가 이뤄지고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관건에 해당한다. 법률의 문법에서 이 관건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으로 표현된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주류에게 역겨운 생각을 가졌거나 그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범죄가 구성되지 않고, 그의 행동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배태할 때에만 범죄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기준을 적용할 때, 처벌은 피고인의 행동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얼마만큼 배태하느냐에 비례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비례의 원칙이다. 구체적인 증거에 의한 세밀한 사정(査定)이 판결에 앞서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적인 요구는 비례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 된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통합진보당의 일부 당원들을 “내란음모죄”로 걸어 기소했고, 나아가 통합진보당의 해산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이러한 정부의 시도는 기소된 통합진보당원들의 말이 “내란”이라고 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배태하는지, 그리고 통합진보당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손상하는지 등의 질문을 따지지 않는 성격을 보여준다. 권력의 행사가 바로 이러한 성격을 띨 때, 개인의 내면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자행된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이 글에서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빚어지게 될 정치적 효과이다. 일제에 의해 1937년에 시작해서 1941년에 마무리된 수양동우회 사건과 이번 통합진보당 사건을 이 차원에서 비교하고자 한다. 둘째는 박근혜 정부의 공안몰이가 한국 사회 안에 잠재하는 정치적 대립을 표면화하는 측면이다. 이러한 대결 정책이 단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불행으로 가는 길이다. 셋째는 그러한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공론장이 맡아야 할 역할을 말하고자 한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 당국의 탄압을 우리 사회의 공론이 조장한 측면을 지적하고, 지금부터라도 건전한 분별력이 공론장을 인도하기를 바라는 기대를 피력할 것이다.

첫째, 수양동우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 안창호를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일으킨 일련의 조치들로 구성되었다. 이 사건보다 5년 전, 안창호는 상해에서 프랑스 경찰에게 (죄목이 특정되지 않은 채) 체포되었다가 일본 경찰에게 인계되었다. 윤봉길의 거사가 있던 날, 거사로 인해 검거선풍이 불었을 때, 그물에 걸린 것이다. 조선으로 압송된 다음, (여전히 죄목이 특정되지 않은 채) 신문을 받고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미국과 중국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생계는 어떻게 꾸렸는지 따위, 전기 작가가 물을 법한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했을 뿐인데, 일본 검사는 그 대답 중에 얽어맬 만한 거리를 찾아서 기소했다. 그 해 12월 검사가 구형한 대로 4년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1935년 2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고, 그 후 형기가 만료되었다. 평안도 산골에서 은거하는 가운데 암중모색으로 활동의 여지를 찾고 있었는데, 1937년 6월에 일제는 수양동우회에 대한 검거선풍을 일으키면서 맨먼저 안창호를 잡아 가두었다. 이때도 특정한 죄목은 없이 체포한 다음에, 신문과 고문을 통해 기소할 죄목을 짜 맞추는 식이었다. 그러나 병고에 시든 몸이 수감생활을 견디지 못해, 병보석 중이던 1938년 3월에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181명인데, 41명만이 기소되었다. 그들에 대해 1939년 1심 재판은 전원무죄로 판결했지만, 검사가 항소하여 1940년 2심에서는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에 이르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1941년 상고심은 모두 무죄라고 판결했다. 1심과 상고심을 담당한 판사들로서는 상당한 용기를 발휘한 셈이다.

일제에서 해방되어 독립한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이런 일”이라 함은 1)특정한 죄목이 없이 함부로 인신을 구속하고, 2) 신문과 고문을 통해 먼지털기 식으로 죄목을 짜 맞춰서 일단 기소부터 하고 보는 작태를 가리킨다. 일제 때나 대한민국의 독재 시절이나, 기소된 사람 중에는 간혹 무죄로 풀려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심신이 망가져서, 정의나 진리나 양심의 목소리를 더 이상 내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받은 사람들도 많다.

국가 권력이 법을 빙자해서 저지르는 이와 같은 폭력을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재판부가 그나마 무죄 또는 가벼운 형을 선고해주기를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이 노리는 억압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피고석에 선 사람 개개인이 어떤 선고를 받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한 개인에게 사형을 포함한 중형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선고가 어떻게 내려지든 말든 권력이 노리는 효과는 달성된다는 점이야말로 이런 종류의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해주는 중대한 특징이다.

수양동우회 사건과 안창호의 죽음은 1930년대 말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거 변절하거나 은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제가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노린 목표가 바로 거기에 있었고, 그 목표는 그렇게 달성되었다. 2013년 대한민국에서 그야말로 뜬금없이 이석기를 내란음모로 기소하고, 기소에 앞서 대대적인 보도를 통해 전국민을 상대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이제 또 다시 통합진보당의 해산심판을 청구하는 현 정부가 노리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역시 공포분위기 조성이다.

일제가 죄목을 특정하지 않고 안창호를 잡아다가 일단 족친 다음,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몇 마디를 편집해서 죄목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은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대한민국의 현행 법전에 버젓이 들어가 있는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바로 일제의 치안유지법이다. 치안유지법이나 국가보안법은 검사와 판사 등 사법공무원들이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리, 그리고 증거재판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적용할 일이 없다. 치안유지법이나 국가보안법은 권력이 사법공무원을 주구로 삼아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자 할 때 필요해진다. 이런 악법을 악용해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기준과 비례의 원칙을 스스로 짓밟는 습관에 젖어든 사법공무원들이 일부 발생하게 되면, 그들은 이내 모든 법조문을 이현령비현령으로 적용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수원지검은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원들을 형법상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로 기소했다. 변호인들의 전언을 보면, 증거라는 것이 이미 보도된 녹취록 이외에는 없는 모양이다. 내 상식으로 보면, 문제의 발언이랍시고 보도된 내용들은 실소를 자아낼지언정 “내란음모죄” 따위로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유죄가 나올지 무죄가 나올지는 담당 재판부 판사의 양식과 용기에 달려 있는 문제다. 피고석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판결이 어쨌든 중요하겠지만, 이 사건에는 이미 판결과 관계없는 차원이 있다. 이 차원에서 보면, 판결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찰자에게 중요한 주안점 중 하나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판결의 내용과 상관없이 피고들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나아가 시민 사회에게는 공포분위기가 엄습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행태는 자체로 볼 때 명백한 무리수이다. “민중이 주인 되는 평등세상”이라는 문구는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코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수가 없다. 이런 문구를 트집 잡아 정당해산을 시도하는 권력이야말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크게 해치고 있다. 정상적인 법률가라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다. 즉, 헌법재판관 6명이 여기에 찬성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럼에도 이를 강행한 것은 이석기 및 통합진보당원 일부를 재판하는 법원에게 엄청난 압력이 될 것이다. 이렇게 공포분위기는 시민만이 아니라 판사와 검사를 망라하는 모든 관료들까지 겨냥한다. 만에 하나,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이 이 청구를 받아들인다면, 헌법재판소마저 공포분위기에 굴복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및 근대적 법치주의의 원리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셈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공포분위기는 공론장이 양식과 분별력을 유지하는 한 권력이 선동한다고 해서 조성되지 않는다. 21세기로 접어든 지도 13년이나 지난 대한민국에서 1930년대 군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백성을 상대로 벌이던 짓이 어떻게 반복될 수 있을까? 선거 토론장에서 이정희가 박근혜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이제 보복을 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선은 문제를 개인간의 감정싸움으로 축소시키고 만다. 박근혜의 심술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밝혀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그랬다고 쳐도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이 나라의 국가기관을 장악한 세력에게 공포분위기가 이득이 된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득이 되느냐고? 국정원과 군부가 자행한 선거공작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은폐하려 시도한 도중에 겹겹으로 발생한 은폐의 악순환으로부터 여론의 관심을 떼어냄으로써 발생하는 정권 안보와 정국 주도권의 이득이다. 매카시즘과 마녀사냥과 공작정치와 여론조작을 히틀러와 스탈린과 박정희가 워낙 악랄하게 써 먹었다고 해서, 그들의 전유물로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다. 악랄한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권력은 여론조작을 위해 선동과 조작으로 의제 변환을 가끔 마지못해 또는 자주 즐겨 시도한다.
 
둘째, 현 정부의 무리수는 성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선거부정의 의혹은 “NLL 포기” 논란과 “대통령 기록물 삭제” 논란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겪었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국제적인 관심사로 비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정부가 기어이 정당해산심판까지 청구해야만 했다는 것은 역으로 보면 박근혜의 참모들이 그만큼 초조해졌다는 증거로 읽을 수 있다. 그야말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주 전에 나는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 국정원 선거공작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박근혜가 빠져나갈 길은 비교적 쉽다고 쓴 바 있다. 「박근혜 이후가 걱정이다」, <프레시안> 2013. 10. 28. 사과 성명을 내고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자르면 될 거라고 말했다. 사과하고 꼬리를 자르는 수법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다만, 시간이 지체될수록 사과의 수위는 높아야 할 것이고 잘라야 할 꼬리는 길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사과하고 꼬리를 자른 후에 수세로 몰릴 수밖에 없을 텐데, 수세에서 벗어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 역시 사과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길어질 것이다. 정당해산을 청구하는 식의 무분별한 처사를 한 번만 더 반복했다가는, 남은 임기 내내 식물 대통령의 신세로 전락할 위험마저 없지 않다. 이것은 집권 세력에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불행한 결과이다.
 
셋째, 박근혜 정부의 실패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불행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박근혜로 하여금, 또는 적어도 박근혜 주변의 참모들로 하여금, 2013년의 시점에서 감히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여론을 호도하겠다고 나설 엄두는 못 내도록 시민사회의 공론이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본다.

지난 일을 되짚어 보자면, 통합진보당 또는 그 당을 장악한 것으로 소문난 소위 “경기동부”에 대한 왕따는 보수 세력이 시작한 일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진보”를 자처하는 논객들이 저지른 일이다. “대리투표”는 편의에 따라 허용할 수도 금지할 수도 있는 사안으로 절대악일 수 없다. 대리투표는 투표권자의 의사에 반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위임을 받았다면 투표의 편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 된다. 예컨대 프랑스 선거법은 위임을 담보할 수 있는 엄격한 절차를 전제로 대리투표를 허용한다. 통합진보당의 경우에는 묵시적 위임을 통한 대리투표의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단이 합리적이다. 탈당해서 진보정의당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정치판에서 잠시 물러난 사람은 그런 면에서 성급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대목은 이들의 성급함이 아니다.

대리투표 논란이 발생하자마자, 도처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경기동부”에 대한 매도를 되짚어보자. 그러한 비난들은 죄목을 특정하지도 않고, 증거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창호를 잡아가둔 일제 경찰의 문법과 닮은꼴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보든 보수든 어떤 조직에도 속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쌓아둔 감정의 앙금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경기동부”에 대한 비난들은 대체로 그들의 조직적 단결이 그악스럽다는 정도에 그쳤지, 뚜렷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것이 왜 얼마나 잘못인지를 지적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악스러운 단결력 때문에 섭섭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느슨한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착각한 세력을 단단한 소수의 지지를 받는 세력이 다수결에서 이기는 경우는 민주주의에서 늘 있는 일이다.

경기동부의 그악스러운 단결력에 치를 떤 사람들이 대리투표 논란이 벌어지자 왕따 공세를 통해 그동안 쌓아뒀던 한을 풀었는지는 몰라도, 그 결과 통합진보당은 검찰 공안부가 맘대로 손댈 수 있는 상대로 전락했다. 여론의 왕따 대상이 되면서, 사상의 자유라고 하는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이다.

그리고 국정원은 이석기의 “내란음모”를 슬그머니 공론장에 흘렸다. 이때에도 왕따 현상은 약간 다른 형태였지만 반복되었다. “진보” 논객들 사이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시대착오적인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더니 꼴좋게 됐다는 식의 반응과 그렇지만 내란음모죄는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불행히도 전자의 반응을 후자의 반응이 누를 정도는 되지 못했다. 민주당 내에서 격론이 오갔다고는 하지만 결국 체포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그런 민주당을 비난하는 진보 논객은 별로 없었다. 우리 사회의 공론이 그렇게 통합진보당을 왕따시키는 가운데 공포분위기는 무르익어갔고, 이런 흐름이 계속 통하리라는 착시현상을 공안당국에게 안겨 준 셈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빨갱이 사냥이든, 치안유지법에 의한 불령선인 사냥이든, 원형은 마녀사냥이다. 모든 마녀사냥은 이중 오류라는 구조를 지니는데, 묘하게도 마치 이중 부정은 긍정이라는 듯이 오류가 겹침으로써 오류가 아닌 듯한 착각을 자아낸다. 전염병의 창궐이 마녀 때문일 수가 없듯이,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것이 범죄일 수가 없듯이, 한 사람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이 범죄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마녀와 불령선인과 공산주의자를 잡겠다는 것이 첫번째 오류다. 마녀나 불령선인이나 공산주의자를 잡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아무나에게 이런 혐의를 씌우고서 정작 그가 마녀인지 불령선인인지 공산주의자인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두번째 오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막상 벌어지게 되면, 이럴 때 항상 수반되는 공포의 악순환에 의해, 기초적인 논리적 분별을 지적하는 사람마저 한꺼번에 마녀 또는 불령선인 또는 공산주의자로 색칠을 당하기 쉽다.

두 번째 오류를 지적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가 마녀/불령선인/공산주의자인지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따져 봐야 한다”. 그러나 공포분위기 아래서는 이런 말을 발설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증거재판과 비례의 원칙 등, 보편적 법리를 수호하려는 발언이 쉽사리 마녀/불령선인/공산주의자를 위한 변론으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오류를 지적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가 마녀/불령선인/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죄목이 없으면 기소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내면의 자유라고 하는 문명사회의 보편규범을 공개적으로 강조했다가 마녀/불령선인/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도매금으로 뒤집어쓸 위험이 아주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건강한 공론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통합진보당과 관련하여, 두 번째 오류를 지적하는 발언들은 어느 정도 있었고,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첫번째 오류를 지적하는 발언까지 함께 늘어나야 공포정치로 덕을 보려는 미망에서 박근혜 정부를 건져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결국 사법개혁이라는 의제가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동시에, 법치의 원리를 안정화하기 위한 사법개혁이 가능하려면 다수 시민들의 일반적인 분별력이 필수적임을 알려 준다.
 
1) 「박근혜 이후가 걱정이다」, <프레시안> 2013. 10. 28.

2) 대리투표는 투표권자의 의사에 반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위임을 받았다면 투표의 편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 된다. 예컨대 프랑스 선거법은 위임을 담보할 수 있는 엄격한 절차를 전제로 대리투표를 허용한다. 통합진보당의 경우에는 묵시적 위임을 통한 대리투표의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단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