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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7호_홍경준_복지국가의 '인정투쟁' 비공식 취업의 축소로부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1-20 09:59:20
  • 조회수 : 3590
성찰과 고민이 따르지 않은 공약(公約)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도처에 내려앉은 불안거리로 인해 무너져버린 대다수 우리네의 삶을 떠올려보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본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어버렸지만, 한국형 복지국가 건설은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높게 치켜들어야 할 절실한 슬로건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복지국가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나는 하나의 원칙과 거기에 기초하여 풀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의 발전단계를 고려할 때, 과거처럼 모방할 만한 사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수정과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 그대로의 한국형 복지국가를 우리 스스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먼저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는 무엇인가? 불법과 방임이 뒤섞여 있는 노동시장의 회색지대, 즉 비공식 취업이 축소되어야 한다. 상당 규모의 사람들이 비공식 취업 영역을 삶터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제도의 도입과 확충은 보편이냐 선별이냐와는 무관하게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 결코 한국형 복지국가를 현실화시킬 수 없다. 비공식 취업의 축소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미비를 보완하고, 미준수를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법치를 요구하는 이러한 종류의 국가 활동은 최소국가에서도 용인되는 것으로 결코 이념적 정쟁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함께 시작해야 한다.
 
 
‘한국, OECD 국가들 중 꼴찌, 최하위권’이라는 자극적인 기삿거리가 여러 매체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주권을 회복하거나 새롭게 세운 신생국가들 중 정치적,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이룬 유일한 나라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런 기삿거리를 접하는 일은 상당히 불편하다. 그런데 복지학자로서 더 언짢은 점은 ‘꼴찌’, ‘최하위권’이라는 성적을 받은 과목이 주로 복지와 관련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최근의 자료를 봐도 이런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8일 박명호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한국경제학회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1995년 21위였던 한국의 사회통합지수는 15년 뒤인 2009년 24위로 떨어졌다.1)

 
특히 사회통합 지수 주요 구성 항목의 순위가 줄줄이 뒤로 밀려났는데, 안전 부문(실업률, 노령자에 대한 사회지출, 노령 고용률, 도로 사망률, 자살률, 10만명당 수감자 수 등)과 관용 부문(장애인 노동자 관련 법률 수, 타인에 대한 관용, 외국인 비율)은 1995년 25위에서 2009년 31위로 밀려 꼴찌를 기록했다. 또한 저출산·고령화 부문 (출산율, 고령화 인구 비율)은 4위에서 13위로 떨어졌고, 복지·분배 부문 순위는 27위로 14년 전(28위)과 별 차이가 없이 최하위권이었다. 사실 한국의 복지제도, 특히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그리고 사회서비스와 같은 복지제도의 도입시기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상당히 늦었고, 각각의 제도가 실질적으로 포괄하는 수혜인구의 범위나 제공하는 급여의 수준은 넓지도 높지도 않은 편이다. 한국은 과거 산업화 과정에서 선진국 추격(catch-up)이라는 목표 하에 외국의 제도와 기술을 도입, 소화, 개량하는 활동을 수행하면서 발전을 이룩해왔다. 복지의 발전 과정 역시 다르지 않아서 외국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복지제도들을 차례로 도입하고, 소화하고 개량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집권 정치세력으로부터 조정권과 통괄권을 위임받은 관료기구에 의해 이미 주어진 답을 우리 조건에 맞게 변형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확장하는 것이 곧 복지의 발전이며, 복지국가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인식은 굳어졌다. 나는 복지의 정치화, 즉 정치가 복지를 호명하는 것이 지금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2)한국에서 복지가 생산되고 유통되어 온 방식, 즉 추격형 발전 프레임에 따라 관료기구가 복지 의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더 이상 수월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판단이 그 이유였다. 정해진 목표 달성에 적합한 수단을 찾는 데에는 관료적 합리성이 적합하지만, 목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한 단계에서는 사회성원들을 동원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적 요청으로 부각된 지난 선거국면 이후 지금까지의 경과를 살펴보면, 복지 정치화의 과정은 한국형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하기는커녕 짜증과 불신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복지제도의 도입과 개량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복지담론으로 제시된 정황을 추격형 발전 프레임의 관성이 그대로 답습된 결과라고 진단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보편-선별 논쟁은 복지욕구의 성격과 개별 정책의 목표에 기초하여 관료적 합리성으로 처리되어야 할 영역, 즉 정치화될 필요가 적은 영역을 정치화시킨 대신 정작 정치적 리더십이 요구되는 중요한 문제는 탈정치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복지국가는 복지제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복지국가란 사람들의 생활을 집합적으로 조직화하는 유력한 주체의 하나가 국가임을 다수의 사회성원이 인정하고, 국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활조직화 방식이 민주적으로 작동하도록 다수의 사회성원이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을 집합적으로 조직화하는 하나의 주체로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국가를 다수의 사회성원이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복지제도의 도입과 확대는 결코 복지국가를 현실화시키지 못한다. 복지국가의 역할을 사회성원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국가의 ‘인정투쟁’이 선행되고, 그것을 통해 다수의 사회성원이 복지제공자로서의 국가 역할을 인정하고 신뢰할 때, 한국형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슬로건은 비로소 진지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 복지의 정치화는 이런 문제에 대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생활을 집합적으로 조직화하는 유력한 주체의 하나로 국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즉 복지국가의 역할을 사회성원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가가 무시한 결과, 국가 또한 인정이 유보된 상호 무시의 삶터가 한국에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불법과 방임이 뒤섞여 있는 노동시장의 회색지대, 즉 비공식 취업 부문이 바로 그것이다. 비공식 취업은 “합법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종사하지만, 사회보장 등록․조세 납부․노동법 준수 등 취업과 관련된 법적인 요건을 하나 이상 충족하지 않은 취업”으로 정의된다.3) 최근 이병희 외(2012)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4)는 비공식 취업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11년 8월 기준으로 전체 임금근로자 17,510천 명의 40.2%인 7,044천 명이 최저임금이나 근로기준, 혹은 사회보험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비공식 근로자이다. 퇴직금 미수혜자와 공적연금 미가입자의 비중은 감소해 왔지만 최저임금 미만을 받는 근로자는 증가하고 있다.

둘째, 비공식 근로자의 80%는 최저임금, 근로기준, 사회보험 가운데 두 가지 이상의 보호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셋째,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78.5%는 비공식 고용의 성격을 가지며, 전체 비공식 근로자의 37.4%가 5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법을 준수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비공식 고용이 5안 미만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다.

넷째, 비공식 고용의 발생 원인은 법적인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와 법적인 적용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법적인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비공식 고용이 20%이며, 나머지 80%는 법과 정책을 준수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공식 고용에서 배제된 경우이다.

비공식 취업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소될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비공식 취업은 한국 생활보장체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고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국의 생활보장체계는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우선, 한국의 생활보장체계는 저복지로 특징져지는데, 이처럼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이 상당 기간 회피될 수 있었던 배경은 취업이 복지를 기능적으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을 통해 소득을 획득하고, 그를 통해 생애기간 동안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복지가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한국 생활보장체계의 두 번째 특성은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고생산성 부문과 저생산성 부문의 분화가 생활보장체계의 분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생산성 부문의 노동시장에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적 규제와 보호가 강화되어 온 반면, 저생산성 부문의 노동시장은 그러한 규제와 보호로부터 방임되어 왔다. 고생산성 부문의 취업자에게는 세금을 부담지우면서 사회보험을 비롯한 각종 복지제도를 점진적으로 확대 적용한 반면, 저생산성 부문의 취업자에게는 면세와 감세가 복지를 대신하는 ‘숨겨진 복지체계’의 확대가 주어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세계화의 물결은 이러한 분리를 한층 더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의 조직화는 주로 고생산성 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압력은 고용 사다리의 말단을 차지하는 비공식 취업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공식 취업자들은 복지국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이나 사회보험제도의 규제와 보호에서 제외되거나, 규제와 보호의 대상임에도 실제로는 준수되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가 이들을 무시한 데 대한 되갚음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회피와 무시의 대상이지, 인정하거나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민가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 살기 싦어요”라는 비공식 근로자의 말5)은 사회성원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 국가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비공식 근로자에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비공식 영역의 영세자영자를 포함하면 비공식 취업자들은 우리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한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 사회보험제도의 규제와 보호를 통해 국가가 이들을 인정해야만, 국가의 복지국가 역할 또한 이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상호인정의 전제조건이 성립할 때, 권리와 의무의 교환이 성립하며 한국형 복지국가는 비로소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다.

비공식 취업의 축소는 복지제도의 제대로 된 작동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 자체가 비공식 취업 여부를 가르는 지표이기도 한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는 복지제도의 작동을 저해한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연계를 핵심으로 하는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안이 꼬인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할 뿐 아니라 어렵지 않게 가입을 회피할 수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연계가 국민연금의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을 연계하는 보육 정책의 핵심제도라 할 수 있는 육아휴직제도가 우리나라 보육지원정책의 우선순위에서는 한참 뒤로 밀려나 있는 것도, 직업훈련을 비롯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보편화되기 어려운 이유 또한 고용보험의 광범위한 사각지대와 관련된다. 그 뿐이 아니다. 비공식 취업이 축소되지 않는 한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지원제도로 기능해야 할 근로장려세제의 역할은 여전히 미미할 수밖에 없고, 사회서비스를 통한 고용확대 전략은 저임금과 낮은 생산성, 고용 불안정 등으로 특징져지는 나쁜 일자리 창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를 엮는 씨줄과 날줄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제도의 도입과 확대에 필요한 건실한 재정확충 방안 역시 비공식 취업에 종사하는 다수의 사회성원이 납득하고 참여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국가의 인정투쟁은 법과 제도의 미비를 보완하고, 미준수를 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의 전면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우리나라 전체사업장의 65%로 과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근로시간의 제한 및 연장, 야간·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임금 지급, 부당해고 제한, 남녀차별 금지, 기간제 사용제한 등 근로기준법상 주요 조항의 적용을 배제함으로 인해, 임금체불이나 최저임금, 퇴직금 등 법 적용이 이루어지는 부분조차 실제로는 준수되지 않는 형편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2년 8월 근로기준법적용을 사업체 규모에 따라 법률의 보호에서 차등을 두는 것은 근로자 간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며 국회에 권고한 바 있으며,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도 노동부에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권고했지만 수용되지 않고 있다.

둘째, 근로감독관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근로감독관 제도는 근로감독관이 본연의 업무인 사업장 근로감독, 즉 사업장 점검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 노사 동향파악 등 집단적 노사관계 업무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며, 근로 체불임금 청산지도 업무는 근로감독관의 업무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셋째, 공식 취업의 실질소득이 비공식 취업의 기대소득보다 높을 수 있도록 조세제도를 통한 유인체계의 설계가 필요하다. 경제활성화에 대한 강조로 이미 시들해진 지하경제 양성화 조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넷째, 비공식 취업은 깊고도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는 문제이므로, 집권 정치세력의 일시적 관심이나 관료 기구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와 사, 정부와 여야 정치권 모두가 여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공식 취업 축소를 핵심 아젠다로 하는 사회적 협의기구가 중앙 및 공단 밀집 지역에서 구축, 운영되어야 할 이유이다.
 
1) 세계일보. 한국, ‘관용과 배려’ OECD 꼴찌. 2014년 1월 8일자.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1/08/20140108005556.htm. 2014년 1월 10일 추출.

2) 홍경준. 2011. “최근 ‘복지국가논의’의 정치·사회적 함의”, 황해문화 통권 제 70호.

3) OECD. 2004. “Informal Employment and Promoting the Transition to a Salaried Economy,” OECD Employment Outlook

4) 이병희 외. 2012. 비공식 취업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5) 경향신문.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2011년 9월 26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62112215. 2014년 1월 10일 추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