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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57호_원동욱_홍콩의 우산혁명과 중국 정치의 미래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11-24 10:21:49
  • 조회수 : 2828
“오래전 힘과 재산을 잃은 아버지가 머슴 살던 부자 집에 자신의 막내아들을 입양시켰다. 그 아들은 부자의 보살핌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부자가 되어 음으로 양으로 아버지의 사업재개를 도왔다. 그 결과 아버지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그 아들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 별도로 살림을 허락하였고 나름 특별하게 대접하였다. 한편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재산을 다른 아들들에게도 나누어주고, 그들 또한 막내아들의 사업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힘과 재산을 축적한 아버지는 이제 한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막내아들의 별채 살림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다른 아들들의 가족들이 자유로이 막내아들의 별채에 드나들며 살림을 어지럽히는 경우도 생겼다. 막내아들의 가족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별도로 살림을 허락하였으면 완전히 자율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이렇게 때도 없이 간섭하고 심지어 가정을 어지럽히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버지의 압력에도 막내아들의 가족들은 이런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독립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지붕, 두 가족’을 모토로 걸었던 아버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1997년 7월 1일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를 끝내고 홍콩이 중국에 귀환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덩샤오핑이 주창한 ‘일국양제’(一國兩制)1)라는 통일방식의 시험대였다. 홍콩이라는 국제금융·물류중심지의 귀환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고, 연평균 10%대의 고공성장을 계속해왔다. 개방된 세계와 접촉하는 창구로서의 홍콩은 계획경제의 관성에 쩔어 있던 중국의 체질을 시장화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홍콩의 발전모델을 따라 배우려는 대륙 본토의 노력이 계속되어 왔고, 그 결과 중국은 세계적으로 부상하여 이제 홍콩을 닮은 많은 대도시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홍콩에서 올해 9월 말부터 ‘센트럴 점령(Occupy Central)’을 기치로 홍콩인들에 의한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불복종 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시위전개 과정에서 홍콩 경찰의 최루액을 우산을 이용해 막아내는 평화적 운동방식에서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사실상 홍콩 반환 이후 행정장관은 계속 간접선거로 선출되어 왔다. 행정장관을 결정하는 선출위원회에 친중국적 인사를 더욱 많이 할당하여 결과적으로 베이징 당국이 원하는 인사가 행정장관이 될 수 있게 하였다. 홍콩 시민은 2017년 직접선거 약속의 이행을 보장받기 위해 올해 6월에 관련 법안을 상정하여 비공식적 투표를 실시하였고, 홍콩 반환 17주년인 7월 1일에는 대규모 평화시위를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올해 8월 말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출을 위한 직선제를 보장하면서도 행정장관 후보는 베이징 당국이 추천하는 인사로만 제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홍콩에 대한 중국의 통제를 보다 확실히 하겠다는 베이징 당국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9월 22일 홍콩 24개 대학의 동맹휴업이 시작되었고, 28일에는 본격적인 도심 점거시위가 시작되었다. 홍콩 정부는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 등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도리어 이로 인한 역풍으로 시위대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시위는 두 달 가까이 이어져 현재까지도 아직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베이징 당국과 홍콩 정부의 단호한 해산 요구에도 불구하고, 현재 홍콩은 17-23세인 고등학생부터 대학생이 시위대의 중심에 서서 기발하고 창의적인 방식의 평화적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2) 장기간 시위로 인한 홍콩 시민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서구 등 국제사회의 관심이 홍콩의 우산혁명에 모아지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시위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베이징 당국의 향후 대응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강경 무력진압과 같은 제2의 천안문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베이징 당국이 분리독립이 아닌 다만 ‘일국양제’를 보장하기 위한 완전한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의 평화적 시위에 대해 무력진압과 같은 극단적 처방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겠다는 시진핑 정부로서는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훼손이나 주변국의 이반을 통해 미국의 중국 봉쇄전략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홍콩의 우산혁명을 다루는 해법은 ‘일국양제’의 종국적 목표지인 대만과의 통일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때를 기다리며 여론의 반전을 꾀하거나 현 행정장관의 사임과 같은 적정한 타협안을 제시하는 선에서 베이징 당국의 행동방침이 정리될 가능성이 보다 현실적인 전망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 시 50년간 ‘일국양제’를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고, 이로 인해 홍콩은 반환 이후에도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반환 후 5년이 지난 2002년 이후 홍콩은 점차 혼란에 휩싸였다. 베이징 당국의 사주아래 홍콩 정부가 기본법 23조 조항을 근거로 2002년부터 국가안전법 제정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홍콩의 주권을 반환받으면서 제정한 기본법은 대체적으로 ‘일국양제’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23조만은 홍콩을 중국이라는 틀 안에 묶어두려는 베이징 당국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조항이었다.3) 홍콩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베이징 당국이 홍콩 정부를 동원하여 추진한 국가안전법 제정 움직임은 이에 반대하여 홍콩의 50여만 명 시민이 벌인 2003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또한 2003년 중국 전역을 강타한 사스 이후 어려워진 홍콩 경제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베이징 당국은 본토인의 홍콩 여행규제를 완화했고, 그 결과 홍콩을 뒤덮은 본토 여행객의 무분별한 분유 사재기와 원정 출산 등에 따른 혼란으로 대륙에 대한 홍콩의 민심은 다시 크게 동요되었다. 더욱이 2012년에 홍콩 정부는 의무교육 과정에 도덕 및 국민교육 과목을 신설하는 중국식 애국교육을 도입하려다 13만 명의 항의와 학생들의 총파업에 직면하여 그 시행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홍콩의 중국화’를 꾀하려는 베이징 당국의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국양제’의 실질을 지켜내기 위한 홍콩 시민의 저항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홍콩 시민의 저항에 직면하여 베이징 당국은 오히려 강경파인 렁춘잉(梁振英)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콩에 대한 보다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올해 6월 10일 중국 국무원이 발표한 「홍콩특별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 실천(一国两制在香港特别行政区的实践)」 백서에 따르면, “홍콩의 관할권은 중앙정부가 전면적으로 보유한다. ‘고도의 자치권’은 중앙정부가 부여하는 만큼만 누릴 수 있으며, 그 이상의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일국양제’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갖는 우월성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는 시진핑 정부가 홍콩에 대한 베이징 당국의 관할권을 강조하면서, 홍콩에서조차 상이한 제도를 허용하는 것을 부인하는 듯한 문구이다. 또한 “현재 홍콩에서의 일국양제의 실천은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에 직면했다. 홍콩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전환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특히 ‘일국양제’ 방침과 기본법에 대한 모호한 인식과 편협한 이해를 하고 있다. (중략) 홍콩에서 장기적으로 누적된 심각한 모순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홍콩사회 소수의 사람들이 외부세력과 결탁해 내정 간섭 및 사회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방지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그간 전개되어 온 홍콩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폄하와 함께 강력한 국가주의적 탄압을 예고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홍콩의 민주화시위는 단순한 2017년 행정장관 직접선거 방식을 둘러싼 홍콩과 대륙의 힘겨루기에 국한한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일국’이라는 한 지붕을 강조함으로써 홍콩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강화하여 ‘홍콩의 중국화’를 조속히 이루기 위한 베이징 당국의 국가주의와, 그에 대항하여 ‘양제’라는 두 가족을 강조함으로써 홍콩 자체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홍콩 시민의 민주주의가 격돌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시진핑 정부는 현재 국가의 주권과 안전 수호라는 측면에서 홍콩의 민주화시위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결국 홍콩의 민주화가 대만과의 통일은 물론이고 소수민족 처리문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중국의 홍콩화’로 치닫게 할 수 있다는 극도의 우려와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우산혁명으로 촉발된 홍콩의 민주화시위가 자칫 베이징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 초래될 경우, 대만과의 통일을 추진하는데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홍콩 시민이 요구하는 완전한 직접선거를 허용할 경우, 뿌리 깊은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여 온 티베트나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에도 또 다시 불을 당기는 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홍콩 민주화시위의 불똥이 자칫 중국 본토로 튀어 국내 민주화 세력과 연계됨으로써 서구식 민주주의 개혁의 요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중국내 인터넷과 언론에서 홍콩 시위에 대한 내용을 검열하는 등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레디앙에 소개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훙호펑(Ho-fung Hung) 교수의 논문에서는 홍콩을 바라보는 시선을 (1) 한시라도 빨리 홍콩을 동화시키고 그곳에 본토와 같은 권력행사 기제를 심으려는 베이징 당국, (2) 홍콩 사람의 투쟁보다는 중국의 불투명한 민주적 개혁에서 그들의 희망을 거는 홍콩의 주류 민주주의자, (3) 베이징을 거부하고 홍콩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준비가 된, 지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신생 운동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4) 첫 번째 시선은 챵스공(强世功)으로 대표되는 오도된 신좌파적 관점으로서,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 정책은 단지 전술적이고 과도적인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제국의 중심부인 베이징이 엄격한 통제 아래 홍콩에 대한 통합과 동화를 이루고 종국적으로는 대만과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천관중(陳冠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시선으로서, ‘일국양제’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의 민주화라는 더 큰 과제의 달성을 위해 홍콩이 베이징이 설정한 제한된 공간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중국의 민주화는 절망적이라는 명제 하에 ‘홍콩인의 입장에서 홍콩을 바라보는 시선’으로서 천윈(陳雲)이 대표적이다. 그는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997년 이전에도 런던의 영향을 벗어나 사실상 도시국가로서의 자율적 지위를 누렸으며, 홍콩 반환 이후 2003년까지 홍콩의 도시국가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베이징 당국이 23조 입법이 실패한 이후 경제회복과 사회경제적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국가로서의 홍콩의 경계를 침식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홍콩을 바라보는 각 시선은 모두 중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상이한 전망과 맞닿아 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신좌파의 일부세력은 홍콩에 대한 통제 강화를 통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에 국가주의를 넘어선 파시스트적 경향마저 덧칠하고 있는 반면, 자유주의세력은 홍콩에 허용된 자율성의 경계가 좁아드는 상황에서도 이에 대한 적극적 저항을 포기한 채 중국의 민주화 개혁의 가능성을 과장하여 홍콩의 자율성 확보 노력을 여기에 복속하려고 할 뿐이다. 한편 ‘홍콩 우선’을 강조하는 이들은 60년의 공산통치와 지난 30년의 자본주의적 호황 이후 과거 중국사회를 하나로 결속해주던 전통들이 전멸했다는 관찰에 기초하여 중국 민주화의 가능성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결국 홍콩 우산혁명의 미래는 중국 민주화에 큰 상징성을 가지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향후 홍콩에 대한 시진핑 정부의 정책적 방향은 물론이고 대내외 정책 구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의 중국, 경제개혁의 성과에 도취하여 마땅히 동반되어야 할 정치개혁의 과제를 뒷전에 둔 채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오만한 중국에게 홍콩의 우산혁명은 과연 어떤 교훈을 던져줄 것인지 자못 귀추가 주목된다.
 
1) 하나의 국가 안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공존시키는 것으로서, 덩샤오핑이 주창한 홍콩에 대한 통치원칙이자 대만과의 통일원칙이다.

2) 고가도로 중앙분리대 위에서 공부하기, 길거리 강좌, 지하철역 과외, 차로 위 자습실 설치, 1인용 샤워실, 다양한 예술작품 설치 등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평화롭고 질서있는 시위행동방침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3) 홍콩기본법 제23조는 우리나라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국가전복, 반란선동, 국가안전을 저해하는 위험조직 금지 등에 대해서 최장 30년 감옥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2009년에도 마카오 행정장관이 ‘기본법 23조’에 명시된 국가안전법 제정을 추진해서 또 다시 정치쟁점화가 되기도 하였다.

4) http://www.redian.org/archive/80140 (원문은 Ho-fung Hung, “Three Views of Consciousness in Hong Kong”,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