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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56호_손열_아시아-태평양 새 판짜기 경쟁, 한국은 어디로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11-17 10:45:33
  • 조회수 : 2454
 
박근혜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APEC 정상회의, 미얀마에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와 아세안+3(APT) 정상회의, 끝으로 호주 브리스번에서 G20 정상회의란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였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필두로 인도, 태국, 호주 지도자들과 정상회의를 가졌고 중국 및 뉴질랜드와 FTA 체결을 성사시켰다. 다자외교의 장에서 양자외교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였고 언론도 이런 차원에서 중일관계 개선 분위기 속에서 한국이 외톨이가 되지는 않을까, 한일관계는 이대로 괜찮을까, 한중FTA 체결에 따른 중국경사의 부담 속에서 대미관계는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등 전략적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작 다자외교의 주 무대는 주요국간 지역질서 건축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으로 장식되었고 한국의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못했다. 4년 전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세계의 규칙제정자로 발돋움하겠다는 호언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문제는 목전의 이익을 놓고 양자외교를 벌이는 동안 지역 전체 새 판짜기 경쟁에서 소외되는 경우 장기적으로 구조적 제약을 감내하여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질서를 구성하는 규범, 규칙, 의사진행과정을 제정하는 다자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지역의 안정과 번영, 연대를 논의하는 다자외교의 장에서 강대국 정상을 붙들고 북한 비핵화 협조 요청, 한국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창조경제 실현 방안 설명, 비무장지대 세계생태공원 프로젝트 소개하는 수준으로는 커진 덩치에 걸 맞는 대접을 받기 어렵다.
 
 
이번 일련의 다자외교 하이라이트는 베이징 APEC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이 회의를 주최하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질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그 전략을 주도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 첫 단계는 전략적 공간을 “아시아 태평양”으로 확대한 데 있다. 그동안 중국은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공간을 단위로 하여 자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건축하려는 전략을 펼쳐왔다. 중화질서 2000년의 역사적 공간이면서 해양(태평양)세력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 배제하려는 전략적 공간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래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 후 중앙아시아와 한국을 엮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미국과 일본, 호주 등 태평양 국가들이 주도해 온 APEC 보다는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아시아 지역기구를 중시해 왔다,

이제 중국은 지역 공간을 아시아-태평양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 상징적 선언은 작년 9월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이다. 그는 “아시아-태평양은 미중 양 대국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크다”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중국이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존중하는 만큼 미국도 수 천 년 간 중국의 집인 아태지역에서 이익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중 간 신형대국관계가 아태지역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란 자국 주도의 집을 단단히 건축하는 동시에 아시아-태평양을 미중 공동의 집으로 새롭게 설계하려는 의도라 볼 수 있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이를 전면적으로 구체화하여 선언한 장소가 되었다. 지역 공간 확대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은 무려 68개항으로 이루어진 정상선언문과 수많은 제안서로 드러났다. 그 핵심은 “통합되고 혁신적이며 상호연계된 아태지역을 위한 베이징 어젠다” 속에서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실현을 위한 베이징 로드맵”을 추진하는 것이다.

본래 FTAAP는 2006년 APEC에서 부시 미국대통령이 구체성 없이 제안한 것으로서 이후 미국은 한미FTA 협상을 성사시킨 후 2008년부터 TPP(환태평양동반자 협정) 추진에 전력을 기울였다. TPP를 확산하여 FTAAP를 실현한다는 전략이었다.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경제대국 일본의 교섭참가를 성사시켜 지역 통상질서의 주도권을 일거에 장악할 수 있었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교섭참가신청을 하게 되었고 중국도 한편으로 아시아 중심의 RCEP(지역포괄경제동반자협정) 추진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TPP란 대세에 편승을 심각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 연말을 목표로 한 일본과 미국간 양자협상이 지지부진하고 미국의 중간선거와 겹치면서 조기타결의 전도가 어두워지자 중국은 TPP 가입의사를 개진하는 일종의 교란작전을 펴는 한편 FTAAP라는 미국의 카드를 베이징 로드맵으로 재포장하여 역습을 가했다. APEC 회원국들은 과거 FTAAP를 원론적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야 했고, 미국은 스스로 제안한 카드 추진의 주도권을 중국에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일주일 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완패한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베이징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새로운 제안도 내어 놓지 못하였다. 다만 워싱턴의 심각한 정치적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지지를 받는 몇 안 되는 사안인 TPP의 조기타결을 위한 12개국 선언을 이끌어 냈지만 시진핑 주석의 담대한 제안에 묻혀버렸다. TPP 교섭에 초대받지 못하는 러시아는 중국의 FTAAP 제안을 TPP의 대안으로 간주하면서 중국과 연대하여 미국을 견제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FTAAP가 APEC 역내에서 실현되는 다양한 통합이니셔티브를 조율할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였다. 미국이 추진하는 TPP는 중국 주도의 FTAAP 틀 속에서 조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난처한 미국은 곧 반격에 나설 것이다. 아시아재균형(Rebalance to Asia)이란 미국의 아태질서 건축전략에 입각하여 동맹국에게 더 많은 역할과 부담을 요구할 것이다. 당장 11일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은 한중 FTA의 조기타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FTAAP 베이징 로드맵 지지선언에 따른 미국의 불만 때문인지 난기류 속에서 짤막한 형식적 회담에 그쳤고 한국의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한국의 근본적 과제는 아시아-태평양이란 한층 확대된 지역공간에서 자국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 가는가에 있다. 원래 한국의 지역인식 지평은 훨씬 좁아서 일차적 관심은 한반도이고 이를 넘어도 동북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전략으로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정확히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협력이 용이한 비전통 연성안보 이슈(재난구호, 사이버안보, 에너지, 기후변화 등)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다자간 대화와 협력의 관행을 축적하여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협력 메커니즘 구축으로 이어가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듯이 이러한 이슈들이 논의되는 중심 무대는 13일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이다. 환경/에너지, 재난관리, 금융, 보건, 교육, 아세안 등 이 다자협의체가 선정한 6대 이슈는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의 의제와 상당부문 겹치고 있다. 회원국이 동북아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인도, 태평양 국가들로 구성되어있어 (이른바 확대 동아시아) 한국이 동북아 중심의 이니셔티브를 취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 구상이 비전통 안보의제에 집중하는 까닭에 경제의제에서 체계적인 지역협력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영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질서 건축을 꾀하는 APEC,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등 주요 역내 다자협력체에서 한국은 뚜렷한 지역전략 없이 참가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양자외교를 통한 북한비핵화, 세일즈외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향후 한국의 지역다자외교는 경제영역에 보다 중점을 두고 움직여야 한다. 비전통 안보영역에서 협력(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그것대로 장기적 시야로 추진하되 경제영역, 특히 중국이 내건 FTAAP 등 지역 통상질서 건축 경쟁에서 한국은 양자FTA, 세일즈 외교와 같은 좁은 국익 추구를 넘어 지역이익(regional interest)이란 관점에서 역내 국가 모두가 공생하고 번영할 수 있는 질서건축에 지혜를 짜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번 순방 중 한-중 FTA와 한-뉴질랜드FTA 협상을 타결하여 졸속 시비와 구체적 성과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세계 3대 경제권과 FTA를 체결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고, 아시아 FTA 네트워크와 태평양 FTA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실 현 정부는 작년 6월 “새 정부의 신통상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기 구축된 FTA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통합시장과 미국 주도 환태평양 통합시장을 연결하는 핵심축(linchpin) 역할을 도모할 것”이라 천명한 바 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좋은 발상을 전략과 행동계획으로 구체화하여 실행에 옮겨야 한다. 한국의 위치적 이점(positional advantage)을 활용하여 미중간 FTA 네트워크 경쟁이 안보적 논리에 지배되어 “TPP 대 반(反)TPP”란 대결적 구도로 흐르지 않도록 중견국으로서 역할을 찾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전략은 미중이 주도하는 두 네트워크가 공존하는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일이다. 미국의 TPP가 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화 모델이라면 동아시아에는 경제협력에 중점을 두며 발전의 다양성, 지속가능한 성장을 원칙으로 하는 FTA 모델이 병렬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 협력하여 이러한 이념과 규범을 담는 지역 FTA(예컨대 RCEP)를 제도화하고, 나아가 TPP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공존할 수 있도록 제도설계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FTAAP는 반TPP 혹은 TPP의 대안이 아니라 TPP와 RCEP이 공존하고 진화할 수 있는 일종의 메타FTA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이번 APEC에서 중국의 공세는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반면 한국에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미중간 경합하는 규범과 제도들이 기능적으로 분화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중견국의 적극적 역할공간을 만들어 가는 제도 틀을 구상하는 “아키텍처”의 시각과 “설계/디자인”하는 능력을 개발할 때 창조적 중견국외교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