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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62호_ 박상인_경제정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12-29 10:40:31
  • 조회수 : 2751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한국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새 경제팀의 정책방향은 단기적 경기부양에 초점을 맞춘 과거 정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거시정책 기조를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전환하겠다고 공언하면서 41조 규모의 재정보강 및 금융대출 확대를 제시하였다. 균형재정을 원칙으로 하는 국가재정법 하에서 대규모 재정지출은 용이하지 않으니, 국민주택기금 증액과 같은 재정보강이라는 편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주택기금 증액과 더불어 LTV와 DTI 규제 완화는 건설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금융대출 확대는 한계기업 연명과 금융기관 부실화라는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재정 및 금융 확장정책을 통한 총수요 확대가 마중물 역할을 해서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연계되는 선순환구조가 오늘날 한국경제에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재정지출승수는 0.879~0.852, 재정수입승수는 0.085~0.938 수준으로 1보다 작았다1). 총수요 관리정책은 경제 위기 상황이나 급격한 침체 국면에서 효과적 정책 대응이 될 수는 있으나, 현 시점이 과연 그런 국면에 해당되는 지 의문이다. 오히려 경제활성화를 위한 확대 재정 및 금융 정책이 일정기간 경기를 좋게 할뿐, 실질적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재정건전성만 위협할 수 있다. 한국경제도 노동과 자본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혁신, 경영혁신, 제도혁신 없이는 실질적 성장을 할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재정 및 금융 확장정책과 더불어 최경환 경제팀은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도 발표했다. 그러나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에는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는 건설정책, 안전하고 건강한 생활환경을 위협할 수 있는 유해시설의 허용,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으나 효과성에 대한 검증은 이뤄지지 않은 의료정책 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최경환 경제팀은 또한 가계소득 증대를 위해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임금 인상과 배당률 증대로 유인하는 세제 개편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설사 효과가 있더라도 일부 대기업에만 해당될 수 있다. 제2기 경제팀이 임금인상을 통한 가계소득 증대를 중요시 한다면, 가장 시급한 현안인 통상임금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야한다.

경제구조 개혁에 더 집중해야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최경환 경제팀은 최근 정규직 노동자의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유연화 정책은 기업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는 부작용을 낳고 결국 노동자들의 반발로 인해 기업구조조정마저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개연성이 높다.
 
 
최경환 경제정책과 같은 정책실패가 계속되면, 한국 경제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할 가능성보다 ‘제2의 멕시코’가 될 개연성이 더 높다. 이런 암울한 전망을 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된다. 먼저, 한국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질 개연성이 높다는 전망의 근거는 추격형 경제체제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혁신형 경제체제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기술 프론티어에 근접하게 되고, 기술 프론티어에 접근하면 모방형 전략보다 혁신형 전략으로 성장할 수 있으나, 기존 체제의 기득권자들로 인해 혁신형 전략으로 이행하지 못 할 경우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2). 경제력 집중의 특혜를 누리고 있는 재벌이야말로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Rajan and Zingales, 2003)에서 지적하는 전형적인 기득권 산업자본가(incumbent industrialis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 일본과 달리 경제 위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남미형 싸이클로 전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 규모의 차이다. 2013년 기준으로 일본의 GDP는 약 5조 달러로, 한국 GDP의 4배보다 크고 세계 3위 수준이다. 국가채무가 GDP 대비 230% 수준인 일본이 외환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경제규모와 내국민이 국채를 대부분 수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장기침체에 빠지고 국가채무가 늘어나면, 외환위기와 경제위기가 다시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고를 일정 수준이상 유지하고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법적 장치까지 마련했으니, 1997년과는 다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지속되면 정치적 판단으로 경기 부양책을 주기적으로 남발할 개연성이 커지고 결국 재정건전성의 유지는 어려워질 수 있다.

둘째,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10대 재벌의 매출액 규모는 2003년 GDP 대비 50.6%에서 2012년에는 84.1%로 증가하였으며, 자산총액 비중은 2003년 GDP 대비 48.4%였으나 2012년에는 84%로 증가하였다.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은 최근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향후 지속될 개연성이 높다. 한편 CEO 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2013년 500대 기업에 속하는 4대 재벌 기업들의 부가가치 생산액은 GDP의 10%를, 특히 삼성그룹 19개 계열사의 부가가치 생산액은 GDP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노키아의 전성기에 “One-firm economy”라는 말을 들었던 핀란드의 경우에도 핀란드 GDP에서 노키아의 비중은 4%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한국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황제경영을 하는 재벌에 대한 유일한 교정수단은 도산인데, 경제성장률 저하는 중소 재벌들의 도산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나아가 만약 삼성전자가 노키아처럼 몰락하게 된다면, 한국 경제는 파국을 맞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사례나 남미 사례를 보면, 이런 경제 위기 이후에 양극화는 더 심화된다. 양극화와 경제위기가 반복되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한국경제가 혁신이 없는 정체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혁신, 경영혁신, 제도(사회)혁신을 조장하는 정부의 정책은 “기업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이어야 한다. 기업중심의 개도기식 정책은 기득권 기업과 한계기업에 대한 지원으로 오히려 새로운 기업의 진입과 혁신에 대한 유인을 감소시킨다. 사람중심의 경제정책은 기업의 흥망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차단하되 창의와 도전을 감당하고자 하는 혁신가를 불러낸다. 이런 사람중심 경제정책의 요체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와 사회안전망 및 복지제도의 구비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를 통한 진입장벽의 해소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사회복지 및 실업보험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혁신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고 내부거래를 통해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기술혁신과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196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 과도한 수직계열화로 자동차 부품 산업의 경쟁력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던 예나 1980년대 통신장비 생산업체 Western Electric이 AT&T의 분할로 독립회사가 된 이후 정보통신 장비 산업에서 발생한 기술혁신의 예를 볼 때, 한국 중간재 산업 침체의 주요 원인이 재벌에 의한 과도한 수직계열화에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은 전형적인 수직계열화와 무관한 영역으로 사업 확장을 포괄하는데, 이 경우 특히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수단으로 일감몰아주기가 주로 사용된다. 그런데 일감몰아주기는 산업의 기술혁신을 저해하는 악영향도 끼치고 있음을, 독립적 기업들로 구성된 인터넷 게임 산업과 재벌 계열사 간 일감몰아주기의 대표적 예인 SI산업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제조업 경쟁력 향상과 기술혁신 조장도 재벌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한국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재벌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재벌개혁은 혁신형 경제로 이행하기 위한 제도혁신이며, 이런 제도혁신은 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을 유발할 것이다.

현재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을 비롯한 주요 재벌들에서 경영권 승계가 진행되고 있다. 총수일가의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영권 승계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고 한국경제라는 배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정부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고 부당한 사익추구를 막을 수 있는 정책 집행을 통해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은 삼성그룹의 승계와 지배구조 변화가 한국경제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임을 알아야 하며, 보험업법의 개정 등으로 삼성그룹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해야 한다. 현재 새누리당에서 제안하고 있는 중간금융지주회사제도는 삼성그룹의 총수일가가 지주회사체제 전환의 잇점과 산업과 금융 회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동시에 보유하여 경제력 집중을 극대화라는 두 마리 토끼리 잡는 묘책이라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삼성특별법은 삼성그룹총수일가의 이익에는 부합될지 모르지만, 국민경제에게는 재앙의 씨를 뿌리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중심 경제정책의 한 축이 사회안전망 및 복지제도의 구비라는 맥락에서 볼 때, 박근혜 정부의 연금 개혁안은 개악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들의 노후에 대한 불안과 과도한 자영업 진입을 해소할 수 있는 공적 연금과 기업 연금의 강화이다. 공무원연금 급여를 축소해 재정 부담을 덜겠다는 발상은 그나마 연금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연금제도마저 없애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연금 급여를 축소할 수 있다는 전망과 유명무실한 기업퇴직연금제도까지 보태면, 박근혜정부가 지향하는 정책이 궁극적으로 사회보장연금제도의 사실상의 폐지인지 의아하다.

사회보장제도는 당연히 재정 부담을 유발한다. 이런 재정 부담이 재정 위기를 야기하지 않도록 수급 관리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연금제도가 무력화될수록 노인 빈곤 문제뿐 아니라 자영업 몰락 문제도 더 심각해진다. 연금생활자의 감소는 자영업 창업은 늘리고 외식업이나 여가 관련 자영업에 대한 수요는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연금제도 강화가 노인빈곤이나 자영업 몰락을 방지해 재정 부담을 줄이는 효과 역시 고려해야만 한다. 연금제도의 강화로 재정 부담 증가요인이 발생하더라도, 먼저 불필요한 정부 재정 지출을 폐지하고, 또 필요한 경우 연금 분담금 및 조세 부담 증가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해 재정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접근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와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를 구비하는 큰 틀 속에서 건강한 시장경제제도를 확립해 가는 전반적인 제도적 개혁과 유인체계의 설계가 필요하다. 이런 큰 틀 안에서 재정 건정성의 확보나 고령화, 저출산이라는 환경적 제약조건을 고려하는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구체적 정책 대안들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1) 김필헌, (2010). 『재정승수 국제비교와 시사점』, 한국경제연구원.

2) Acemoglu, Aghion and Zilibotti (2006). "Distance to Frontier, Selection, and Economic Growth," Journal of the European Economic Association, 4(1): 3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