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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37호_김학진_노벨과학상의 낙수효과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7-10 09:59:05
  • 조회수 : 1928
현안과 정책 제137호
장기적인 저성장에 진입한 한국 경제의 국면 전환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들이 요구된다. 이제까지의 경제성장 패러다임인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를 넘어선 선도자(first mover)들이 쉽게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필요하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새로운 사고방식의 확산과 같은 무형의 기여는 물론 취업률을 제고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기여도 해야 기초과학의 고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학술지 Nature에 게재된 한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를 통해 이에 관하여 생각해본다.
 
2016년 6월 과학학술지 Nature에 게재된 한국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Nature 534, 20-23; 2016)의 제목은 “한국의 노벨상 꿈(South Korea’s Nobel Dream)”이다. 그 대강의 내용은 여러 국내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이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 과학기술정책을 생각해보자.
 
한국의 과학기술 R&D 투자 규모
 
2014년 한국의 과학기술 R&D 투자는 GDP 대비 4.29%로, 이는 이스라엘의 4.11%를 넘어서는 세계 1위의 투자 비율이다. 1999년 한국의 과학기술 R&D 투자는 GDP 대비 2.07%로 OECD 평균 이하였으며, 2017년 한국의 과학기술 R&D 투자는 GDP 대비 5%에 이를 예정이라고 한다. 2014년 한국의 과학기술 R&D 투자 중 75%가 산업계에서 나온 것으로 정부 투자의 3배가 넘으며, 전체 R&D 투자의 82%는 시험개발 및 응용연구에 관한 것으로 기초연구 투자의 5배에 육박한다. 시험개발 및 응용연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특허 출연 건수를 살펴보면, 인구 1백만 명 당 한국의 국내외 특허 출연 건수는 삼성, LG 등 산업계 R&D 투자에 힘입어 4591건이다. 이는 일본(3659건), 독일(2227건), 미국(1611건), 중국(617건)을 제친 세계 1위이다. 발표 논문 수로 기초연구의 수준을 가늠하기도 하는데, Nature 기사의 자료에 기초하면 국가별 인구 1백만 명 당 발표 논문 수는 특허 출연 수만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영국, 독일, 한국, 스페인, 일본, 중국 순이다. Nature 기사에는 미국에 관한 자료가 없이 이들 국가에서 발표한 논문 수가 나와 있는데, 중국 35만 편, 영국 15만 편, 독일 13만 편, 일본 8만 편, 그리고 한국에서는 인구가 비슷한 스페인을 근소하게 앞선 6만 편이 발표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인구를 감안한 통계 결과나 발표 논문의 편수는 각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기 힘들다.

2014년 R&D 투자를 절대 금액으로 살펴보면, 가장 큰 경제권인 EU는 3590억 달러, 중국은 2130억 달러를 투자하였으며, 미국은 그 중간인 2800억 달러 정도로 투자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은 GDP의 3.6%인 1660억 달러를 R&D에 투자하였으며, 한국은 605억 달러, GDP 대비 비율에서 한국에 추월당한 이스라엘은 한국의 1/5 수준인 125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적은 투자로 상당히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의 과학기술정책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2014년 한국의 R&D 투자액 중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를 원화로 표시하면 11.2조 원인데, 이 중 산업계에서 투자한 금액이 더 많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R&D 투자액 14.5조 원 중 30% 정도가 기초연구에, 70% 정도가 시험개발과 응용연구에 투자되었다. 산업계의 기초연구 투자는 산학 협력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산업계 기초연구들의 많은 부분이 비공개 연구임을 생각하면 이들 연구의 상당 부분이 지식 자체가 목적인 순수한 기초연구라고 말하기 힘들다. 정부 출연 연구원 역시 주로 산업 기술개발에 치중하고 있으며 비실용적인 기초연구는 부수적이다. 2018년에는 기초연구 투자를 2014년 전체 R&D 투자액의 18%에서 36%로 늘려갈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변화
 
한국은 전통적으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빠른 추적자로서 뛰어남을 보여 왔다. 정부가 목표를 정하고 산업계 파트너에게 자금을 쏟아 부어 수행하도록 하는, 즉 재벌을 선호하는 경제정책은 박정희 정부 이래 한국 경제의 뼈대를 이루어 왔다. 재정 지원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전략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G20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적인 정책으로 작동하였으며,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 정부로 이행된 이후에도 기술 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은 초당적인 우선순위의 경제정책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런 경제정책은 마찬가지로 작동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정책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알파고’로 상징되는 인공지능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이런 과학기술정책을 보여주는 예이다. 박근혜 정부는 2020년까지 인공지능에 1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며 민간 분야에서 2.5조 원을 투자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성과 LG 같은 기업이 참여하는 민관 연구기관을 설립하려 한다. 이런 접근은 무비판적인 자동반사적 접근이며, 정부 예산을 한국이 필요로 하는 기초연구 형태가 아닌 제품 개발에 집중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는 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의 직접적인 도구라는 개념에 벗어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경제발전의 도구가 아닌 과학지식 자체를 위해 과학을 지원하는 정책 변화도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2007년 대선 때 몇몇 과학자들이 최고위 정치인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과학정책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일환으로 기초과학연구원(IBS, Institute of Basic Science)이 건립되었다. 정부의 싱크탱크인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 박영아원장에 따르면 IBS는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서 국가에 처음 제안한 프로젝트이며, 이명박 정부의 공약 사업이었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라는 연구-기업 메가 허브를 만들려는 큰 시도의 일부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계획은 뒤이은 정치적 논쟁 결과 축소되었지만 IBS는 변형된 형태로 살아남았다.
 

 
거대과학 중심의 과학정책
 
한국은 남극에 최신 기지를 건설하는 데 1070억 원을 투자하였는데, 이 기지는 미국의 극지과학 연구책임자의 부러움을 산 최신의 시설을 갖춘 것이다. 한국은 포항가속기라는 거대과학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4000억 원을 투자하고 있다. 이를 통해 x-선 영역의 레이저를 건설하여 fm 척도의 초고해상도 (1 fm는 10-15 m로 이런 고해상도는 원자의 구조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이다) 영상화 작업을 실현하려고 한다.

연간 3000억 원에 달하는 IBS 예산의 1/3은 중이온 가속기로 상징되는 RISP(rare isotope science project)에 투자되고 있다. 포항가속기는 전자(electron)를 가속할 때 발생하는 빛을 연구에 이용하는데 비해 중이온 가속기는 전자보다 훨씬 무거운 이온(ion)을 가속하는 실험기구로, (기구라기보다 설비를 갖춘 거대구조물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원자핵과학과 생물의학 분야에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의 과학은 거대시설을 필요로 하는 과학을 넘어 연구비 면에서도 거대해졌다. IBS는 2021년까지 산하에 50개 연구센터를 개소할 예정인데 (현재 26개 연구센터 개소) 각 센터에 연평균 100억 원씩 최소 10년간 지원한다. 김두철 IBS 원장의 말마따나 이는 큰 연구비를 사용하여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연구비 규모는 한국과 같은 경제 규모의 국가는 물론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로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진과학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개소된 26개 연구센터 중에서 5개 센터의 센터장이 외국인이다. IBS의 한 연구센터는 암흑물질의 구성 물질로 생각되는 액시온(axion)을 찾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암흑물질은 우주를 구성하는 전체 에너지와 물질의 약 27%에 해당하는 가상의 물질이다. 다시 말하면 액시온은 아무도 그 존재 자체를 장담하지 못하는 입자로, 이를 찾는 연구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보상 연구과제(high risk high reward project)이다. 이 연구센터가 똑같은 연구를 수행하는 미국의 연구실보다 빠르게 액시온을 찾아낸다면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액시온 연구센터는 막대한 연구비 덕분에 미국의 경쟁 연구실보다 더 나은 장비를 곧 갖추게 될 것이며, (액시온이 존재한다면) 액시온을 찾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평가된다. 이런 연구를 지원하는 입장은 액시온의 발견 여부와 무관하게 한국 물리학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IBS는 노벨상에 근접하는 연구 수행을 통해 한국 과학의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정부의 과학기술 R&D 예산이 지속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은 과학기술정책분석자들이 우려하는 큰 어려움 중 하나이다.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연구비 규모와 관련된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이다. 브렉시트 같은 국제 경제의 돌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구절벽’이 상징하듯 한국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GDP 대비 과학기술 R&D 투지 비율이 높아지더라도 정부 R&D 예산이 증액될 여지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Nature 기사에는 이외에도 잘 알려진 한국 과학기술의 문제점들이 소개되어 있다. 관료주의적 특성이 반영된 평가시스템은 국내 과학자들이 거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며, 덜 유명한 학술잡지에 논문을 발표하도록 유도하는 등 일반적인 과학 연구 성과의 평가 방향과는 상반되는 시스템이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여성차별적인 사회문화는 학생들의 창의성 발휘나 여성 과학자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연구실 내 소통을 힘들게 하는 요소로 널리 지적되고 있다.

Nature 기사 중에는 이런 어려움들이 반영된 결과로 보이는 내용이 하나 언급되어 있는데, 2008년에서 2011년 사이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의 70%가 미국에 남으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박사 후 연구 경험을 쌓은 인력들이 미국의 대학 기업 연구소에 취업하였다는 소식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과학기술인력이 유출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급인력의 유출 현상은 세계화시대에 자연스럽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한 손실이다. 여기에는 앞에 언급된 어려움들 외에 예전과 많이 달라진 사회경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저성장 국면에서 국외에서 연구 경험을 쌓은 과학기술자들이 국내에서 정규직 직장을 구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으며, 높은 주거비로 대표되는 고물가, 빈부격차는 고급 인력들이 정규직을 얻더라도 국내에 정착하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박사학위, 박사 후 연구과정이라는 긴 교육 과정을 마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30대 중후반에게 한국의 상황은 N포 세대와 다르지 않게 절망적일 수 있으며,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당연히 그를 택할 것이다.
 

 
선도자의 육성
 
노벨과학상은 빠른 추격자가 아니라 많은 추격자들을 동반하는 선도자에게 주어진다. 과학계의 선도자는 내부적으로 과학자들의 관심을 중요한 연구 주제에 집중시키고 그에 관한 활발한 소통을 통해 과학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다. 선도자의 과학적 성과는 경우에 따라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이 효과는 예기치 못한 부수적인 효과라는 것이 올바르다. 선도자의 활동과 성과는 외부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줌으로써 커다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선도자들이 다른 여러 분야에서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최근의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과학자들의 의견이 이전보다 많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보이지만 그 줄기는 여전히 이전의 추격자 전략에서와 같은 ‘선택과 집중’이다. 이 전략이 ‘Creative Korea’에 필요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최선인지 의문이 든다. IBS는 한국 과학의 허브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본 전략은 선택과 집중으로,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IBS로 인한 여러 가지 연구 자원의 편중이 한국 과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한다. IBS는 전국적으로 분산된 독일의 Max Planck 연구소와 일본의 RIKEN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연구 인력이 풍부한 나라의 경우 이런 네트워크가 효율적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분산된 연구센터는 시너지 효과나 소통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이런 점에서 IBS 예산의 1/3 정도를 사용하며 생화학, 생물, 화학, 수학 및 컴퓨터 과학, 물리, 과학교육, 과학고고학 분야를 한 곳에서 교육 연구하는, 또한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Weizmann 연구소를 모델로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한국의 사회경제 상황은 암울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사회경제 상황은 선도자 혹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업그레이드된 빠른 추격자를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선도자로서 실패한 경험은 추격자가 업그레이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과학에 대한 투자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바꾸는 데 실질적으로 - 경제적 측면이든 기초과학의 무형의 이득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과 창조성 제고라는 인식의 측면이든 – 기여하지 못한다면, 선택과 집중을 통해 노벨과학상을 수상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관심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장기적으로 한국의 과학은 붕괴할지 모른다. 자연과학을 포함한 기초학문 전공자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이 분야 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과하는 현상은 이를 미리 보여준다.

사회경제적 국면 전환을 위해 선도자들을 배출 격려하기 위한 처방들은 획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잡초에는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풀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쓸모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인간중심적인 정의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풀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은 잡초를 육성하는 것과 같은, 다양성을 통해 창조성을 확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학을 포함하는 기초학문 전공자를 산업계에서 채용하는 것을 강제하거나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기초학문 전공자들에 대한 산업계의 수요 창출, 그들을 지렛대로 하는 다양성을 통한 선도자 배출을 도모하는 처방이다. 이제까지 주도적인 패러다임인 빠른 추격자의 커다란 관성을 생각하면 이런 처방은 실천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초학문 전공자를 산업계에서 고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들은 얘기는 한 제지회사에서 창사 이후 처음 고용하였던 물리화학 (화학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분야) 전공자가 회사에 크게 기여하여 이후 이 분야 전공자들을 대거 고용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영문과 출신이면 거의 모든 기업에서 우선적으로 채용하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 그들의 역할이 단지 영어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재 산업계에서 경영, 공학 등 특정 전공자들만 필요로 한다면 산업계의 패러다임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어려움들은 이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기초학문 연구자들을 폭넓게 활용하려는 사회분위기가 확산되고 획기적인 방안들이 널리 시행되어 한국 경제의 돌파구들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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