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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363호_전명윤_홍콩 민주화 운동의 의의와 전망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2-25 11:45:18
  • 조회수 : 179

현안과 정책 제 363호


홍콩 민주화 운동의 의의와 전망

 

​글 / 전명윤 (여행작가)



요 약 문

 

누군가에겐 이미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코로나 팬더믹이 시작되기 1년전인 2019년에는 연이어 벌어지는 홍콩 민주화 운동관련 소식이 모든 매체의 국제면을 뒤덮고 있었다.

오늘은 몇 만이 모였다라는 기록 갱신을 시작으로 7월부터는 의회점령, 공항점거, 총파업이 이어졌고 이어서  폭력이 격화됐다.

2019년 11월 구의회 의원 선거에서의 민주계의 압승은 6월부터 이어진 대장정의 절정이었다. 모두가 어떻게든 수습이 될거라 믿었던 그 승리로부터 불과 두 달. 코로나 팬더믹이 몰려왔고 홍콩은 전세계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는 이들의 염원이 넘실거리던 거리엔 침묵이 이어졌고, 2019년 가을, 영국식민지 시절의 법률을 근거로 궁색하게 집행했던 마스크 금지법이 무색하게 이제는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시대로 변했다.

어느 순간 도시 전체를 사를 것 같던 불길은 민주화 시위대의 동력저하도 중국의 폭압적인 개입도 아닌 코로나 팬더믹이라는 세계적인 유행병에 의해 진화돼버렸고, 시위가 잠잠해진 틈을 타 홍콩 행정부와 중국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 야당의원의 의원직 박탈, 그리고 오히려 선거법 개악을 거듭하며 앞으로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도시 홍콩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권리수호운동

우리야 중국반환 이후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홍콩 시민들의 저항사를 들춰보면 1967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벌어지던 시기 좌파적 열정에 가득한 반영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저항운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세기 초 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도 일종의 영국 식민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이었으니, 홍콩은 크게 영국식민지시절 영국 총독부와 두 번, 그리고 중국 반환 이후 2014년 우산혁명, 그리고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를 거치며 홍콩 행정부와 두 번의 격돌을 벌였다.

대부분의 시위는 권리 요구 투쟁의 성격을 띈다. 즉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권리를 내놓으라는게 모든 시위가 가지는 일관적인 특징이다.

시민 참정권 운동이나 여성 참정권운동이 그랬고, 흑인 민권운동이나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달라는 요구와 그리고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시민과 정부의 격돌을 이끌어 낸다.

2019년 시위 직전에 벌어진 우산혁명도 기본적인 시민들의 요구는 지금까지 홍콩 시민들에게 없던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요구에서 시작된 싸움이었고, 시민들은 베니 타이 교수의 제안에 호응해 홍콩의 상업가인 센트럴 일대를 점령함으로서 그들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에비해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의 경우는 권리 쟁취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누리던 권리를 유지해달라는 요구에 가까웠다.

홍콩은 전통적으로 시민 개개인의 개인적 권리는 서구의 어느 나라 못지않을 정도로 보장됐다. 지금이야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위세를 떨치는 시대지만 불과 2002년만해도 국경없는 기자회가 만든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엔 홍콩은 세계 18위로 당시 기준 아시아 1위. 같은 시기 한국은 39위로 아시아 4위에 불과했다.

우산혁명이 있기 전인 2014년 이전만해도 중국인이 모일만한 곳이면 여지없이 중국으로부터 탄압받던 명상 수행단체인 파룬궁 회원들이 ‘척살 중국 공산당’같은 본토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과격한 구호를 앞세운 홍콩의 온갖 길목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중국과는 동떨어진 체제를 유지하는 홍콩의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이런 개인이 누리는 권리에 비해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는 크게 뒤떨어졌던게 또 홍콩이다. 홍콩 의회는 현재 약 70명의 정원으로 이루어졌는데, 35석만 우리네 지역구 개념의 주민투표로 선출하고 나머지 35석은 직능별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이 직능별 비례대표제는 한국처럼 정당투표의 성격을 띄는 것도 아닌 홍콩 경제를 뒷받침하는 주요 업계가 자기 업계에 배정된 사람을 의회로 파견할 수 있게 배려한 일종의 기업특권 같은 제도에 가깝다. 직능별 비례대표는 자체 선거구를 가지고 있으며, 투표권도 업계 종사자 모두가 아니라 해당 업계의 법인, 혹은 중역이상의 개인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에 대표성 문제도 항상 논란이 되는데, 금융계 선거구의 경우는 투표권자가 고작 132명. 쉽게 말해 132개의 법인에만 각 하나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반면, 교육계의 경우는 교육 종사 노동자 대부분이 참여할 수 있어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 88964명이나 된다.

금융계와 교육계는 각각 홍콩의 직능별 비례대표제에서 가장 적은 투표권자를 지닌 업계와 가장 많은 유권자가 있는 업계를 비교한 것에 불과하지만, 극단적 데이터라고는 볼 수 없다. 직능별 비례대표 의원선출을 위한 업계의 유권자수는 보험업 141명, 운수업 178명, 농어업 160명등이다. 농어업 종사 투표권자가 홍콩 전역을 통 털어 고작 160명 임에도 한 선거구가 유지되고, 이들 중 한 명이 의원이 된다는 것만 봐도 이 제도가 얼마나 대표성이 취약한지 알 수 있다.

2014년 우산혁명도 근본적 원인은 홍콩 시민들을 대표하는 홍콩 행정장관을 보통선거로 선출하게 해달라는 요구였으니 홍콩 시민의 정치적 권리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반면 2019년 송환법 개정 사태로 촉발된 민주화 운동은 운동은 그전까지 홍콩인이 누리던,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최소한 중국으로는 송환되지는 않는 기존 권리를 유지시켜 달라는 운동에 가까웠다. 즉 운동의 성격이 시작부터 공세적이라기 보다는 방어적이었고 사회적 혼란을 달가워 할 리 없는 기업계조차 송환법 반대투쟁 초기엔  시위대의 편을 들었다. 홍콩의 자유야 말로 홍콩 경제가 번영을 누리고 신뢰가 생명인 금융업계의 이익에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홍콩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여한 만큼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우리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홍콩의 직능별 비례대표제가 큰 저항없이, 심지어 2019년의 폭발적 상황에서도 직능별 비례대표제를 균등하게 손 보자는 주장이 분출되지 않은 이유는 홍콩 시민들은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환법 초기 기업의 반발은 정부에 큰 부담이 됐고 운동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는게 상당한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초반 ‘송환법 반대’ 한가지로 통일됐던 구호는 이 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며 결국 2014년 이래 홍콩 시민사회의 요구였던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와 같은 정치적 요구들이 추가되는 후반기를 맞이했다.

 

홍콩 민족주의의 발흥

홍콩 국제공항에서는 광둥성에 있는 몇개의 도시로 바로 연결할 수 있는 교통편이 있다. 굳이 입국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이미그레이션 구역에서 바로 이동 할 수 있기 때문에 꽤 유용하다. 공항에서 중국으로 연결되는 곳을 표시하는 간판엔 往内地라고 써있다. 내지. 이게 홍콩 사람들이 중국 본토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홍콩과 중국을 구분할 때 홍콩, 그리고 중국 본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홍콩 사람들에게 본토는 홍콩을 뜻한다. 홍콩은 오랜기간 그 자체로서 도시이자 국가로 기능해왔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의 일원이 된 홍콩은 그 전까지는 그저 해적이나 정치적 도망자, 혹은 밀리고 밀린 끝에 이 척박한 곳에서 반농반어를 하는 극소수의 하층 계급이 살던 땅에 불과했다. 아편전쟁의 패배, 난징조약으로 인해 홍콩이 영국에 할양된 이후 중국의 역사란 무능한 청제국 조정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며 온갖 열강이 달라붙어 해안가 마다 조계지를 세우고 영토를 야금야금 점령당한 시기였다. 본국의 혼란속에서 홍콩은 각광받는 피난지였다. 국가적 관점에서야 그저 서구의 식민지일 뿐이었지만, 전란속에 생명을 부지하지위해 피난을 가야하는 개개인에게 영국이라는 울타리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대혼란, 심심치 않게 벌어지던 집단 학살로부터도 가장 안전한 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홍콩은 피난지로 각광을 받았다. 중국대륙이 전란에 휩싸이면 인구가 풍선처럼 팽창했고, 잠시 평화의 시기가 오면 팽팽했던 인구의 바람이 급속도로 빠졌다.

연도

홍콩 인구

중국 상황

1841

약 7450명

아편전쟁 시기

1859

8만 6941명

태평천국 내전기

1901

36만 8987명

청제국 말기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난민 유입기

1911

45만 6739명

신해혁명 발발 1년 전

1931

84만 0473명

1차 국공내전 및 만주사변

1938

약 150만 명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

1945

약 66만 명

2차 세계대전 종전

1949

약 186만 명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중화 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이렇듯 홍콩과 중국을 오가며 연명하던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나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건만 다시 내전에 휩싸이자 사람들은 홍콩으로 재차 몰려들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남과 동시에 고향으로 가는 문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분단과 한국전의 와중에 잠시 이남으로 피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휴전선을 경계로 갇혀버린 것처럼 말이다.

한때 한국에 천만에 달하는 이산가족이 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이 인구의 과반을 점유했던 적까지는 없었다. 이에비해 홍콩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디아스포라로 이루어져 있다. 2차대전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건국되고 때로는 정치, 종교적 이유로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발생했지만 인구의 절대 다수가 디아스포라로 이루어진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홍콩이 거의 유일하다.

집단 실향민 정서는 홍콩을 부유浮遊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홍콩은 잠시 머물려다 눌러 앉은 땅일진 모르겠으나 고향은 아니었다. 실향민들은 중국인들 답게 지역별로 향우회를 만들고, 고향요리를 잘하는 요리사가 대륙에서 나타나기라도 하면 거금을 들여 스카웃해서는 홍콩에서 식당을 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요리를 즐기며 고향을 추억했다. 그들은 홍콩에 거주할 뿐 고향의 정서를 유지했다.

소위 말하는 홍콩 본토주의는 이들 20세기 초 홍콩으로 이주한 뒤 갇혀버린 노인세대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래 홍콩 시민들이 애착하던 ‘우리 홍콩’이라는 의식은 홍콩의 역사적인 건물을 철거하거나 오랜시간 홍콩 시민들이 사랑하던 노점상을 허가 만료를 이유로 극소수만 남겨놓고 철거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표현화되기 시작했다.

홍콩 사람들은 홍콩 반환 당시 브리타니아 호가 정박했던 퀸스 피어가 매립으로 인해 사라지고,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수노점 만웬면가 民園麵家나 디저트 노점 육입감품 玉葉甜品이 없어지는 걸 홍콩다움의 사라짐이라고 봤다. 짧은 도시의 역사에서 사람들의 기억속에 또렷하게 남은 상징물이 해체될때마다 ‘중국이 우리 도시를 지워내기 위해 이런’다는 약간의 음모론이 더해졌고, 이는 이내 ‘우리 홍콩’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졌다.

기초적 감상에 가깝던 홍콩의 민족주의는 우산 혁명을 기점으로 증폭되다 2016년 노점단속에 맞선 청년 활동가들이 몽콕에서 경찰과 대대적으로 충돌한 피쉬볼 레볼루션을 통해 공격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다.

사실, 홍콩 본토주의자들, 혹은 홍콩 독립세력의 정치적 성향이나 그들의 중국에 대한 인종주의적 접근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2019년 홍콩 시위의 가장 유명한 구호 ‘광복홍콩, 시대혁명’을 만든 에드워드 렁의 주장은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와 여성혐오까지 여러면에서 한국 극우들의 주장을 빼닮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홍콩 민주화 세력은 리버럴 좌파, 혹은 자유주의자라 이해 할 수 있는 홍콩 민주당과 공민당. LSD같은 사민주의 정당과 극우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청년 본토주의자의 아주 느슨한 연대체에 가깝다. 사실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민주화 운동세력이라기 보다는 반중연대에 더 가깝지만 젊은 활동가들 대다수가 반중과 중국혐오를 하나로 본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홍콩야당과 상당한 입장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홍콩 기본법의 독소조항 때문에 태어나게 된 홍콩 국가보안법

홍콩 기본법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의 미니헌법같은 것으로 1997년 홍콩 반환시부터 2047년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가 종료되는 시점까지만 효력을 발휘하는 기한이 한정된 법률이다. 홍콩 기본법은 1984년 홍콩 반환을 위한 영중 공동선언에 의거해 1985년 중국의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이후 전인대)에서 작성, 1990년 전인대를 통과했다.

법안은 일국양제가 유지되는 50년간 홍콩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사실상 몇가지 독소조항으로 인한 우려는 1990년대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헌법격인 기본법조차 홍콩 시민들의 투표가 아닌 중국에 의해 만들어져 집행된다는 정통성 문제또한 항상 지적돼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법은 적어도 2019년 이전까지 홍콩 시민들의 자유과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패가 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2019년의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와 2020년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한 소강기를 맞이해 중국 정부에 의해 기본법에 의거한 중국화 과정에 있어서도 아주 유용한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콩 기본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기본법 18조와 23조, 그리고 158조를 꼽는다.

기본법 18조

(상략)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소속된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 위원회와 홍콩특별행정구 정부의 의견을 구한 뒤 이 법의 첨부문건 3에 포함한 법률을 증감할 수 있으며(중략) 홍콩특별행정구가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결정되는 경우 중앙인민정부는 명령을 발포하고 관련 전국성 법률을 홍콩특별행정구에 실시할 수 있다.

기본법 23조

홍콩 특별행정구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배반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며 반동을 선동하고 중앙 인민정부를 전복하며 국가기밀을 절취하는 행위를 금지하여야 하며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홍콩특별행정구에서 정치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홍콩 특별행정구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금지하여야 한다.

기본법 158조

이 법의 해석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속한다. (중략) 만약 전국인민대표자외의 상무위원회의 해석하고 홍콩 특별행정구 법원이 같은 조항을 인용할 시 전국인민대표자외의 해석을 기준한다.(후략)

 

기본법 23조는 국가보안법 제정의 필요성을 당부한 일종의 의무조항이고, 18조는 이러한 국가적 중대사와 관련한 법률은 중국 전인대 상무위가 (홍콩의) 법률을 제정해 (홍콩에)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홍콩 행정부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중앙 인민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처지라 이리 될 경우 어떠한 거부할 권리를 법률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홍콩행정부는 반환 초기인 2003년 기본법 23조에 의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으나, 당시 5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이를 백지화 했던 전력이 있다. 당시만해도 후진타오 당서기가 홍콩 행정장관 둥젠화에게 ‘성찰하라.’고 일갈했고, 결과적으로 둥젠화는 이 일로 인해 사실상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하지만 기본법 23조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을 의무화 했기 때문에 홍콩 국가보안법은 행정장관이 바뀔때마다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항상 물어볼 수 밖에 없는 질문꺼리였고, 행정장관들은 그럴 때마다  ‘적절한 때’에 제정한다는 말로 에둘러 피하는게 홍콩 정치권에서는 일종의 관행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이때만해도 홍콩 입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즉 기본법 23조의 의무는 살아있지만 18조는 사문화된 상태였다.

2020년 코로나 팬더믹 와중에 기습 상정, 제정, 처리된 홍콩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된, 상징적인 조항이라고 믿어지던 기본법 18조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위와 관계 된다는 이유로 5월 20일 중국 전인대에서 제정한다고 알려졌고, 8일 후 홍콩 특별 행정구의 국가 안전을 수호하는 법률제도와 집행기제 수립 및 완비에 관한 전국인민대표회의의 결정 全国人民代表大会关于建立健全香港特别行政区维护国家安全的法律制度和执行机制的决定’이란 결정문이라는 이름으로 의결됐다. 형식적 표결에 붙여졌는데, 찬성 2878대 1, 기권은 6표가 나왔다. 즉 찬성율 99.76%.

곧이어 6월 20일 전인대 상무위가 법률의 초안을 발표했고, 열흘 뒤인 6월 30일 만장일치로 전인대 상무위를 통과, 다음날인 7월 1일 관보에 개제되며 효력이 개시됐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입법과정에서의 공개 토론이나 전문공개또한 이루어지지 않아 법이 통과되고 나서도 언론은 여기저기서 입수한 단편적인 정보에 따라 법의 얼개를 유추해 보도해야만 했다.

 

한편 기본법 158조는 기본법의 해석을 무기로 2020년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2020년 11월 12일 벌어진 야당의원 네 명에 대한 의원식 박탈이 그런 경우다. 이 사건은 의원직을 박탈당한 네명의 의원들이 외세와 결탁한 반역행위를 했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는데, 중국 전인대 상무위가 ‘홍콩 입법회 의원 자격 문제에 대한 결정’을 의결해 기본법안에  존재하는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는 경우에 대한 재해석을 했고, 여기에 근거해 해당 의원들의 의원직은 박탈됐다. 직능별 비례 대표에서 주로 선출되는 친중국계 의원들과 달리 민주계 의원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지역구와 같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즉 선출직을 그 직에서 해촉하는 경우에 해당되는데 대부분의 나라들에게 이 문제는 국민의 권능인 참정권과 직접 연계 되기 때문에 독립된 사법부를 통해 법률적 심판을 받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위의 의원들은 어떠한 사법적 판단도 받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중국 전인대 상무위의 결정에 따라 정부가 재판없이 반대파 의원의 의원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길이 ‘법에 의거해’열렸다는 점은 홍콩의 미래를 더 암울하게 만든다.  홍콩 야당의원들은 이에 반발해 전원 사퇴를 감행했고, 이 와중에 중국 전인대는 2021년 3월 ‘역시나’ 기본법 18조에 의거해 ‘홍콩 선거제도 완비에 관한 결의안’을 의결해 홍콩 행정부에 그들이 입맛대로 만든 새로운 선거법을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전달했다.

새로운 선거법은 의석이 기존 70석에서 90석으로 늘지만, 주민 투표에 의한 선출직 의원의 수는 기존 35명에서 20명으로 대폭 축소되고, 나머지 자리는 기존의 직능별 비례대표 30석, 새로 만들어진 선거위원회 선거구 40석으로 구성되며 모든 출마자는 정부로부터 출마자격 심사를 받고 이를 통과해야 한다. 사실상 민주파가 정치에 간여할 모든 길이 차단됐고. 이제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홍콩 시위와 국제연대

한때 동방의 진주라고 불리던, 무정형의 자유 도시는 이렇게 불이 꺼진채, 중국인들의 농담처럼 사실상 선전시 홍콩구로 전락하게 될 운명으로 보이고, 아마도 인류는 홍콩과 같은 도시를 만드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홍콩은 이렇게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걸까?

이제 홍콩에서 저항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항의는 사실 정치적 행위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홍콩 행정부는 시민들에 요구에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있는지조차 의심받고 있다. 결국 저항은 저항 그 자체로써만 남게 되었다.

이 운동은 그래서 끝난 것일까? 2019년 로이터의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9%가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줄기차게 시위대가 요구한 5대 요구중 하나인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4%가, 행정장관 캐리람이 사임하길 바란다는 의견은 57%를 기록했다.

설사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해도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벌어진 경찰 시위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음을 느낀다는 대답이다.

이 응답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접근하면 노인세대와 저학력층일수록 시위의 책임등에 있어 시위대편이라는 입장이 많았고, 젊은 세대로 가면 14%만, 3차 교육을 받은 사람은 24%만 시위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응답했다.

정치적 저항이 무의미해진 현재 홍콩은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상점을 이용하자는 옐로우 이코노믹 운동이 한창중이다. 2019년 그저 시위대에게 우호적인 식당에서 밥을 먹자는 데서 출발한 이 운동은 현재 운송업까지 확대되 What’sCap이라는 택시앱의 사용률이 우버의 70%에 육박한다는 이용실태가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옐로우 이코노믹 운동은 모든 정치적 저항이 금지된 지금의 홍콩에서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저항 방법인 셈이다.

한편, 홍콩 시위는 리더가 없는 분권적이고 수평적인, 그리고 텔레그램으로 대표되는 SNS시위의 모습을 전세계에서 각인시켰다. 홍콩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지역이 그 모든걸 내팽개친채 반년이상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 모든걸 디지털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전세계의 저항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기에 분명했다. 홍콩에서는 저항할 수 없지만, 그들이 2019년 거리를 누비며 학습했던 기록들은 누군가에 의해 차근차근 아카이빙 됐고 최근에 전세계를 대상으로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구글에서 HK19 Manual이라는 문장을 검색하면 공개된 구글 DOCS 문서에 접근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상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그룹이 2019년 당시 그들이 정부와 싸웠던 기록을 메뉴얼화한 문서로 홍콩에서는 이를 크라우드 소싱 시위 메뉴얼이라고 부른다.

그 문서의 ‘지도자가 없는 시위’ 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지도자와 함께하는 운동은 그가 체포되거나 사라졌을때 무력화 되거나 협상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리더가 없음을 명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1)정부의 공격지점을 제거하고 2)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싸울 수 있게 독려한다.’

이 문서엔 시위 조직, 이벤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하는 법, 개인신변 안전을 위한 지침, 현장 활동가와 온라인 활동가의 정보교환 및 협업방법부터 최루탄 끄는 법과 화염병 제작법까지 모든 정보가 망라되어 있다.

이 문서는 2021년 2월 미얀마 쿠데타가 발생하고 미얀마 시민들이 대정부 투쟁에 나서자 즉시 활동가들에 의해 미얀마어로 번역 배포되고 있다. 영어로 된 HK19 매뉴얼은 미안마어 외에 타이어와 힌디로도 번역되고 있으며 아마도 2019년 시위가 남긴 최후의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덩샤오핑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다 해도 ‘말들은 여전히 달리고, 주식은 여전히 타오르고, 댄서들은 여전히 춤을 출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약속을 구체화 했다.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의 약속은 모두 깨진것 같다. 시위기간 내내 경마장의 불빛은 꺼졌고, 항셍지수는 사상 최고치였던 2018년 1월 26일 33154에서 2020년 9월 25일 에는 23235로 무려 30%나 빠졌다. 홍콩 최고의 번화가인 란콰이펑에도 최루탄이 터졌으니 댄서들도 더이상 춤을 출리 없었다.

홍콩 행정부는 최근 교육개혁을 단행하며 아이들에게 애국교육을 강화하고 나섰다. 정규교육의 변화속에서 자라나는 세대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2019년 시위의 선두였던 현재의 20-30대는 전체 세대중 가장 반중국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죄로 사회에서 영원이 지워지는 말그대로 잃어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2021년 4월까지 10242명이 홍콩 민주화 시위로 체포됐고, 이중 600여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2521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다수는 청년세대들이라는 점은 전망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