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 정부의 정치적 조건
문재인 대통령은 소통방식과 인사에서 우선 이전의 두 정부와 차별화되는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적어도 장관 인사청문회 이전까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통령 임면권과 시행령 한도 내에서 풀어나갈 수 있는 국무총리 및 보훈처장 사표 수리, 국정교과서 폐지, 세월호 및 정윤회 사건 등에 대한 재수사 역시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적절한 정치적 행보다.
대외적으로 보면 가장 까다로운 과제인 ‘사드’ 문제 역시 생각보다 쉽게 풀릴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중이 강대강 대결보다는 상호 적극적인 견제 속에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트럼프는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을 대일무역 적자 문제를 이유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사드 역시 이러한 거대한 정책 속에 포함된 일부분이며, 트럼트가 직접 언급한 사드 비용분담 문제는 오히려 사드 배치에 대한 유연성을 제고하는데 이용될 수도 있다. 미중관계에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며, 오히려 두 나라의 관계보다는 북한이 중요한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새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헬조선 현상의 완화와 그 방향성을 전복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과제는 대통령의 통치력이 발휘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결 불가능하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실질적 고비는 허니문이 끝나는 정기국회에서 닥칠 것이다. 새 정부의 주요한 사회·경제 분야 정책 대부분이 입법 절차를 거쳐야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조국 민정수석을 통해 천명한 검찰 개혁의 핵심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과 같은 입법과제에서 현재의 여당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리고 헬조선 현상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야 할 경제와 노동, 복지 정책에서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온 것이 자유한국당의 계보 상에 있던 정당들이 보여준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가 주장하듯이 김영삼 정부 시절처럼 비밀리에 진행하는 정권 초기 ‘개혁’은 현재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한국정치의 제도적 수준과 언론 등 정치적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107석의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민주당(120), 국민의당(40), 바른정당(20), 정의당(6)을 모두 더해야 선진화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180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이들 정당 전체의 동의를 일일이 얻어 법안을 통과시키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 개별 입법마다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경제정책에서는 바른정당과 정의당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며, 안보정책에서는 바른정당이 다른 당들과 입장을 달리 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정기국회를 거치는 동안 정부의 개혁이 주춤하게 될 경우, 보수진영(정치권+언론+종교·시민사회)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정부와 여당의 지지도가 하락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여당을 중심으로 한 구심력이 약화되고 자유한국당을 위시한 보수세력의 원심력이 강화된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포지션 변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2) 적폐청산을 위한 통합정치
이러한 상황에서는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상의 연정이 요구된다. 우선 현재 우리 국회법이 사실상 과반이 아닌 3/5의 super majority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황이라고 해도 국회 내에서 안정적인 연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번 대선의 결과에서도 현 대통령이 과반득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연정이 필요하다. 여당이 단독으로 입법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요한 정책과제의 실행 여부는 대통령의 국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에 달려있다. 대선에서 현 대통령은 홍준표 후보의 24%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76%)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80%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겨우 60%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다. 셋째, 의석수나 지지율의 차원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연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폐정산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에 대처하는 가운데 - 예를 들어 검찰개혁 등 - 다수파 전략을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렇다면 통합의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연정을 선언하고 국정을 함께 이끌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자생적 경제발전의 동력이 상실되어가는 비상한 국가적 상황임을 국민들에게 드러내고, 그것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다수파 연합이 공동으로 국정을 책임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국민과 정치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대통령은 이미 선거 개표 당일 ‘문재인 (캠프의)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민주당 정부만으로 새 정부의 공약실천이나 정치개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승민, 심상정 등 야권의 개별 정치인들에게 입각을 타진하는 모양새는, 오히려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통합을 모색하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는 반작용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혹시나 모를 일부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 의원들의 민주당 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대당 차원, 정부와 국회차원에서 주요한 국정 아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실상의 공동정부(연정)를 구성하는 것을 제안하고, 협상을 통해 구체화시켜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장관 임명 등의 행정부 구성에서 이러한 절차가 곧바로 가동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대통령제 하에서의 연정이 반드시 내각제에서처럼 장관직의 개방이 전제조건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다 넓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각각의 아젠다에서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 야당들이 참여하는 넓은 차원의 ‘당정협의(또는 합의)기구’, 혹은 정부와 국회의 정당들이 모두 참여하는 ‘국정과제협의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논의(또는 합의)를 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가 정기국회 이전에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치적 기반이다.
새로운 정부는 적폐의 청산과 국민 통합이라는 모순적 목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두 목표는 모순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후자는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문재인과 민주당만으로는 40% 이상의 득표나 지지를 획득할 수 없으며, 이들이 고립될 경우 전국단위 선거가 아닌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오히려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과 민주당이 현재의 다당제 하에서 소수파 승리 전략에 안주하게 되면, 이 같은 예측은 사실이 될 것이다.
3) 참여정부를 딛고, 멀리 보기
새 정부가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새 정부의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비서실장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청와대나 여당의 주요 인사들 대부분도 참여정부의 공과를 모두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대통령 이하 이들 모두는 참여정부의 과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역시 공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정부였다. 임기 동안 탄핵 도중에 치러한 총선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의 선거에서도 이기지 못했고, 임기가 끝나는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청와대와 국회를 모두 장악했다는 총선의 결과에 대한 환상은 기실 거대한 정치적 재앙이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달리, 결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은 정부와 여당이 오만하다고 평가했고, 선거에서 연전연패하는 정부와 여당이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거의 없었다. 당시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는 말할 수 없이 저열한 것이었지만, 국민들은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집권세력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보았다. 노대통령은 마침내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박근혜 당시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노무현 정부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사학법이다.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던 2005년 겨울 박근혜 대표는 57일간 국회를 보이콧 하고 장외투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보수정당-보수언론-보수종교계-보수학계’가 똘똘 뭉쳤다. 엄청난 정치적 갈등을 딛고 겨우 통과된 사학법이 허무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7년 재개정). 아무리 좋은 정책을 아무리 어렵게 시행하더라도, 선거의 결과로 그 모든 것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비단 사학법 뿐 아니라 참여정부에서 기초를 닦은 대부분의 정책들은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국회에서 휴지조각처럼 사라졌다.
가장 성공한 정부는 가장 많은 정책을 성공시킨 정부가 아니라, 적은 정책을 통해서라도 국민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서, 그 정책이 차기 정부에서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정부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정부가 정책적 성공의 범위를 정권 이내로 제한하지 않고, 장기적인 정치적 비전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기본적 속성을 따르는 것이다.
적지 않은 진보 지식인이나 언론이 ‘선거에서는 득표를 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했지만, 당선된 후에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고 대통령을 응원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사이다 정치’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에서 대통령의 득표율과 현재 국회의 의석 분포에 따르면 그러한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정치를 시도할 수도 있으며, 당장 일부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정책의 지속 가능성, 곧 정권 재창출의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보수를 적으로 치부하고, 대화와 타협을 지양하고 대결해서 승리하고자 하는 일부 민주화 세대의 정치에 대한 몰이해가 실은 민주화 이후 정치적 지체를 가져 온 중요한 요소였다. 보수는 ‘궤멸시키겠다는 의지’에 의해 궤멸되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보수를 더욱 결집시키고 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정치문화 수준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의 수정이 필요하다. 현대의 대표제 정치는 선거경쟁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고 집권하는 것이 목적이지 상대 세력을 궤멸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새로운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참여정부를 딛고, 멀리 보는 것이다. 산업화/민주화, 민주/반민주의 구도를 벗어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을 ‘정치적 수단’을 통해 최대한 가능하게 만드는 ‘기예’를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새 정부에게도 좋고, 국민에게도 좋으며, 그 다음 정부에게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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