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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와신상담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08-27 10:20:23
  • 조회수 : 1634

[경향신문 정동칼럼] 8월의 와신상담(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장, 조합원)

광복절을 며칠 앞둔 늦은 오후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들렀다. 때가 때인지라 혹시나 놓치기 아까운 광경이 벌어질까 하는 마음에 폭염에도 불구하고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섰지만 석양에 아름다운 신사는 고요했고 바로 옆 황국사관으로 점철된 박물관으로 악명 높은 유슈칸(遊就館)도 인적이 드물었다. 우익의 확성기도, 혐한(嫌韓)의 자국도 없었다. 언론과 방송에 한국 관련 이슈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한국의 촉각은 온통 일본에 가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 각료 몇 명이나 참배하는지, 아베 신조 총리는 어떤 발언을 하는지, 일본의 양심세력의 동향은 어떠한지, 군국주의 일본이 부활하는 것인지, 일본의 우경화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러 분석이 오가고 아베와 일본정부 때리기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을 신경 쓰고 있다. 아베 총리가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 시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못 해 “통한”이라 술회하면서도 또다시 참배를 단념한 까닭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일 간 갈등의 고조가 부담스러운 데 있다. 중국은 각료 2명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항의표시로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를 소환하는 등 강공드라이브다. 아베 총리는 대중 견제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11년 만에 방위예산 증액을 선언하면서 해양권익을 수호하려 애쓰고 있으나 해양세력으로의 변모를 선언한 중국의 급속한 해·공군력 증강 앞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은 1990년부터 매년 국방예산을 두자릿수로 증액하면서 이제 세계 제2의 군사대국이 됐고 그 규모는 일본 방위비의 2.5배이다. 센카쿠 해역에서 젊은 중국의 끊임없는 도전에 시달리는 노쇠한 일본은 사실상 미국과의 군사동맹으로 버티고 있다.

우익이념으로 무장한 아베가 중국에 대해 실용주의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결국 힘의 격차 때문이다. 또한 위안부의 강제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노담화의 수정을 공언했던 아베가 고노담화 계승을 억지로 선언한 까닭은 결정적으로 동맹국 미국의 비판이었다. 일본은 국제정치가 도덕이나 가치가 아닌 무력과 금력으로 움직인다고 보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근대의 우등생이다. 한국을 내려다보고 중국과 미국을 어려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경제적으로 자국의 6분의 1인 한국이 식민지와 침략전쟁의 과거를 미화하는 데 반발하고 인류보편의 도덕심에 호소해도 그들의 마음과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 비분강개에 그쳐서는 안된다.

유슈칸이 전시해 놓은 일본 근대의 길 가운데 눈에 크게 띄는 현판은 ‘와신상담’이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서 청(淸)국과 영향력 경쟁을 벌이다 임오군란에서 크게 밀리면서 “군비증강 8개년 계획”을 세운다. 장래 청과의 결전에 대비해 해군력을 증강하고 육군병력을 배증하는 계획에 엄청난 예산을 투여했다. 그 결과 10년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서 청을 몰아내고 대만과 팽호제도의 식민지화,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조선도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된다.

와신상담은 이때 등장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러시아의 개입에 공분하며 향후 고난을 감수하면서 굴욕을 되갚겠다는 결의를 표상하는 언어로 삼았다. “전후 십년 계획”은 1905년을 겨냥해 육·해군을 증강하고 기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과중한 세부담을 견뎌내자는 정책 합의였다. 10년 계획의 실천과 함께 외교력을 집중해 세계 최강 영국과 동맹을 맺는 쾌거를 이룬 결과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일본의 정치인들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달라”고 비교적 절제된 경고를 보냈지만 우리 정치인들은 NLL과 국정원 조사로 분열과 소모전이 몇달째이니 일본이 과연 귀담아들을까. 해마다 8월이면 터뜨리는 반일(反日)의 통분(痛憤)을 넘어서 우리 정치인들이 한국판 와신상담, “극일(克日)십년계획”을 내놓아야 비로소 일본이 한국을 다시 볼 것이다.

입력 : 2013-08-22 21:33:32수정 : 2013-08-22 22:4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