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소개ABOUT IGG

언론보도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연구원의 소개입니다.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의 현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0-10 13:43:29
  • 조회수 : 1658

경향신문 [정동칼럼] 손열(연세대 국제대학원장)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중국, 베트남과의 정상회담에서 예외 없이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을 소개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되고 있지만 정치·군사적 갈등이 여전해 신뢰부족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연성 이슈를 중심으로 신뢰의 인프라를 구축해 안보와 같은 경성 이슈에서도 높은 수준의 협력을 이끌어낸다는 논리에 기반을 둔 구상이다.

아시아 지역에는 여러 다자협력체들이 존재한다. 동남아국가들을 엮는 아세안, 아세안+3(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아시아지역포럼(ARF),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동북아 3국을 엮는 한·중·일 협력체 등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지 않고 가입국들도 상당수 중복되는 협력체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강대국 간 세력 각축에 있다. 미국, 중국, 일본이 지역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협력체를 주창한 결과 난립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같이 패권적 야망이 없는 중견국(middle power)이 좀 더 높은 수준의 다자협력을 위해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여지는 충분하다.

 문제는 새 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의 구체안이 나오지 않는 데 있다. 그렇다고 서둘러 설익은 제안을 내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2009년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는 아시아·태평양이란 광범한 영역을 단위로 유럽연합 수준의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지향하는 비현실적인 공동체 구상을 내놓았고 관련국들의 무관심 속에 결국 접어야 했다.

같은 시기 보다 주목을 받은 제안은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었다. 그는 일본이 과거사 반성을 통해 인접국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공동체 추진의 주역이 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우애(fraternity) 사상에 기초한 공동체를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개인 간 관계원리인 우애가 어떻게 국가 간 관계원리로 발전할 수 있는지, 어떻게 국가 간 우애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해내지 못함으로써 이상주의에 치우친 구상이란 비판을 받았다. 나아가, 동아시아공동체는 어떤 조직형태를 띨 것인지, 새로운 협력체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협력체를 통해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 방안을 내지 못했다. 미국의 포함 여부를 놓고 오락가락하면서 이 제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토야마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하토야마의 우애외교가 이상에 치우쳤듯이 신뢰외교도 동북아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현실적 접근법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국제정치에서 신뢰는 안보 딜레마 상황, 즉 자국의 안보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자조노력이 타국에 그 의도가 방어용인지 공격용인지 의심과 불안을 증대시켜 의도치 않게 경쟁적 군비증강을 가져오는 상황처럼, 불신상태의 국가들이 협력해 윈-윈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기제이다. 동북아의 불안정한 안보상황은 남북관계나 중·일관계처럼 양국 간 세력배분의 변화로부터 야기되는 불신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토문제나 역사문제처럼 서로 신뢰를 회복한다 해도 여전히 서로 다른 이익을 절충하는 외교로 풀어야 할 영역이 엄존한다. 따라서 동북아 신뢰외교는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략이 아니므로 서울프로세스와 같은 언어로 과대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이유로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이 이미 존재하는 역내 협력체들을 대체하거나 혹은 또 하나의 협력체를 지향한다면 실패의 길을 걸을 것이다. 정상회의 정례화나 사무국 설치 등 관료적 발상을 접고, 박근혜 정부가 주도할 만한 신뢰구축의 이슈 영역들을 조심스럽게 선정해 임시적이고 비공식적인 협의 틀을 추구하면서 기존 협력체를 활용하는 편이 현명하다.

끝으로 신뢰구축의 영역을 중심으로 협력을 구상한다면 지역공간을 좀 더 신축적이고 네트워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의 조건인 주변 4강의 협력이지만 이들이 협력의 습관을 쌓는 공간은 가변적이고 보다 넓다. 지리적 개념, 고정된 구성원으로서 동북아에 집착하지 않고 사안에 따라 신뢰구축을 중시하는 아세안국가 등과 연계하는 네트워크 발상이 요구된다.

경향신문 입력 : 2013-09-26 21:25:51ㅣ수정 : 2013-09-26 21:2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