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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안정이 혁신의 토대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8-16 14:26:58
  • 조회수 : 1349

경향신문 오피니언[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예전 군대에서는 황당한 일이 많았다. 필자는 포병이었는데, 여러 가지 암기할 내용이 꽤 있었다.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병사들은 상관에게 두들겨 맞았다. 나는 구타의 암기력 향상 효과에 회의적이었으나, 실제로 두들겨 맞고 나서 좀 더 잘 외우는 부대원들이 있었다. 이게 바로 죽어라 열심히 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 소위 ‘하면 된다’는 군대식 발상의 근거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는 개발연대에 초고속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루어냈다. 성과에 대한 과도한 압박과 장시간 노동이 만연해 있는 우리나라 기업문화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상관의 요구가 단순한 내용을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미분방정식을 푸는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무서운 형벌로 압박한다고 해낼 수 있을까? ‘하면 된다’ 정신은 저급한 일에 통하는 것이지 고급노동, 창의와 혁신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창의와 혁신은 대체로 여유롭게 즐길 때 나온다. 새로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유로움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선진지식을 습득하고 선진기술을 모방하며 성장하던 ‘따라잡기 성장’ 시대의 유산인 압박과 장시간 노동은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와 함께 혁신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시간 학습,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제와 시험 그리고 입시경쟁으로 인한 고강도 압박이 우리 교육의 특징이다. 그 결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국제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새로운 지식과 혁신적 기술을 생산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노벨과학상 수상이 전무하고, 기술수입액이 기술수출액의 두 배가 넘는다.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하면 깊이 있는 탐구와 창의적인 사고가 억압되며, 장시간 반복적 학습을 하다 보면 학문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공자는 즐기는 자가 최고라고 했지만 즐기지 못하는 자는 최고가 될 수 없다.


핀란드는 학업성취도가 최고 수준이면서도 학습시간이 매우 짧고 과제와 시험의 압박이 거의 없다. 마이클 무어의 영상으로도 소개된 것처럼 핀란드의 학교는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일주일 수업시간이 겨우 20시간이다. 수업을 그렇게 조금 하면 학생들이 언제 배우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뇌가 휴식하지 못하고 계속 일하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배우냐”고 되묻는다. 지식을 욱여넣는 공부와 달리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르는 참된 배움은 여유로움과 자유로움 가운데 즐길 때 얻어지는 것이다. 핀란드의 학교는 또한 과제가 거의 없고 표준화된 시험이 전혀 없다. 핀란드에서 학교는 공부를 강요하고 압박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행복을 찾는 곳이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독일이나 네덜란드에 비해 연간 700시간 이상을 더 일한다. 예로부터 내려온 군대식 문화에다가 외환위기 이후 유행하는 성과급제도로 성과에 대한 압박도 유별나다. 하지만 시간당 생산성은 독일, 네덜란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최근 하루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집중력과 생산성이 크게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압박으로 성과를 올린다는 건 단순노동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올봄 맥킨지는 기업들이 직원의 업무성과를 평가해 보수와 승진 등을 결정하는 성과평가제가 “시간만 잡아먹고,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동기를 부여하기보다는 동기를 잃게 하고, 궁극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더욱 깊은 전문가적 지식, 더욱 독립적인 판단, 더 나은 문제해결 기술”을 요구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평가제의 부작용이 갈수록 두드러진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미국 사회학 리뷰’(ASR)에 과학연구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수백만건의 과학논문을 ‘전통적 연구’와 ‘혁신적 연구’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전자는 가치는 떨어지지만 실적 생산에 유리하고 후자는 가치가 높지만 실적 생산에는 불리하다는 점, 그 결과 과학자들이 경력관리를 위해 전통적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논문은 혁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직업안정성과 실적생산성의 연계를 풀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압박이 혁신의 적이라는 것은 많은 경제학 논문에서도 확인된다. 해고를 어렵게 하여 고용안정을 강화하면 혁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단기실적 여부에 따라 해고될 가능성이 클 경우 노동자들은 실패 가능성이 높은 혁신적인 방법을 시도하기보다는 안정적으로 작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존 방법을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혁신을 추구하는 모험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고용안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를 쥐어짜서 성장하는 시대는 벌써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도 노동시간 단축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재계의 요구에 굴복했는지, 공약은 흐지부지되었다. 경제수장이 안 그래도 장시간 연장근로가 일상화된 은행들의 업무시간 연장을 주문하기도 했다. 게다가 정부·여당은 노동자를 더욱 압박하는 내용들을 담은 소위 ‘노동개혁 4법’을 밀어붙이고 있으며, 저성과자 퇴출을 장려하고 성과연봉제를 강권하고 있다.


혁신주도 성장은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요구한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영웅 중 한 명이었던 설기현 선수는 성균관대 축구 감독으로 부임한 후 단 3가지 규칙만을 내세웠다고 한다. 단체훈련 1시간10분 이내로 제한, 주말은 무조건 휴식, 아침식사는 자율. 개인마다 필요와 특성에 따라 자율훈련과 컨디션 조절을 하도록 하며, 충분한 휴식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강훈련을 해야 할 선수들에게 쉬어가면서 제멋대로 훈련하라고 하다니. 하지만 놀랍게도 성균관대 축구팀의 성적은 수직상승했다.


장시간 노동과 성과에 대한 압박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은 수면이 부족하고,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부족하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우리의 삶의 질을 파괴하는 이 못된 습성은 행복의 적일 뿐만 아니라 혁신의 적이기도 하다.


이제 정말 변해야 한다. 구체적 방안은 다 나와 있다. 재계와 정책당국의 의식부터 변해야 한다. 쉬운 해고와 성과연봉제로 노동자를 압박하며 장시간 노동을 쥐어짜는 방식을 고집하는 한 혁신주도 성장은 요원하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입력 : 2016.08.11 21:11:00 수정 : 2016.08.11 21:13:4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12111005&code=9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