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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대한민국 경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2-04 10:32:40
  • 조회수 : 1842
한겨레신문[세상 읽기] 어제 오전에 황당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사용 안 하는 은행계좌 임대해주시면 매일매일 14만원 지급. 월420”이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무시하고 넘어갈까 생각했지만 공익을 위해 작은 희생을 감수하기로 하고 112에 전화를 했다.

“필시 보이스피싱 범죄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발신 전화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범죄예방 조치를 취해주시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고하는 건가요?”

“(엥? 무슨 소리지? 나 자신을 신고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을 신고하냐고 물어보는 건가?) 네? 범죄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여서 신고하는 건데요. 범죄에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알려드릴 테니 메모 좀 할 수 있습니까?”

“경찰관 출동시킬 테니 출동 경찰관에게 신고하세요.”

“네? 전화번호 적으라는데 무슨 경찰 출동입니까?”

“아, 경찰관 안 보내도 되나요? 그럼 선생님께서 원하는 신고 받아주는 담당자에게 전화연결 해드릴 테니 그쪽에 얘기하세요.”

“헐. 그냥 전화번호 받아 적고 사이버수사대나 적절한 담당부서에 연락하여 조치해주면 안 될까요?”

“담당부서 연결해드릴 테니 그쪽에 말하세요. 만약 연결 끊어지면 국번 없이 182로 하시면 됩니다.”

나는 황당했지만 112는 아마 경찰관 출동을 요하는 현행범 신고만 접수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182 연결을 기다렸다. 나는 다시 신고하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했고,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번호를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번호를 전달해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인터넷진흥원 번호 알려줄 테니 거기에 신고하라고 한다.

“아니, 112에 신고했더니 담당부서 연결해준다고 하면서 182로 연결해준 건데, 전화연결 잘못된 건가요?

“아니, 전화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진흥원에 신고하세요.”

“182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경찰 민원 상담인데요.”

“그럼 범죄에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하나 불러드릴 테니 그거 메모해서 관련부서에 전달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인터넷진흥원에…”

“아니, 나는 내 시간 들여서 공익을 위해 신고하겠다는데 범죄예방이라면 귀가 번쩍 뜨여야 할 당신들은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하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까?”

좌절감을 안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경찰이 이렇게 관료주의에 빠져서 형식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꼴에 몹시 화가 치밀었다. 나는 평소에 일선의 경찰관들이 대부분 격무에 시달리며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경찰공무원들의 증원과 처우개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어제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경제가 많이 성장했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소득수준에 비해 삶의 질이 형편없고, 사회적 신뢰와 갈등조정 역량이 바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것과 더불어 공공부문의 신뢰도를 증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공적 권위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때 공적 가치를 위한 시민참여도 더욱 활성화되고 사회관계의 질은 높아진다.

원래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교황의 말씀에 관해서 이 칼럼을 쓸 계획이었다. 교황의 권고문은 가히 혁명적이고 현대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여기에 내가 몇 마디 보탠다고 세상이 별로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반면에 작은 일이지만 일부 경찰의 근무행태를 고발하면 약간의 변화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면이 낭비되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한겨레신문 등록 : 2013.12.02 19:02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