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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쏙] 한달 앞 다가온 ‘도로명 주소 일원화’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2-02 09:55:28
  • 조회수 : 2196

한달 뒤면 한겨레신문사의 공식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116-25에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으로 바뀐다. 새해부터 동네 이름과 지번이 아니라 길 이름과 건물 번호를 쓰는 도로명 주소가 법정 주소가 된다. 정부는 ‘길 찾기 쉬워진다’고 하지만, 옛 지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다. 한겨레신문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종로구 자하문로35길, 필운대로5나길…. 어딘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경복궁 서쪽 서촌에서 만난 김한울 서촌도시공간연구회 사무국장은 “도로명 주소는 (도로가 격자로 이뤄진) 서울 강남 같은 곳에서나 편한 주소”라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시작해 세검정삼거리까지 3.2㎞에 이르는 자하문로 양쪽에는 내자·통의·체부·통인·창성·효자·옥인·신교·청운·궁정·부암·신영·홍지동까지 모두 13개의 법정동이 있다. 하지만 한달 뒤인 새해부터 지번이 아닌 도로명을 쓰는 새 주소체계가 도입되면 13개 동의 이름은 공식 주소에서 사라진다. 이 지역이 모두 자하문로에서 동서 양쪽으로 뻗어나간 45개 길의 번호로 매겨지기 때문이다. 누하동·누상동·옥인동이 있는, 자하문로에서 서쪽 인왕산 자락으로 더 들어간 지역도 인근 필운대로 이름을 따 번호로 불린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 예로부터 ‘서촌’으로 불리는 이 일대 법정동 주소는 내년부터 옥인길, 자하문로, 필운대로라는 길 3개의 이름과 번호로 바뀐다. 정부가 ‘길 찾기가 쉽다’는 도로명 주소만을 법적으로 유일한 주소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종로구에선 72개 동 이름 가운데 59개(82%)가 없어진다. 김 사무국장은 “도로명 주소는 옛 도심처럼 역사문화적 요소를 반영해야 하는 곳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로명 주소체계는 구획된 땅마다 고유번호를 매겼던 기존 지번 주소와 달리,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도로에 접한 건물에다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도로는 폭·길이에 따라 ‘대로’, ‘로’, ‘길’로 구분하고 서에서 동쪽, 남에서 북쪽의 차례로 왼쪽 건물은 홀수, 오른쪽 건물은 짝수를 붙인다.

내년 1월1일부터 주민등록 주소를 포함한 각종 공적 장부에 적힌 지번 주소는 해당 기관에서 새 주소로 변경한다.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은 그대로 쓰다가 분실 등으로 갱신할 때 주소를 바꾸면 된다. 우편물도 지금의 지번 주소를 쓰더라도 우체국에서 알아서 도로명 주소로 바꿔 배달한다. 단, 도로명 주소는 건물의 주소이므로 땅의 주소는 기존 지번 주소를 쓴다. 부동산 거래 계약서에 땅 주소는 지번으로, 건물이나 사람의 주소는 도로명으로 써야 한다.

정부는 길 찾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홍보한다. 주소 활용이 잦은 이들은 도로명 주소를 선호하기도 한다. 통의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이종수(59)씨는 “이 동네는 작은 골목이 많고 번지수 정리가 잘 안 돼 있어 뒤죽박죽이다. 처음 부동산 일 하면서 집 찾는 데 애먹었다.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면 일하기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면 시행을 코앞에 두고 이곳저곳에서 반발과 우려가 나온다. 서촌처럼 역사가 오랜 지역은 반발이 심하다.

서촌에 한옥을 짓고 살면서 세계 주요 도시의 골목길을 연구한 미국인 로버트 파우저(52) 서울대 교수(국어교육)는 외국 사례를 들어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를 함께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달 뒤 도로명 주소 체계가 전면 시행되면 서울 종로구 체부동같이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땅 이름을 주소에서 쓸 수 없게 돼, 역사가 오래된 지역 주민의 반발이 크다. 사진은 11월29일 종로구 경복궁 서쪽 동네인 서촌 일대. 멀리 북악산 기슭에 청와대가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병용론 주장 왜
옛 도심은 지번 자체가 역사
도로 중심 서구문화와 달라
도로 주소 사용률도 16%뿐
“정부 일방통행식 행정 안돼”

주소개편의 역사
YS정부때 국정과제로 채택
참여정부 강제전환 법 제정
사용 저조하자 시행 2년늦춰

일원화 찬성쪽은
“역사성 반영해서 이름지어”
“혼란불구 정착되면 편할것”

“일본은 지역마다 공식 주소체계가 다른데다 지역에 따라 두 가지 주소체계를 병용합니다. 794년부터 1868년까지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경우 지번 주소가 공식 주소이지만 교토 도심에 사는 주민들은 두 길의 교차점을 표기하는 전통적인 ‘바둑판식’ 주소를 더 선호해요.” 교토의 옛 도심은 바둑판처럼 설계돼 있다. 교토 도심의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써왔던 두 길의 교차점을 표기한 주소가 더 익숙하다. 반면 메이지유신 이후 개발됐지만 격자로 구획돼 있지 않은, 교토 외곽 새시가지 사람들은 당시 도입한 지번 주소체계를 더 편하게 느낀다. 일본 정부는 두 주소체계를 모두 인정한다.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같은 유럽 일부 나라도 옛 주소와 새 주소를 병용한다. 파우저 교수는 “지번 주소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도입된 탓에 일제의 잔재라는 얘기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동의 이름이다. 체부동 같은 이름은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뭐가 전통인지 꼼꼼히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1월20일 인간도시컨센서스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가 함께 연 ‘도로명 주소체계의 문제점과 개선과제’라는 토론회에선 파우저 교수 말고도 우려가 쏟아졌다.

발제에 나선 최인욱 좋은예산센터 사무국장은 “국민들이 부정적이고 준비도 덜 됐는데도 도로명 주소를 시행하고 불편을 감수하라는 정부 태도는 민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로명 주소의 장점 발휘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정부는 도로명 주소 시행을 1970년대부터 추진해왔고 1995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정부는 1999~2003년 135개 도시에서 도로명 주소 시범사업을 벌였고, 2006년 주소체계를 강제로 전환하는 법이 제정됐다. 법은 2011년 한 해 동안 기존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를 병행 사용한 뒤 2012년 1월1일부터 도로명 주소를 유일한 법적 주소로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도로명 주소 통합센터를 세우고 2010년 10월 도로명판 설치도 마무리했지만 주소체계 변경에 대한 인식이나 사회적 논의, 합의 과정이 부족했다. 결국 전면 시행 시기를 2014년 1월로 2년 늦췄지만 도로명 주소 사용은 여전히 저조하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진선미 의원(민주당)이 우정사업본부로부터 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올해 들어 7월 말까지 우편물 4억7262만건 중 도로명 주소를 적었거나 도로명 주소와 지번 주소를 병행 표기한 우편물은 16.19%인 7652만건에 그쳤다.

도로명 주소를 주로 써온 서구의 공간문화와 우리의 공간문화가 달라 정부가 애를 써도 도로명 주소에 대한 공감대가 쉬이 퍼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학)는 “도로를 중심으로 살아온 서구의 공간적인 삶의 역사와 생활방식에는 도로명 주소가 부합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주로 평지에 있는 유럽의 주요 도시에선 도로를 따라 건물이 들어서고 건물 앞 출입문이 도로를 향해 나와 있어, 건물과 도로가 서로 소통하는 방식의 공간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져왔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조선시대 한양은 물길 등 자연지세를 따라 집이 들어서고 집터를 잇는 길들이 생겨나면서 도시 전체가 복잡한 골목길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의 골목길은 서구의 도로와는 다른 공간”이라고 말했다.

도로명 주소 사업을 담당하는 안전행정부는 역사적 지명 손실에 대한 우려가 이미 반영됐다고 설명한다. 배진환 안전행정부 지방세제정책관은 “도로명을 부여할 때 해당 도로 구간의 역사적 유적, 인물, 지방 연혁 등과 공공시설 또는 주요 시설명을 우선적으로 반영하려 했다. 그럼에도 역사문화적 요소가 반영돼 있지 않다면 해당 지자체 주민들이 참여하는 도로명주소위원회를 통해 동 이름 등을 반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로명 주소로 일원화하는 데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김한울 사무국장은 “땅 이름은 그것 자체로 역사다. 땅의 이름을 바꾼 것은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주소체계 변경을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무리하게 시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지금 단계에선 사회적 공감대가 부족하므로 당분간 도로명 주소와 지번 주소를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등록 : 2013.12.01 20:20수정 : 2013.12.01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