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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324호_임을출_미국의 대북정책 실종? 문제점, 원인, 그리고 대안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1-26 13:38:45
  • 조회수 : 382

현안과 정책 제 324호


미국의 대북정책 실종? 문제점, 원인, 그리고 대안

 

​글 / 임을출 (경남대학교교수) 



요 약 문

 

북미관계의 교착 상태가 길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가까운 시일 내 극적 반전이 일어날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는 원인으로 우선 상호간 신뢰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측은 기본적으로 정상회담 등 북미 대화가 미국 국내정치에 악용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북미관계의 주요 전환점마다 국내정치적 요인, 특히 미국내 보수세력과 이와 연계된 극심한 관료정치, 그리고 의회의 태도와 요구가 북미간 합의 이행을 사실상 방해했다. 북한은 미국내 이같은 정치구조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최소한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했다. 이에 반해 북한은 대미 정책과 관련해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를 더는 믿지 못하면서 사실상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재개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현단계에서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일지라도 북미가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합의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 북미간 대화재개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신뢰를 쌓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북미관계의 교착 상태가 길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가까운 시일 내 극적 반전이 일어날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2019년 2월 말 하노이 정상회담이 사실상 결렬로 끝나자 이상기류에 휩싸였으며, 그해 6월 말 극적인 판문점 정상 회동으로 신뢰 복원의 기대가 일었으나 3개월여 만에 열린 스톡홀름 실무협상마저 결렬로 끝나면서 이제는 대화재개의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2019년 연말까지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촉구했으나 미국이 응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 재개를 포기한 상태이고,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주지 않는 한 미국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실종상태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 고에서는 북미간 교착상태의 문제점을 살펴본 뒤 교착상태, 즉 비핵화문제를 풀지 못하는 원인을 분석할 것이다. 그런 뒤 북미 교착의 최대 원인인 북한 핵문제 타결을 위한 최선의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무엇이 문제인가

“북미간의 교착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어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세기를 이어온 조미 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되어 명백한 대결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규정했다. 나아가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가 철회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국가안전을 위한 필수적이고 선결적인 전략 또는 전술무기개발을 중단 없이 계속 줄기차게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는 문제점으로 우선 상호간 신뢰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신뢰구축을 위해 나름대로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미국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김 위원장은 전원회의에서 “우리가 조미 사이의 신뢰구축을 위하여 핵 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케트(ICBM) 시험발사를 중지하고 핵 시험장을 폐기하는 선제적인 중대조치들을 취한 지난 2년 사이”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약속한 연합군사연습을 수십 차례 벌이고 단독제재를 십여 차례 단행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북한측은 기본적으로 정상회담 등 북미 대화가 미국 국내정치에 악용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7.4)담화, 김여정 제1부부장 담화(7.10) 등을 통해서 재확인되고 있다. 최 부상은 담화에서 한국과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10월 북미 회담' 가능성을 일축했다. 최 부상은 "지금과 같은 예민한 때에 북미관계 현 실태를 무시한 정상회담설이 여론화되고 있는 데 대해 아연함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과는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고 거절 의사를 명확히 했다. 최 부상은 "북미 대화를 저들의 정치적 위기를 다뤄나가기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미국과는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면서 "그 누구의 국내 정치 일정과 같은 외부적 변수에 따라 우리 국가의 정책이 조절 변경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말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것처럼 대미 관계는 장기적인 전략 아래에서 관리해 나가겠다는 의도를 재확인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북미간 비핵화 협상을 둘러싼 기싸움이 한창 진행중이던 2018년 10월 29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신뢰 없이는 우리 국가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비핵화를 실현하는 우리 공화국 의지는 확고부동하지만, 이것은 미국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게 할 때만 실현 가능하다." 특히 리 외무상은 미국내 보수세력들을 콕 찍어 이런 메시지들을 던졌다. “미국의 정치적 반대파들은 순수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우리 공화국을 믿을 수 없다는 험담을 일삼고 있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들고나갈 것을 행정부에 강박하여 대화와 협상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 있다.”

왜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내 특정 보수세력들을 겨냥해 작심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일까. 현재 트럼프 대통령과 보수세력과의 관계는 이전 클린턴 대통령(2001.1.20.-2008.1.20)과 보수세력과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들과 행정부 국방안보부서, 보수적 사회세력들이 제휴해 대북정책을 놓고 민주당 정권을 향해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워싱턴 정치권 내부의 집단이기주의와 권력투쟁이 정책의 신뢰성과 정합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강온파 논쟁에 대북정책을 맡겨놓는 바람에 대북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도의 차이일뿐 오바마 행정부(2009.1.20.-1017.1.20.)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국익보다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내부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듯하다. 북미관계의 주요 전환점마다 국내정치적 요인, 특히 미국내 보수세력과 이와 연계된 극심한 관료정치, 그리고 의회의 태도와 요구가 북미간 합의 이행을 사실상 방해했다. 북한은 미국내 이같은 정치구조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반복적 경험의 산물이다.

북한은 트럼트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비핵화와 낮은 단계의 제재완화의 맞교환을 추구해 왔다. 북한측 태도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 관련 방침 변화가 없는 한,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에 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미국 대선이 임박한 상황이라 당분간 변곡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분명한 것은 미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트럼프와 어떤 합의에 이른다 해도 그가 낙선할 경우 그 합의는 공수표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과거 역대 미국 정부와 이런저런 합의를 했지만 정권이 바뀌면 백지화되는 일이 잦았고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 자체가 약속을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례가 적지 않다.

 

결국 북미관계가 이처럼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지경에 이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미국측 요인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최소한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했다. 북한은 미국을 더는 믿지 못하면서 사실상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재개에 대한 의지를 접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2019년 2월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을 경험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은 더는 신뢰할 수 없는 미국과의 평화공존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앞에서는 우리의 선의의 조치들에 박수를 치고 뒤에 돌아가서는 압박의 몽둥이를 계속 휘두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가 두 얼굴 중에 어느 얼굴과 대상해야 좋겠는가." 2018년 10월 20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북측 개인필명의 논평은 북한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준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경우 핵과 미사일 실험 중단과 생산시설의 폐기뿐 아니라 현재 보유중인 핵무기와 핵물질 모두를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제재 유지입장을 여전히 고수한 채 북한의 추가 양보만을 촉구하는 미국측을 신뢰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일단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결렬 이후 연 기자회견에서 “기본적으로 그들(북한측)은 전반적인 제재 해제를 원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노딜’ 이유를 설명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영변 핵시설 외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다”면서 “미사일도 빠져 있고, 핵탄두 무기 체계가 빠져 있어서 우리가 합의를 못 했다. 목록 작성과 신고, 이런 것들을 합의하지 못 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북한측 리용호 외무상은 2019년 3월 1일 호텔에서 회견을 열어 “우리는 현실적인 제안을 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미국이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특히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을 해제하면 우리는 영변지구의 플루토늄과 우라늄 포함한 모든 핵 물질 생산시설들을 미국 전문가의 입회 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제거한단 것”이나, “미국 측은 영변지구 핵시설 폐기 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따라서 미국이 우리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주장했다.

북미 양측의 견해차이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발언들이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미국측이 제재로 자신들을 굴복시키겠다는 오판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다시 나오지 않는 한 제재해제에 집착해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런 입장은 일관성 있게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4월 12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 무슨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도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측의 대응은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미국의 핵심 관료들은 북한을 더 자극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우리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할 때까지 제재 완화(sanctions relief)를 하지 않을 것이다.”(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우리가 북한에 경제적 압박을 계속 가함에 따라 북한을 비핵화 할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폼페이오 국무장관) 등등. 그 뒤 2019년 6월 30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판문점 회동, 10월 5일 스톡홀름 실무협상 등이 열렸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못했다. 북한측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좋으나, 볼튼 국가안보보좌관,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트럼프 측근들의 뿌리 깊은 반북의식과 미 의회의 방해가 하노이 회담 노딜의 원인일 뿐 아니라 새로운 북미관계 설정의 최대 장애물로 보았고, 이는 어느 정도 정확한 인식으로 평가된다. 하노이 회담 노딜은 볼튼 등 측근들이 의도적으로 결렬시키려 했고, 트럼트 대통령도 이에 동조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장사꾼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북한과의 거래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있다는 판단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브랜드정책인 ‘최대의 압박’이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이끌어냈다는 성과를 자랑하고 싶어했다. 더구나 미국 국민들이 낸 세금을 한 푼도 써지 않고 제재라는 수단 하나로 북한을 사실상 굴복시켰다는 자부심을 수시로 드러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들 가운데 아무도 이루지 못한 성과, 즉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자신의 차별화된 힘과 능력을 전세계와 미국 대중들에게 과시하고자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제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까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 상당수는 트럼프의 대외정책, 특히 한반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에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제재 해제와 같은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

미국측 입장에서 대북정책은 국내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볼튼 보좌관은 자신의 저서에서도 밝혔듯이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리비아 모델’을 사실상 요구했다. 얼마 전 공개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The room where it happened> 에 나타난 북미협상 관련 미국 내부의 난맥상은 왜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지속하기 어렵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목표조차 도달하기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 대북정책의 과도한 국내정치화는 북한의 대미 강경입장이나 전략 고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했다. 볼턴 회고록에는 북한 문제를 당초 재선 성공의 불쏘시개로 활용하려 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산이 잘 묘사되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 회고록을 통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실패의 이면을 명확히 꿰뚫고 나아가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과정의 문제점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북한을 견인할 수 있는 담대한 비핵화협상방안, 즉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는 한 북미정상회담이든, 비핵화 실무협상이든 재개되기 힘들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전망일 것이다.

 

3.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북한은 대미 정책과 관련해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측의 대미 메시지 혹은 의도 관련 주목해야할 몇가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미군사훈련, 제제 등 대북 적대시 정책이 전환되지 않는 한 미국과 다시 마주 앉지 않겠다. 둘째, 한미군사훈련 중단 등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하고 약속한 것부터 제대로 지켜라. 셋째,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이용되는 정치적 도구로서 북미대화에 응하지 않겠다. 넷째, 지난해 연말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것처럼 대미 관계는 장기적인 전략 아래에서 관리해 나가겠다. 다섯째, 미국의 국내정치일정과 무관하게 핵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겠다. 여섯째, 대북 제재를 중장기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한 핵무력건설, 경제건설 등에 집중하겠다. 이와 같은 북한측의 입장을 고려하면 실제 당분간 북미 대화의 재개와 비핵화 협상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재임시 "상황 악화를 막고 협상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최종 합의로 가는 징검다리로서의 잠정합의, '모두스 비벤디'라고 하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제정치학에서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타협안'을 뜻하는 라틴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빌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모색의 일단을 피력한 것이다. '모두스 비벤디'는 어려운 협상을 할 때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합의를 해서 우선 필요한 대화의 동력을 살리고, 향후 어려운 협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자는 의미로 사용되며, 과거 북핵문제 해법으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 현단계에서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일지라도 북미가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합의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신뢰를 쌓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북미 정상은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 1항에서 ‘새로운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서 미국측은 북한이 요구하는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북한 적대시 정책을 재고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북한은 제재완화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어떤 식으로든 상응하는 제재완화조치가 제시되지 않은 한 실효적이고 지속적인 북한의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이뤄지기는 어렵다. 동시에 비핵화와 평화 진전을 위해 단계적이고, 상호적이며, 검증 가능한 행동에 서로 동의하고 실천해야 한다. 신뢰구축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상호 연락사무소 개소, 인도적 활동에 대한 제재 예외 조치 확대, 여행제한 조치 폐기,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시험 유예 공식화, 전쟁포로·실종자 유해 송환 지속과 북미 이산가족 상봉 촉진 등의 임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지금은 북미관계의 교착으로 남북관계마저 얼어붙어 있는 상황이지만 신뢰를 쌓는 방법을 리영호 외무상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2018년 9월 당시 남북관계에서 나타난 급속한 개선과 협력의 분위기는 신뢰조성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 정상들이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세 차례나 만나고, 회담을 통하여 남북계의 여러 문제들을 건설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필요한 신뢰를 쌓고 있으며, 그 결과가 실천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9월 19일 남북정상들이 공동발표한 역사적인 9월 평양공동선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남북 간 정치, 군사, 인도주의, 체육문화, 경제협력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대화가 활성화되고 화해와 협력의 기운이 높아졌고,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지지와 환영을 받는 괄목할만한 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만일 비핵화 문제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우리였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도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 전개될 어떤 형식의 북미간 대화와 협상이든 빅딜 성사 여부는 양측 간 신뢰의 깊이와 질에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