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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2호_하승수_정당공천제 폐지 논의를 넘어 근본적 변화를!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0-07 11:57:27
  • 조회수 : 2917
 
지자제 선거가 8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1991년 지방의회 선거의 시행으로 지방 자치의 시대가 다시 열린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지역 주민에 의한 지역 자치는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주의 구조가 기초 자치체 선거에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어서 지역 정치의 현장에서는 공천 비리, 지역 토호들의 기득권 정치, 정책 경쟁의 실종, 무능과 부패 등의 문제들이 고질화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당 공천제 폐지가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논의가 정당 공천제 폐지에 대한 찬반으로 협소화되어서는 안 된다. 선거 제도의 보다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 비례대표제의 전면적 도입을 통해 정당이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가지게 할 것을 제안한다. 둘째, 지역(주민)정당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의 요구를 직접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지역 정치에서 전국정당과 경쟁하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셋째, 소속 정당 별로 후보자에게 일률적인 기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한다.
 
 
지방 정치의 현실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이상과 크게 괴리되어 있다. 지방 선거가 전국 단위 선거와 다른 점은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지역 내에서 이룬 정치적, 정책적 성과로 주민들의 평가를 받고 지역과 관련된 정책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울시 의원을 뽑거나 광주나 대구의 구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라면, 그 지역 주민의 생활과 관련된 정책이 후보 간 경쟁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지역에 따라 정당 별 지지도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역주의 구도가 정당 공천제와 정당 별 기호부여제도를 통해 지방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지역 주민들이 후보의 정당 기호만 보고 찍는 ‘묻지마’ 투표 행태가 횡행하고 있어 지방 자치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방 선거에서 정당 후보들이 지역의 주요 현안을 두고 경쟁할 유인이 생기지 않으며, 선거가 주민들의 지역 대표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특정 정당의 선출직 공직자들이 전횡을 일삼고 비리를 저질러도 다음 선거에서 그 정당의 후보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 후보의 경력이나 자질에 대한 검증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더욱이 지방 의원들이 주민들의 바람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중앙당의 공천에 목을 매면서, 공천 비리가 양산되고 지역 토호들의 기득권 정치도 계속된다. 이렇게 정당의 중앙이 지방 정치까지 독점함에 따라 전국정당과 거리를 두고 있는 지역 주민이나 정치 신인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을 받게 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는 지방단체장의 소속 정당이 지방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져 의회제도 본연의 기능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사례가 늘어나게 된다.

지방 정치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당 공천제를 폐지하자는 안이 지방선거를 8개월 앞둔 시점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정당 내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정당 정치가 보다 성숙해질 때까지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양대 정당의 후보는 모두 기초지방선거의 정당 공천제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를 폐지하자는 안은 이미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터라 정당 간 합의를 이끌어내기 쉽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지방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다.

우선 정당 공천제를 폐지하더라도 후보자들은 경력 소개를 통해 소속 정당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후보가 특정 정당으로부터 내부적으로 추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표방하는 것 자체까지 금지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도 2003년 5월 15일, 기초의원 후보자가 특정 정당의 지지 또는 추천을 받은 것을 표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2003헌가9). 그리고 이 위헌 판결을 계기로 2006년부터 모든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정당 공천제 폐지’는 기초의회선거에 지역주의 구도의 관철을 막고, 지역 주민의 생활 문제와 관련된 정책 경쟁을 통해 지방 정치를 활성화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다. 또한 정당공천제 폐지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 정치의 원리와 배치되기 때문에 한시적인 유예일 뿐이며 법률적으로 위헌 소지를 피해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 정당 공천제 폐지가 실효성 면에서 제약이 따르고 정당 정치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의 중점 사안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례대표제의 확대와 주민(지역)정당제의 도입은 답보 상태에 있는 지방 정치를 활력을 불어넣는 데 있어 관건적인 개혁 방안이다.
 
 
지방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는 지방의회선거에서 비례대표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광역의원 선거에 의원 정수 10%의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부터 정원 10%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전환하였으며, 2006년부터는 기초의회선거에도 10%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실시되고 있다.

지방의회선거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것은 지방 의회가 세대, 직능, 계층 등 여러 계층을 대변하고 전문성을 제고하는 한편, 군소 정당의 의회 진출 장벽을 낮추어 지역주의 구도를 완화하자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비례대표제 도입 이후 여성의 지방 의회 진출이 크게 증가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지만 지방 의회의 비례대표 의석 수가 의원 정수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역주의 구도 완화 등 원래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광역 의회는 아직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제1위 정당이 지지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경향이 심하게 나타난다.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부산시 의회의 비례대표의 의석 수가 5석에 (지역구 42석)에 불과하여, 민주당이 광역비례대표 선거에서 27.8%를 득표했지만 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민주당은 지역구에서는 소선거구의 문제점 때문에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비례대표 2석이 부산 시의회의 민주당 총 의석 수이다.

기초의회선거는 중선구제를 택하고 있어 광역 의회보다 제1위 정당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이 약하지만, 2인 중선거구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어서 양대 기득권 정당 외에는 여전히 지방의회 진출이 어렵다. 그리고 비례대표 비율이 광역 의회와 마찬가지로 10%에 불과한지라 정당의 지지율과 의석 비율 간에는 큰 차이가 난다. 전주시 의회의 경우 한나라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 14.9%를 얻었지만 비례 의석이 4석밖에 되지 않아 1석밖에 얻지 못했는데, 이것이 새누리당의 전주 시의회 전체 의석이다.1)

더군다나 의원의 정수가 7~10석 규모인 기초 의회의 경우 비례 의석이 고작 1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최다득표 정당이 1개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비례대표제는 사실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한국 지방선거의 현실은 지난 9월에 있었던 독일의 지방 선거 사례와 대조적이다. 바이에른 주의 예를 들면, 기독교사회당은 47.7%의 지지를 얻었고, 사회당과 녹색당은 각각 20.6%, 8.6%의 득표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사회당과 녹색당이 비례대표제를 통해 득표율에 비례하는 의석 수를 차지함에 따라 기독교사회당은 주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약간 넘기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의회가 민의를 가능한 고르게 반영하여 구성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비례대표 의석이 각 정당의 득표율에 비례하여 배정될 수 있도록 비례대표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비례대표제와 함께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주민 정당(지역 정당, local party)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 사실 전국 정당만 지방 선거에 후보를 내보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방 선거에는 지역정치조직이 참여하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지면, 전국 정당을 견제할 힘도 강해져 지방 정치가 중앙 정치에 종속되는 현상도 완화되고 지역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토론과 지역 정치인의 정책 경쟁이 활발해질 것이다. 또한 지역 정당제가 도입되면 정당 공천제를 폐지할 경우 우려되는 토호 정치의 발호와 지방의 탈정치화 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독일의 사례는 지역 정당제도의 장점을 확인시켜 준다. 독일의 경우 지방 선거에만 후보를 낼 수 있는 정치 단체들이 존재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85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정당만 유일한 정치집단이 아니며, 정당과 경쟁관계에 있는 유권자의 공동체도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정당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유권자단체 (Wahlervereinigungen) 또는 선거인단체(Wahlergruppen)로 불리는 이 단체는 지방 선거에서 실제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유권자단체의 지지율은 지역적 편차를 보이는데, 바덴-뷔르템베르그 주는 유권자단체가 높은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바덴-뷔르템베르그 주의 경우, 2004년 시행된 게마인데(Gemeinde, 우리나라의 기초자치단체에 해당) 선거에 여러 유권자단체가 참가하였는데 도합 34.3%의 득표율을 올리기도 했다. 일본도 지방 선거에만 참여하는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 가나가와 네트워크 등과 같은 지역 정당이(local party)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도 정당법에 지역(주민)정당의 법적 근거를 신설하거나, 공직선거법을 전국 정당이 아닌 정치단체도 지방 선거에서는 후보를 낼 수 있도록 개정하는 방법을 통해 지역정당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정당법에 명시된 지나치게 까다로운 정당의 설립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앞서 핵심적인 개혁 방안으로 제안한 비례대표제도와 지역정당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를 유지하고 그 폐해를 최소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정당기호부여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개혁방안들이 완결적인 조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당 공천제의 폐해 중 상당부분은 후보자에게 소속 정당에 따라 일률적으로 기호를 부여하는 제도에서 기인한다. 2006년 기초의회선거에서 중선거구제를 선택한 후부터 정당 별 기호부여도 모자라서, 한 선거구에 동일한 정당에서 공천 받은 후보가 여러 명 있으면, 1-가, 1-나, 1-다 등과 같은 방식으로 기호를 부여하고 있다. 그냥 정당만 보고 투표하라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대한민국에서 ‘번호 보고 찍는’ 투표 용지를 나눠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정당 공천제를 그대로 두더라도 정당 별 기호부여제도를 폐지하면 정당 공천제 폐지가 목표로 삼은 효과를 상당부분 실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당 공천이 이뤄지더라도 후보의 기호를 추첨 방식으로 정한다면 기성 정당이 누리는 ‘순서 효과’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말로는 ‘선거는 유권자들의 축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권자들의 ‘정치할 자유’를 꽁꽁 묶어놓고 있다. 유권자의 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정치관계법은 정치의 기득권 구조를 지탱시켜주는 한 요소이다. 지방 자치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도 ‘정치할 자유’의 확대는 절실하다.

우리나라의 공직선거법은 선거 운동의 주체, 기간, 방법 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 정당이나 후보자뿐만 아니라 유권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선거운동 기간을 너무 짧게 제한하고 있다(대통령 선거 22일, 그 외 선거는 13일). 예비후보 등록제도가 만들어져 후보자에 대한 기간 제한은 일정 정도 완화되었지만, 유권자들은 여전히 짧은 선거 기간 외에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다.

선거운동의 방법도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공직선거법 제93조를 들 수 있다. 이 조항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문서, 도화 등을 배포하거나 게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 독소 조항 때문에 시민단체나 유권자들이 후보자와 제대로 된 토론을 벌일 수 없다. 미국에서는 돈 안 드는 선거운동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호별 방문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시대 착오적인 규제이다.

공직선거법은 복잡한 규제 장치를 통해 선거운동의 자유와 창의적인 정치참여를 가로막고 있다. 다가오는 지방 선거를 지방 정치 개혁의 전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선뿐만 아니라, ‘정치할 자유’의 확대를 위해 정치관계법의 독소조항을 개정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제도 개혁은 정말 중요하다. 제도가 어떻게 바뀌냐에 따라 그 나라의 정치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삶이 달라진다. 따라서 선거제도의 개혁 방향에 합의를 이뤄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초정파적인 운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1) 윤재설, 진보정의당 지방의원선거제도 개선방안(초안) 2013.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