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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4호_김학진_한국 과학에 관한 단상 - 노는개미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2-30 10:03:58
  • 조회수 : 2767
보통 ‘과총’이라고 부르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선정한 2013년 10대 과학기술 뉴스는 다음과 같다.

- 나로호 3차 발사 성공                          - 사이버 테러 국가 안보 비상
- 불안한 원자력발전소                          - 미래창조과학부 출범 (창조경제)
- 카카오톡, 라인 등 모바일 업체 약진      - 빅데이터 분석활용센터 개소
- 3D 방송 개시와 디지털 TV 방송 전환     - 베트남에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추진
- 결핵 발병률 급증                               - 삼성전자 스마트워치 사용화

절반이 IT(정보기술) 관련 뉴스이고, 나머지는 항공우주, 원자력, 의료, 행정 관련 뉴스이다. 오늘날 자연과학(이하 과학)과 기술은 많은 부분에서 겹치기 때문에 정확한 선을 그어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위 뉴스에는 과학 뉴스라고 부를만한 소식이 없다. 위 뉴스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연합단체에서 선정한 것이고, Nature, Science 같이 과학 전 분야를 다루는 과학 전문 학술 잡지에서도 과학과 기술을 분명하게 구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학기술 발전에의 기여, 과학기술인의 관심, 과학 대중화에의 기여를 기준으로 하여 선정된 10대 뉴스에 과학 뉴스가 전무한 것은 2013년 한국 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위상을 시사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과학과 그 발전 방안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본다.
 
 
기술(technology)에 대한 다양한 정의 중 하나는 지식의 실제 적용 혹은 넓은 의미의 도구를 사용하여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혹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다. 이런 목적 지향 과정을 체계화하여 공학(engineering)이라고 하는데, 공학을 기술에 포함시키거나 동일하게 사용한다. 2, 3백만 년 전에 살았던 현생 인류의 조상 ‘솜씨 있는 인간(homo habilis)’은 도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는 기술의 역사가 매우 길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출발시점부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과학은 지식의 쓰임보다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를 가리킨다. 최초의 과학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때 과학의 역사는 3,000년이 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은 상당히 오랫동안 분리되어 발전하였으며, 둘의 관계가 밀접해지기 시작한 시점을 정확하게 특정하기 힘들지만, 앞의 역사적 시간에서 보면 최근의 일이다. 과학기술 외부에서 볼 때 더 심하겠지만, 내부적으로도 과학과 기술이 중첩되어 구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과총과 같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함께 단체를 구성하거나, 과학과 기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의 내부나 과학기술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볼 때 과학과 기술은 아직도 많이 다르며, 중첩된 부분보다 분리된 영역이 훨씬 더 크다.

기술은 인간이 나태함을 누리기 위한 것이고, 의식주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과학은 기술 덕분에 만들어진 여유를 가진 인간이 호기심을 충족하고, 나아가 사고(思考)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과학은 사치재, 그 수요가 소득 증가 속도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재화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 활동이 사회적 활동으로 나타나기 위한 소득의 문턱은 일반적인 사치재에 비해 훨씬 높으며, 그 활동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도 까다롭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진국에서 과학 활동을 거의 볼 수 없으며, 전쟁이 많거나 문화적 토양이 과학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던 로마제국이나 고대 중국의 경우 높은 수준의 기술은 볼 수 있지만 과학이라고 부를만한 활동은 미미하였다.

과학 활동, 즉 지식 생산에서 창조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지식 내부나 지식 체계에서는 합리성이 최고의 덕목이다. 인과율, 이론과 실험의 일치, 실험의 재현성 등 과학 활동을 관통하고 있는 과학의 정신은 합리성으로, 이 때문에 과학적이라는 말은 올바르다는 말과 통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사고방식(way of thinking)에 관한 것이다. 이런 과학이 기술의 발전에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주는 것은 당연하며, 과학 활동에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둘의 융합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과학의 역사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과학 지식은 불완전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학은 경제적 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국방과 유사하지만, 군대 규율이 상징하는 일사분란한 질서는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데 커다란 해독이 된다는 차이가 있다.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과학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로움이다.
 
 
과학에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종합과학인 지구과학이 있다. 여기서는 서로간 사고방식의 차이가 분명한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본다.

빅뱅 초기에 힉스입자와 같이 질량이 매우 크고 특이한 입자가 존재해야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수학적 관계를 1960년대에 예측하고, 작년에 실험적으로 이를 확인하였으며, 금년에 그 수학적 관계를 예측한 물리학자들에게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졌다. 정확하다, 어렵다 등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해온 물리학의 핵심은 탐구 대상에 대한 수학적, 따라서 정량적 표현이다. 아인슈타인이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하였을 때, 과학은 물리학이다. 물리학자들은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탐구 대상에서 제외한다. 뉴턴 이래 물리학이 자연과학 너머로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수학적 표현을 통한 정량적 예측 때문이다. 하지만 힉스입자를 포함하는 입자에 관한 표준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우주 구성 물질의 5%뿐이다. 나머지 95%는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라 부르는, 지금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세상에는 수학적으로, 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과정의 화학에서는 주로 정량적인 것을 다루지만, 화학은 정량적인 표현이 불가능한 정성적인 특성, 특히 변화를 대상으로 한다. 물과 알코올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변화들의 차이 중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작다. 정확하지 않은 정량화 혹은 정량적 표현이 애당초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정량화 시도는 혼동만 가중시킬 뿐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광고의 창의성은 정량화가 불가능하며, 순서를 정하기도 어렵다. 화학자들은 변화에 대한 정량적 예측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또한 화학과 생물학에는 이론 – 대상에 대한 정량적 예측이 가능하고 그에 대한 예외가 생길 때 그 분야 전반에 커다란 충격이 되어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연구를 촉발하는 그런 이론이 없다. 화학과 생물의 정량적 이론들은 물질,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유래한 물리학의 이론들에 비하면 매우 초보적인 것들뿐이다.

생물학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데, 생명체의 특징은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특징들 중에 특히 물리학과 화학에서 거의 다루지 못하는 것은 환경과의 매우 복잡한 상호 작용과 역사이다. (역사를 다루는 또 다른 과학은 지질학이다.) (만약 물이 순수하다면) 누구도 얼음이 녹아 생긴 물과 수증기가 식어 생긴 물을 구별할 수 없지만, 누구나 얼었던 달걀과 끓는 물에 넣었던 달걀은 구별할 수 있다. 즉, 생명체에서 지나간 역사, 진화를 읽을 수 있다. 인간사회를 파악하는 데 생물학이 물리학이나 화학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회생물학이 사회열역학보다 그럴듯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열역학이 에너지 변환을 이해하는 것만큼 현재의 생물학이 생명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훗날 물리학자들이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이해하여,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을 100% 이해하였다고 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화학도 지금보다 풍성해져있겠지만 물의 끓는점과 그 구성 성분인 산소와 수소의 끓는점의 관계는 여전히 미궁일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도 이런 불가능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까.) 또한 아마도 여전히 병아리 부화 기간은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화학과 생물학은 각기 다른 분야로, 물리학과 다른 독립 분야로 남아있을 것이다. 정량적 관계, 정성적 변화, 복잡함과 역사를 다루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대상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모두 나름의 역할을 하는 상호보완적인 사고방식들의 과학이다.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얻고,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가 없는 성과를 대가없이 널리 퍼뜨려 명성과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특허로 보호되는 기술과 달리 과학지식은 거의 공짜로 전파된다. 아주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거대과학 장비를 제작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과학 활동에 대한 지원은 국가별로 이루어진다. 언뜻 보기에 선진국들은 인류 전체를 위하여 경제적 가치가 별로 없는 과학 활동을 지원하는 것 같다. 마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수입하여 소리를 표시하는 데 큰 비용을 치루지 않듯이, 후진국은 선진국의 과학지식을 거의 공짜로 수입하여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지식은 경제적 가치를 직접 창출하지 못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선진국의 과학 활동과 후진국의 과학 활동은 매우 다르다. 현대 과학 활동에는 고가의 장비, 소모품, 과학자 인건비가 필요한데, 선진국에서는 과학 활동에 필요한 장비와 소모품을 대개 자국 내에서 생산한다. 따라서 과학 활동의 결과 만들어진 지식에 경제적 가치가 없더라도, 그에 대한 투자는 일종의 소비 활동으로 자국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후진국에서는 과학 활동에 필요한 인건비를 제외한 과학 장비와 소모품 거의 전부를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한다. 고가의 외국산 장비는 사후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수명이 짧아지기 쉽다. 현재 한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후진국에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과학 활동 대신 선진국에서 생산된 과학지식을 수입하여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우선 지식의 암묵성으로 인해 그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경우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지식의 불완전성과 암묵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를 직접 생산한 사람들이다. 후진국에서도 비용이 많이 드는 과학 활동을 직접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학지식이 문헌이 아닌 인력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가 과학이다. 최신 과학의 성취가 외신으로 전해졌을 때 그 내용의 의미는 듣는 이의 과학 수준에 따라 크게 다르다. 과학지식은 그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인력에 따라 그 효과를 달리 하며 전파된다. 과거 일본의 과학자들이 외국 유학을 멈추고 자국 내에서 박사학위를 하기 시작한 시점이 일본의 과학 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시점이다. 한국 역시 여러 과학 분야에서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학지식은 곧 과학 인력이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는 과학을 위해서는 과학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인력이 있어야 한다.
 
 
널리 회자되어 이제는 경영학에서도 언급된다는 개미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사회적 곤충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 중 80% 가량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하는 개미들만 골라 집단을 이루게 하면, 거기서 또 노는 개미들, 대기조가 생겨난다고 한다. 개미 사회에 일어날 수 있는 천재지변은 인간 사회에 비해 월등히 많을 것이며, 따라서 충분한 대기조는 개미 사회의 유지에 매우 중요할 것이다. 대기조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는 예기치 못한 변화로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다. 개미 대기조는 10여 년 전 EBS에서 방영한 김용옥의 노자 강의에서 들었던 "모든 쓸모(기능)의 공통점은 허(虛), 비어있음"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휴식과 여유는 개인이나 조직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피로에 젖어 귀가하기 때문에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장은 빈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대선 때 잠시 나왔던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은 사회의 건전한 작동에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경제적 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못하지만, 원활하게 작동하며 발전하는 사회로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대기조와 같다. 인간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과학만은 아니다. 인문학, 예술 역시 이런 역할을 한다. 인간성의 확장과 고양에 기여하는 인문학과 예술 등은 경제적 가치 생산과 직접 연관이 없지만 인간 사회의 대기조로서 역할을 한다.

선사시대의 모든 인간 집단이 알타미라 벽화 같은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미술 활동 여부는 인간 집단이 환경에 적응하고 유지하는 데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계속 그럴 것인가? 문화 활동이 풍부한 사회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여 문화 활동이 보잘 것 없는 사회보다 이미 더 발전한 사회이지만, 그 격차는 문화 활동으로 인해 더욱 벌어지지 않을까? 사어인 라틴어를 교육하는 것은 실용적인 가치는 별로 없다. 금년 2월 교황이 사임을 라틴어로 발표할 때 그것을 홀로 알아들어 특종기사를 쓰는 것 같은 아주 드문 사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회를 위해 라틴어를 배운 것은 아닐 것이다. 라틴어를 배우느라 다른 실용적인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과 실용적인 것만 배운 사람이 함께 할 때 나타나는 창발성과 실용적인 것만 배운 사람들끼리 만들어내는 창발성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단기적인 효율을 중시할수록 후자를 중시할 것이다.)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에, 한 사회가 대기조를 유지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결과들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생존을 위해 즉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기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전자들을 수집 보관하면서 진화하는 생물종과 기능이 분명한 유전자들만을 가지고 진화하는 생물 중 어느 종이 환경 변화에 더 잘 적응하면서 진화할까? 21세기에 어떤 형태의 인간 사회가 더 유리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경제적 여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풍성한 사회를 위해 사회적 대기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빠른 정보통신 기술 덕분에 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의 관심 대상은 거의 같지만, 과학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과 과학을 수용하는 태도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국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방법도 다르다. 선진국의 과학 정책을 후진국이 그대로 답습하거나 섣부른 벤치마킹을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고, 경우에 따라서 정책의 부작용이 후진국에서 증폭될 수도 있다. 과학 활동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로움이며, 이를 증대하기 위해서는 관련 장벽들을 낮추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측면에서 그 장벽들을 생각해본다.

정치적 자유는 과학 발전에 필요한 자유로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노벨과학상은 각국의 과학 수준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데, 2차 대전 전에는 서유럽국가에서 주로, 전후에는 미국이 거의 독식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에는 연구비, 건강, 운이 필요하다는 농담이 있는데, 이들 국가에 노벨상이 집중된 것은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선진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수준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붕괴 전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정도로 과학기술에 투자를 많이 하여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지만, 소련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몇 안 되는 동유럽 출신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모두 서구에서 수행한 연구 업적으로 수상하였다. 일상생활이 자유롭지 않으면, 과학 활동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데 크게 불리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남북 대치로 인한 경직성이 상존하며,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장벽이 존재한다. 자유로움에 대한 대내외 장벽을 낮추는 것이 과학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경제적 투자가 과학 활동에 중요하지만, 투자 확대가 과학적 성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은 이제까지 경제 선진국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적다는 평가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의 목표수를 정하고 노력 중이며, 약간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 증가 이후 일본 국민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약간 줄어들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이 국가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면 일본은 이미 지금보다 많은 수상자를 배출하였을 것이고, 한국 역시 소수라도 수상자를 배출했어야 했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또한 실험 과학 분야에 비해 경제적 투자가 훨씬 덜 요구되는 경제학, 수학 분야의 수준이 다른 분야와 비교할 때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과학의 발전에 경제적 투자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경제적 측면을 다른 각도에 볼 필요가 있는데, 경제 양극화를 만드는 장벽의 해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경제 양극화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관 쏠림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는 과학보다 기술을 선호하게 만들어 과학을 업으로 고려하는 젊은 세대와 이미 과학에 몸담고 있는 기성세대 모두를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과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감소시킬 수 있다. 특정 기술, 과학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정책의 기조로 삼게 되어 선진국의 기본 조건인 사회적 여유로부터 더욱 멀어질 가능성이 있다.

어떤 분야든 아마추어의 수준이 높아지면 프로의 수준은 자연히 높아지고, 아마추어의 프로 진입이 증가하여 프로의 수가 많아지면 다양성이 증가하여 자유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프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에 이를 적용하면, 과학의 대중화와 예비 과학자인 과학 영재를 육성하는 일이다. 하지만 과학의 대중화는 과학자 사회의 높은 진입 장벽으로 인해 과학의 자유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오늘날 과학자는 20세기 이전과 달리 독학에 의해 달성할 수 있는 직업이 전혀 아니다. 다른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정규 교육만이 과학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일반적인 과학의 대중화는 과학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 형성에 일조하여 간접적으로 과학 활동에 도움을 줄 뿐이다. 장기적인 투자인 과학 영재의 육성은 경쟁과 스펙을 중요시하는 현재의 한국 교육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좋은 과학자를 배출하는 데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의대에 대한 선호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과학 영재들이 과학자가 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프로게이머를 양성하는 식의 경쟁을 통한 과학 영재의 선발은 잠재적 과학자의 수를 제한하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어린 나이에 과학에만 집중하여 폭넓은 경험을 할 기회를 빼앗기는 결과가 되어, 과학자는 물론 인간으로서 좋은 품성을 갖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영재 선발 경쟁과 전문화된 조기 교육은 호기심을 목적 지향적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으며, 이는 자유로움의 확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공교육 중 과학과 관련된 장벽은 크게는 교육 체계, 작게는 최근 많이 논의된 고등학교의 문·이과 분리에 따른 장벽이다. 우리나라 교육은 크게 초등, 중·고등, 대학의 3단계로 나뉘는데, 각 단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세상의 모든 과정들이 대부분 중첩하듯이, 긴 세월동안 수평적, 수직적으로 중첩하는 과학교육이라야 제대로 된 교육이다. 그런데 과학교육을 보면 하나의 일관된 철학이 3단계를 관통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발전적인 변화를 경험하도록 하기보다 서로 다른 분리된 과정들을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각 단계의 교육담당자들 사이의 영역 싸움의 결과다. 문·이과 분리 폐지에는 경제 경영학에 수학이 많이 필요하며, 과학자에게 사회적 책임과 글쓰기를 교육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이유가 있다. 항상 그래왔듯이, 금세기에는 지난 세기보다 훨씬 큰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은 흔히 주장하듯이, 수월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유연성이다. 대학교육의 수월성이라는 단기적인 효율을 희생하더라도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21세기를 위해 이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다양성과 유연성은 자유로움의 다른 표현이다. 21세기의 주역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20세기에 교육받은 기성세대는 새로운 교육방법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자신과는 다른, 20세기에는 당연히 배웠으리라 생각한 부분을 교육받지 못한 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문화의 전통적 특징의 하나는 강한 위계질서다. 아마 자연의 질서정연한 변화에 거스를 수 없는 농경문화의 특징일 것이다. 이는 삶의 지혜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졸업 성적으로 만들어지는 줄 세우기에 의한 서열은 일생을 좌우하는, 넘어서기 매우 어려운 장벽으로 작용하며, 또 다른 기회를 크게 제한하는 사회 구조로 작동한다. 여기에 한국 사회가 가진 모든 병폐가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계적 문화와 서열화 구조는 소통과 상상력의 발휘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는 것으로서 절대성과는 거리가 먼, 불완전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있고, 선후배가 있지만, 스승과 선배를 넘어서야 새로움이 나타난다. 제자에게서 배우지 못하면 그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의 원인이 무엇이든, 민주적 인간관계는 과학 발전을 위해서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 과학의 발전 방안은 다른 사회 문제와 연관된 발전 방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미국의 대학교수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공과대학교수들이 가장 리버럴하다고 한다. 담론을 만드는 측면이 아니라 이슈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이는 공학도 전체의 평균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산업체에 비해 봉급이 훨씬 작은 대학에 자리를 구한 공과대학교수들은 봉급보다 자유로움을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이러한 공과대학교수들은 노는 개미들을 떠올리게 한다.
좀 더 확장하면, 대학은 그 사회의 대기조를 위한 공간이며, 개인에게는 대기조를 경험하는 시간이다. 근래에 들어 한국 대학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산업계에서는 대학에서 가르친 내용이 산업 현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 불평하며 대학을 압박하고, 교육당국은 여러 가지 경쟁력 강화를 이유로 대학의 구조조정을 요구한다. 성장률 저하로 인해 직업 구하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교수나 학생이나 점점 더 노는 개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양한 관점을 경험하여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기회를 차다함으로써 오히려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단기적 경쟁력에 대한 집착이 경쟁력 저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 편입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