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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26호_정용욱_과거도 착취당한다 한일 역사전쟁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3-31 11:18:54
  • 조회수 : 3102
한·일간에 역사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영토 분쟁 역시 점차 격화되는 모양새다. 역사 분쟁과 영토 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양국 정부의 상대방 정부에 대한 비판과 비난 발언의 수위가 점차 높아졌고, 양국 간 외교관계는 냉각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양국 국민의 상대방에 대한 감정도 점점 악화되는 추세이고, 양국 정부와 언론은 이러한 사태를 개선하기보다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듯하다. 일본에서는 한류(韓流)의 위축이 두드러지고, 오히려 혐한류(嫌韓流)가 증가 추세에 있다. 한국은 올해 3·1운동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예년과 달리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대규모 행사로 치렀다.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는 국교정상화 과정에서부터 노출되었던 것이고, 이러한 인식 차는 일본의 보수 또는 극우 정객의 돌출적 ‘망언’이라는 형태로 반복적으로 표출되었으나 과거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미야자와 담화 등을 통해서 이러한 역사 인식의 차이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손상시킬 정도로 발전하지 않도록 무마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 수반인 아베 수상이 직접 나서서 고노 담화 등을 부정하는 형국이 되었다. 한편 한·일 양국 정부는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도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글은 한·일 두 나라가 안과 밖에서 동시적으로 치르고 있는 역사 전쟁의 배경과 그것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보고, 현재의 난맥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양국의 시민사회, 학계, 교육계가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사건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1)

 
 
마침내 2014년 3월 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이 한 자리에 앉았다. 한국과 일본 언론은 핵안보정상회의보다 이 회의에서 한·일 양국 정상이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두었고, 양국 정상회담이 아닌 한·미·일 정상의 3자회담 형식으로 한·일 양국 정상이 만났다. 3자회담 형식이나마 양국 정상이 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기까지 양국은 외교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우선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지난 3월 14일 아베(安倍晋三) 총리가 국회에서 ‘무라야마(村山) 담화’ 등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 관련 담화를 계승할 뜻을 밝히고, ‘고노(河野)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천명함으로써 한국 정부를 배려했다. 바로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무라야마·고노 담화 계승 입장은 다행’이라고 논평했다.

외교가에서는 이번 3국 정상회담을 한·미·일 삼각 안보 공조의 신호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일 관계에 진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3국 정상회담이 무리하게 추진된 배경에는 ‘크림 합병’을 강행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평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인식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을 이 회담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이번 회담을 통해서도 역사 갈등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과 상황을 다시 악화시키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2)최근 역사 분쟁의 진행 과정과 역사 분쟁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과 태도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관찰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한·일 간 역사 인식의 차이는 국교정상화 과정부터 노출되었던 것이고, 이러한 인식 차는 일본의 보수 또는 극우 정객의 돌출적 ‘망언’이라는 형태로 반복적으로 표출되었다. 과거 한·일 양국 정부는 그러한 망언이나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양국의 외교관계를 손상시킬 정도로 발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일본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미야자와 담화의 ‘계승’을 표방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인식을 은폐하거나 역사 문제의 쟁점화를 회피하는 면죄부로 활용해왔다. 무라야마 담화란 1995년 8월15일 전후 50주년 기념일에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던 것을 말한다. 고노 담화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이 ‘위안부’(성노예)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미야자와 담화는 1982년 8월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3·1운동을 ‘데모’와 ‘폭동’으로, ‘침략’을 ‘진출’로 수정하도록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자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다. 교과서를 기술할 때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비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베 집권 2기에 들어서자 아베 수상과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역사관련 3대 담화를 부정하고 있다. 2013년 4월 22일 아베 총리는 일본 의회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고, 12월 26일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서 주변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 2014년 2월 28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검증팀을 설치해서 고노담화의 작성과정을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일부 정객의 ‘망언’이 이제는 일상적 사안이 되었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될 만한 형국이 되었다. 왜 일본 정부는 굳이 한국, 중국과 외교적 갈등을 야기하면서까지 역사 문제에 대한 과거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려고 하고, 또 교과서 개정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일까? 아래 뉴욕타임즈 2014년 1월 13일자 사설에 그 단서가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고교 역사교과서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 문부성에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교과서들만을 승인하도록 지시했다. (...) 그는 교과서에서 한국인 ‘군대 위안부’ 문제를 빼고자 했고,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전시의 침략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위험한 국가주의를 조장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해방 후 한국의 독재정권에 관한 교과서 기술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문제를 축소하기를 원하고 있다. (...) 학계와 노조 그리고 교사들은 박 대통령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있다.”3)

이번 역사 분쟁이 좀처럼 외교적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장기화하고 있는 이유는 과거와 달리 일본 정부가 인식 차를 좁히려는 노력을 외면한 채 오히려 주변국과의 역사분쟁을 격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역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뉴욕타임즈 사설은 역사교과서 개정에 매달리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는 강한 국내정치적 동기가 있음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관측과 지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를 통해 얻은 대중적 지지 위에서 ‘아베노틱스’를 추진하고 있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일본 헌법 9조(전쟁과 군사력 보유 금지)와 96조(개헌 절차 조항)의 개정과 집단적 자위권의 확대라는 것이 내외 평론가들에 의해 이미 지적되어 왔다.4)그리고 그것은 인접 국가들과의 역사 분쟁, 영토 분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는 주변국은 물론이고 미국, 독일 등의 국제적인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서 이러한 일본 정부의 기도를 몇 차례나 비판했다.5)

위의 뉴욕타임즈 사설은 박근혜 정부 역시 국내에서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간첩사건 증거 조작 등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하고 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대형 악재들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일외교나 대북관계에서 소신 있는 태도가 큰 보탬이 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교학사 교과서 검정 문제를 둘러싸고 표출된 논란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정부와 시민사회의 갈등을 감안하면 한국 정부가 취한 입장과 태도는 자기분열적인 모순에 빠져 있다. 뉴욕타임즈 사설은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개정 시도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점을 에둘러 지적하였다.
 
 
일본 정부가 국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역사 전쟁이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전략인 아베노틱스의 일환이라면 지난 해 중반부터 올해 초까지 한국 사회를 달군 교학사 교과서 검정 논란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논란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이번 교학사 교과서 검정 사태는 일찍부터 예고되었던 일이다. 이명박 집권기인 2009년에 마련된 개정교육과정에 의해 고등학교 ‘역사’ 과목이 ‘한국사’로 바뀌었고, 한국근현대사 교육이 축소되었다. 2011년 2월 이배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11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가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개정교육과정안을 교육부에 제출하였고, 2011년 7월 교과부 사회과교육과정심의회가 이를 최종 확정했다. 그러나 2011년 9월 교육부 장관이 그 해 5월 창립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에 따라 개정안 중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직권 변경하여 발표했다. 이에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들이 집단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뉴라이트 학자들의 집합체로 창립 당시부터 그들의 편향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단체의 건의에 따라 학자들이 오랜 기간 토론을 거듭하여 만든 교육과정안을 교육부 수장이 임의로 변경한 것은 정부가 스스로 개정교육과정안을 부정한 것이고, 교육과정 작성 절차를 무시하고 부인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와 보수언론은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는 덮어둔 채 이 사안을 민주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대립 논쟁으로 호도했다.

2011년의 개정교육과정안 작성 과정의 파행성이나 그것을 둘러싼 논란을 생각한다면 2013년 8월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일으킨 파행과 논란은 예고된 사태였다. 교학사 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하기 이전부터 부실과 오류, 편향적인 역사 인식,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으나 교육부는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8종 모두에 수정을 지시했다. 이는 교학사 교과서가 도저히 검정 기준을 통과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과시킴으로써 초래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다른 교과서들 역시 문제가 많은 것처럼 치장함으로써 교학사 교과서와 교육부에 쏟아질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부는 이른바 1종 대 7종의 프레임을 만들었고, ‘불량 교과서’로부터 비롯된 사안을 정부, 정치권, 그리고 보수 언론이 나서서 이념 논쟁으로 만들었다. 나머지 7종 교과서 집필자들은 한국사집필자협의회를 구성해서 교육부의 수정 권고를 거부하고 대신 자체 수정안을 제출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수정 이후에도 부실과 오류, 편향과 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출판사 자체 수정에 따라 제출된 다른 7종의 교과서와 함께 최종 검정을 통과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교학사 교과서 필자들은 정부와 여당은 물론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나머지 7종의 한국사 교과서를 친북좌파 교과서로 매도하는 이념 공세를 펼치며 교육 현장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파문은 한국사 교과서 시장에서 교학사 교과서가 사실상 퇴출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당황한 정부, 여당과 집필자들은 외부세력의 압박과 일부 전교조 교사들의 위협으로 채택이 저지되었다는 둥 억지를 부리며 이념 공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 만들어진 개정안에 따라 집필된 교과서를 친북좌파로 몰아가는 것은 자가당착도 그런 자가당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교육 현장과 국민들의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냉담한 태도가 그들의 이념적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부실, 오류, 편향, 왜곡투성이 교과서, 또는 그러한 교과서를 무리하게 통과시킨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신과 반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교학사 교과서의 퇴출은 정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의 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교학사 교과서 검정 통과 파문에 대한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본질적 문제로서 과거를 성찰적으로 살펴보는 역사교육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합리화 하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내용적 편향과 왜곡이 심하다. 친일 미화, 독재 예찬이라는 지적을 받은 데에서 나타나듯이 터무니없을 정도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연중에 강요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 셋째, 필자들이 이런 가치관에 입각하여 다른 모든 교과서를 좌파라고 공격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비이성적인 광기로 몰아넣었고, 언어사용이 특히 그러한데 합리적 이성이 작동할 여지를 없애는 퇴행적 사상공세에 편승하고 있다. 넷째, 교과서의 자격을 논할 대상조차 되지 못할 만큼 터무니없는 오류들이 너무나 많다.

어쨌든 역사 전쟁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한 부실 교과서로 인해 야기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 파문은 뉴라이트 출범 이후 최초로 그들의 역사 인식을 담은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 시장에 진입하고, 또 그것이 교과서로서 결격 사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에 의해 채택되는 선례를 남겼다. 이 소동은 우리 사회의 교과서 검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이 과정에서 교육부가 헌법에도 명시된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을 난폭하게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절차적 정당성을 잃었다는 점이다. 본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검정위원이 요구한 수정, 즉 단 한 번의 수정을 거친 뒤 최종 합격을 받아 검정 교과서 시장에 나온다. 그런데 교육부는 교학사 교과서를 구조하기 위해 수차례나 수정 기회를 부여하는 등 검정 시스템을 수호해야 할 처지를 망각하고 스스로 검정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 그것은 교과서 파동 과정에서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역사학계가 한결같이 비판했던 점이다. 이념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학사 교과서 검정 파문이 가진 절차상의 문제가 충분히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후일 이 소동을 다시 정리하게 된다면 이 점이야말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나 간첩 증거 조작과 함께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친 치명적인 문제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국사편찬위원회와 검정위원들의 책임 문제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함량 미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용인했다. 만약 그들이 학자적·교육자적 양심을 걸고 필사적으로 검정 통과를 막아주었다면 이런 소모적인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6)교학사 교과서 파동은 권력의 비호 아래 역사 교과서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함량 미달의 교과서가 가진 허다한 오류와 부실을 논외로 한다면 교학사 교과서가 역사 인식의 오류와 역사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많이 비판을 받은 부분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뉴욕타임즈 사설은 그 점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그 사설은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은 전쟁과 친일에 관해 민감한 개인적 가정사를 갖고 있다. 아베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였고,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일제 때 일본군 장교였으며, 1962년부터 1979년까지 군사 독재자였다’였다는 것을 지적한 뒤 ‘두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개정의 위험한 노력은 역사의 교훈을 좌절케 하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7)이 사설에 대해 한국 정부의 외교부와 교육부가 동시에 나서서 뉴욕타임즈의 사설 내용을 반박했다. 외교부는 ‘(박 대통령이 교과서 채택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설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했고, 교육부도 뉴욕타임즈가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을 ‘동급’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박 대통령은 사설에서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한국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외국의 일개 언론사 사설에 대해 정부 부처가 둘씩이나 나서서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해명성 논평을 낸 것이 적절한지는 접어두더라도, 이러한 반응은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없다.8)사후약방문 식으로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주무부서 탓으로 돌리는 정부의 반박이 과연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교학사 교과서에 쏟아진 비판의 화살이 친일 미화와 필자들이 취한 식민지 근대화론에 모아졌고, 그 교과서를 정부가 검정 과정에서 무리하게 통과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과거사 인식에 대해 취하고 있는 강경한 비판 입장과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취한 입장은 양립하기 어렵다. 정부의 반박이라는 것이 고작 사실적 근거와 사설 내용이 입각한 소재 취급의 불균형성을 문제 삼는 데 머물고 있지만 뉴욕타임즈의 사설은 곤혹스럽게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뉴욕타임즈의 사설은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의 역사 인식을 그들의 가정사와 연결시켰지만 그것이 사실은 동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가 가진 보다 구조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역사 인식의 격세유전이 가능하게 된 뿌리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 분쟁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가진 고유한 모순과 한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존 다우어의 지적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존 다우어는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상호의존이 심화된 동아시아 지역이 군사안보적으로는 가장 취약하며 불안정한 원인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전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한·중·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집단적 평화를 추구했어야 할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이 미국의 대소, 대중 봉쇄라는 냉전 전략 아래 종속됨으로써 완전한 과거 청산과 진정한 평화 만들기라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특히 미국은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을 대소, 대중 봉쇄를 위한 하위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 청산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게다가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과 중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에서 배제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집단적이고 진정한 평화는 애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9)
그의 분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탈냉전 이후 일본은 자기 영토의 사방에서 주변국들과 ‘영토 분쟁 중’이다. 일본은 동남쪽 끝에서 미국과 오키나와 기지 반환 문제를 남겨두었고, 북쪽에서는 홋카이도 북쪽의 북방 4대 도서를 두고 러시아와 영토분쟁 중이다. 서쪽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는 중국과의 사이에 센카쿠(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를 둘러싼 분쟁이 점차 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영토 분쟁은 냉전기에는 수면 하에 잠복되어 있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 탈냉전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재조정이 현안이 되자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존 다우어에 의하면 미국이 일본을 자신의 하위 군사파트너로 이용하려 하는 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은 불필요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일본 재무장을 촉진하기 위해 과거 일본의 악행과 이에 따른 한국, 중국 등의 수난을 축소, 은폐했다. 결국 일본이 제국주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서 한·중과 일본 간의 과거사 논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국내정치적 이유들, 과거사 문제를 국내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각국의 내부 사정이 겹쳐 과거사 문제는 동아시아의 집단적 평화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의 하나가 되었다.10)
 
 
이 글의 제목은 한 문학평론가의 칼럼에서 따왔다. 글머리의 인용은 그가 자신이 겪은 유신체제와 젊은 세대가 느끼는 유신체제 사이에 가로놓인 역사적 감수성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젊은 세대가 가진 역사적 무감각증과 맹목성을 경계한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지적한 개인의 역사적 감수성은 한 사회의 역사적 감수성으로 확장해도 그 의미가 그대로 살아난다. 2014년 봄 한국 사회와 일본 사회가 ‘착취당하는 과거’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외교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조장하는 양국 정부. 역사 인식 문제를 두고 한국과 일본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해법은 과연 무엇일까? 이미 역사 문제가 선전과 선동의 정치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고, 양국 정부가 ‘역사 문제’를 ‘역사 전쟁’으로 바꿔 놓은 상태에서 과연 각국 또는 양국 국민들 사이에서 과거사를 정리하고, 역사적 화해를 시도하는 작업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우선 북한 핵 문제와 중국의 부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서 역사 문제를 뒤로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해온 미국의 적극적 중재에 의해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3국 정상이 마주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여전히 작동중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회의에서 논의될 삼각 공조가 과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지, 아니면 냉전시대와 같은 한·미·일 대 북·중이란 대립 구도를 강화하거나 북한 견제란 단기 목적을 위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사실상 지원하는 결과를 초래해서 한반도의 안보불안을 낳는 우를 범할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일이다. 일각에서는 여론의 반대로 연기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한-미-일로 확대해 은근슬쩍 넘기려는 움직임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는 만큼 이 회의는 이래저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11)이번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역사 문제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 평화라는 구조적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문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한·일 간에 역사 전쟁과 독도 영유권 분쟁이 격화하자 상대방을 향한 양국 국민들의 배외주의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그것은 한류의 위축과 혐한류(嫌韓流)의 확산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혐한류를 직접 행동으로 표출하는 ‘재특회’(在特會,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일차적이고 주된 공격 목표는 ‘자이니치’(在日, 재일코리안 일반을 일컫는 용어)이다. 재특회가 집단적인 의사표현의 방식으로 이용하는 ‘증오연설’(hate speech)은 재일 코리안들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게 만들 정도로 도를 넘고 있다. 역사 문제가 양국에서 불어대는 국가주의적 광풍에 휩싸일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을 약한 고리는 재일코리안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점 역시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12)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최근 일본 사회의 혐한류를 증폭시키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 전임대통령 이명박의 독도 방문이었다는 점이다. 이명박은 한국 대통령 중에는 처음으로 임기 말인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그의 독도 방문에 대해 한편에서는 대통령이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박수를 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려던 이명박 정부가 국내에서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등하자 갑자기 그것과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일회성 사안을 국민들을 향해 선전의 자료로 활용한 일본 정부와 일부 언론의 태도가 작용했겠지만 일관성 없는 대일정책과 국가 지도자의 신중하지 못한 인기몰이식 돌출행동이 오히려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대한(對韓) 여론과 감정을 악화시키는 빌미를 주었다. 당국자의 신중한 행동과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법과 탈법을 오가면서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위해 애썼던 정부와 여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0%대의 채택률을 기록한 것은 그 교과서가 워낙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정부의 검정 과정과 교과서 내용에 대한 시민사회, 학계, 교육계의 비판과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중세사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한국사 관련 학회들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검증을 통해서 두 차례에 걸쳐 서술 내용의 부실과 오류, 편향과 왜곡을 지적하는 공개 설명회를 가졌다. 역사정의실천연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참교육학부모회 등의 시민단체들은 교학사 교과서의 검증 과정이 가진 탈법성과 서술내용의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비판 여론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또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불채택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역사를 국내정치용 도구 또는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중단하고, 역사 문제와 역사 교육 문제를 둘러싼 쟁점들을 학계와 교육 현장의 논의를 통해서 해결하고 수렴할 수 있는 분위기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교과서 파동 이후 한국 정부가 취한 태도는 오히려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사실상 퇴출되는 것으로 파문이 종결되어가는 상황에서 정홍원 국무총리, 서남수 교육부 장관, 그리고 새누리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거론했다. 또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위한 사전조치라는 의혹을 살 만한 편수국 체제의 부활을 선언했다. 한국사 교과서의 상고사 부분에 재야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려 모색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를 옹호한다는 세간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정부가 상고사 분야에 국수주의적 해석을 투영함으로써 그러한 비판을 잠재우고, 그를 통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학계를 오히려 식민사학자 집단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역사 문제가 점점 더 논쟁적인 이슈가 되고, 정부와 권력이 이를 정치적 소재로 활용하려는 상황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점차 더 중요해지고 있다.

격화되는 한·일 양국 사이의 역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양국 시민사회의 역할이 한층 더 중요해졌다. 존 다우어는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대결이 완화된 동아시아 신질서를 만들기 위해 ‘권력 분점’이란 구호’를 제기했고, 그 성공을 비정부 민간 네트워크의 확산 여부에서 찾았다. 그것이 진정한 상호의존과 상호 이해의 핵심이고, 여기에는 시민단체(NGO)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관광과 대중문화와 같은 문화 및 교육 분야의 교류까지 포함되며, 이들이야말로 풀뿌리 차원의 협력과 통합의 기반이자 극단적 민족주의와 호전적 대립에 대한 해독제라는 것이다13)존 다우어의 제언이 아니더라도 양국의 시민단체와 역사가들은 역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 경험이 이미 있고, 그러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시민사회와 학계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지 않았더라면 일본 정부의 역사관련 3대 담화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직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90년 11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결성이다. 한국의 37개 여성단체와 개인이 모여서 결성한 이 단체는 이후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청하였다. 한국 내의 움직임에 호응해 북한과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면적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대협은 1993년 6월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와 NGO 포럼에서 북한, 필리핀과 연대하여 아시아 여성인권협의회(Asia Women Human Rights Council)와 함께 “일본군 성노예의 전쟁범죄: 해결되지 않은 아시아 ‘위안부’ 문제” 포럼을 개최하였고, “유엔이 성노예 범죄를 조사하고 국제 상설재판소를 설치해 줄 것, 세계인권회의가 현재의 여성인권문제 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같은 과거의 문제도 다룰 것, 일본은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질 것” 등을 명시한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국제적 연대 활동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었다. 1996년 제52차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특별조사관 보고서’는 “전쟁 중 군대 성노예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일본에 대한 조사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용어의 정의, 역사적 배경 등과 함께 3개국 정부의 입장 및 도덕적 책임, 권고 등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였다. 특히 일본 정부에 제시한 마지막 6개항의 권고문은 정대협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반영하였다. 또 1998년 8월 유엔인권소위원회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게이 맥두걸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전시 조직적 강간, 성노예, 노예적 취급 관행에 관한 특별 보고서”라는 제목을 가진 이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가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라는 법적인 근거를 밝히고, 피해자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권고했다.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운동은 2000년 12월 동경에서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 개최로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 천황에게 직접 그 책임을 묻기에 이르렀다.

역사교과서 분야에서도 한·중·일 3국 학계와 교육계, 시민단체의 활동을 통해 민간주도형 역사인식의 공유 모델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한·중·일 3국의 학자와 시민운동 단체들이 망라된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에 참여한 학자, 교사, 시민이 4년간 공동으로 노력하여 편찬한 󰡔미래를 여는 역사󰡕가 2005년에 세 나라 언어로 출간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시민연대 활동과 학계의 공동 노력은 양국 사회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은 물론 다른 아시아 국가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국제적 연대활동으로 확대되어 있다. 양국 정부는 역사 전쟁에 사회적 자원과 기회비용을 낭비하는 대신 이렇게 확대된 국제연대활동을 통해서 이룩한 상호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히고 확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문제와 역사 분쟁은 정부, 시민사회, 학계, 교육계가 각자 자기의 몫을 성실하게 해낼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양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역사 전쟁 도발을 멈추고, 역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시민사회의 활력과 역사적 상상력, 학계의 연구 활동과 교육계의 노력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한·일 간 또는 양국에서 역사는 단지 과거 사건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는 민감한 현재적 문제이다. 일국적 시야에 매몰되지 않은 채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한·중·일 3국의 시민사회, 학계, 교육계를 연결하는 연대의 강화, 교류와 협력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 걸쳐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 교육계는 역사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모든 기도에 대해서 비판과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으로 ‘역사 전쟁’을 ‘역사 문제’로 되돌리고, 역사를 통해서 자기 사회와 상대방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시도와 대안의 마련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1) 황현산, 「과거도 착취당한다」,「밤이 선생이다」, 난다, 2009, 12쪽

2) 「日언론 "한일정상 대면해도 軍위안부 진전 난망"」,「연합뉴스」 2014. 3. 22; 「사설: 한-미-일 정상회담과 한국 외교의 과제」,「한겨레 2014. 3. 17; 김당, 「'사면초가」' 아베의 활로, 박근혜가 열어주나」, 「오마이뉴스」 2014. 3. 22

3) “Politician and Textbook,” New York Times, 2014. 1. 13

4) 이종원, 「아베노믹스와 아베노틱스의 줄타기」,「한겨례」 2013. 6. 17

5) 2013년 4월 아베가 무라야마 담화에서 후퇴할 뜻을 비치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서 이를 ‘불필요한 국가주의’라고 비판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의 역사왜곡 움직임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사력 강화의 길을 닦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비판했다. “Japan’s Unnecessary Nationalism,” New York Times, 2013. 4. 23. 뉴욕타임즈는 핵안보정상회의를 코 앞에 둔 2014년 3월 초의 시점에도 「아베의 위험한 역사수정주의」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아베 총리를 압박했다. “Mr. Abe's Dangerous Revisionism,” New York Times, 2014. 3. 2

6) 김정인, 「'역사전쟁 2013'의 씨즌2 예고편, 교과서 국정화 논란」, 󰡔창비주간논평󰡕 2014. 1. 15, http://weekly.changbi.com/793

7) 앞의 “Politician and Textbook,” New York Times, 2014. 1. 13

8)「뉴욕타임즈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 역사 교과서 왜곡” 사설로 비판」,「한겨례」 2014. 1. 15

9) John W. Dower, “The San Francisco System: Past, Present, Future in U.S.-Japan-China Relations サンフランシスコ体制 米日中関係の過去、現在、そして未来,”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8, No. 2, February 24, 2014(http://japanfocus.org/-John_W_-Dower/4079). 한글 번역문은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1>, 󰡔프레시안󰡕 2014. 3. 18(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5485).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서 명명되었다. 이 조약들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하나는 2차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으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개의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으며 그 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10) 존 다우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으로 8가지를 꼽았다. 영토 분쟁, 역사 문제 외에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일본 내 미군 기지, 일본의 재무장,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일본의 ‘예속적 독립’이 그것이다. 그는 이들 부정적 유산이 현재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11) 권태선, 「아베의 일본에 대응하기」,「한겨례」 2014. 3. 25

12) 재특회 또는 넷우익의 실체와 행동양식, 그리고 증오연설이 야기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에 대해서는 야스다 고이치 저·김현욱 역,「거리로 나온 넷우익: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후마니타스, 2013(安田 浩一, 󰡔ネットと愛国: 在特会の「闇」を追いかけて󰡕, 講談社, 2012) 참고.

13) John W. Dower,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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