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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76호_박동천_선거제도 개혁과 민주주의의 제도화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5-04-13 10:03:43
  • 조회수 : 2789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정책과 노선을 인민의 뜻에 따라 정하고 시행하자는 이념이다. 그런데 이때 “인민의 뜻”이 무엇인지가 항상 문제다. 정치사회의 규모에 따라 인민의 수는 10억이 넘기도 하고,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적어도 수백만에 이른다. 더구나, 한 개인만 두고 보더라도, 그 사람이 원하는 바는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흔히 판단을 잘못하며, 그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깨달을 때가 많다.

다양한 개인들의 의사를 모아 하나의 인민의 뜻으로 통합하는 작업은 절차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인다면 그렇게 모인 의견을 공동체의 민의로 간주하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투표처럼 사전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경합하는 여러 의견들 가운데서 하나의 “민의”를 인공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민의”는 항상 틀릴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한 번 결정된 다음이라도 다시 이의제기가 허용되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재론의 여지가 열려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의제기와 재론 또한 일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네 음절 단어에 어떤 이상과 꿈을 담고자 하든지, 민의에 의한 정치라는 것이 실현되려면 이처럼 결정의 절차와 이의제기 및 재론의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 가지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대의제와 헌정주의라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진실이다.

대의제는 흔히 말하듯 간접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가령 스위스의 칸톤에서 그렇듯이, 어떤 중요한 사안에 관해 관심 있는 시민들이 모두 광장에 나와 토론을 벌이고 나서 투표로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결정을 시행하는 작업은 일정한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시행하는 와중에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한 선택과 판단들이 원래 시민들이 내렸던 결정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둘러싸고도 항상 시비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시민들이 번번이 모여서 토론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에게 위임만 받으면 위임받은 자들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위임받은 권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여지는 심지어 군주정이나 전체주의까지를 포함한 모든 정치사회에 본질적으로 열려 있다. 직접민주주의를 하더라도 주권의 위임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불가피하며, 위임의 메커니즘은 민의를 대변하는 통로, 다시 말해 대의의 제도를 통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절차에 의한 결정은 절차를 어기는 개인들 또는 집단들이 제재를 받는다는 전제가 충족될 때에만 애당초 의미를 가진다. 절차를 어기는 행위에 대한 제재가 안정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다시 세 가지 요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사적 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위법 행위에 비해 정치사회의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규칙을 어기는 반칙 행위는 사회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중대한 범죄라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인식하는 시민들이 실제로 필요하다면 무력을 들고 일어나 그러한 범죄 행위에 맞서서 싸운다는 자세가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는 물론 이렇게 들고 일어나는 시민의 세력이 범법자들의 세력을 실제로 누를 만큼 커야 한다. 이 세 가지 요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치사회의 기본 규칙, 즉 헌법적 원리에 관해 구성원 사이에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해야 하고, 이를 어기는 행위는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가 제재해야 하며, 만약 정부가 반칙 행위를 제재하지 못한다면 시민들이 직접 일어나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한국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혐오가 일반적으로 팽배하다. 정치에 실망한 시민이 혐오할 대상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과녁은 의회이기가 쉽다. 단적인 실례로, 세월호 문제를 처리한다고 할 때에도 자원외교와 관련된 의혹을 파헤친다고 할 때에도, 한국의 의회 즉 국회에서 법안이 제정된다든가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는 식으로 시작했다가는, 시행령의 조문들을 둘러싸고 또는 증인 채택을 둘러싸고 정쟁이 발생하고는 이내 용두사미로 끝나고 마는 광경을 보면, 정치에 희망을 걸기도 어렵고 특히 국회가 왜 있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틀림없다.

국회무용론에 은연중에라도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정도 수준의 정서에서 머무를 뿐 더 이상 생각을 전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노골적인 사람은 “독재가 차라리 낫다”고 선언하고, 발언 수위를 조금 안전하게 조절하는 사람은 “국회의원 수를 줄이자”고 주장하며, 그저 만만한 상대를 찾는 사람은 “지방의회를 없애자”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단순한 소외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심장에 문제가 있을 때 차라리 심장을 떼버리고 죽는 게 낫겠다는 식의 발언이 좌절감의 표현에 불과한 것과 같다.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지 인민 개개인의 다양한 의견과 가치와 열망과 소원들을 여과/수렴/융합/조정해서 하나의 공동의사로 번역해 내는 기능은 독재정이나 군주정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어전회의라고 부르든 쿠리아 레기스(Curia Regis)라고 부르든, 국가위원회라고 부르든 콩세유데타(Conseil d’État)라고 부르든, 혁명위원회라고 부르든 정치국이라고 부르든 훈타(Junta)라고 부르든, 의회라고 부르든 국회라고 부르든 팔리아먼트(Parliament)라고 부르든 다이어트(Diet)라고 부르든 콩그레스(Congress)라고 부르든 전국인민대표회의라고 부르든, 명칭은 다양하고 종류도 다양하며 체제마다 각기 마련해 놓고 있는 기구의 수와 층위도 다양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본질적으로 대의기구들이며 그만큼 “인민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때 붕괴한다.

정치가 실망스럽다는 것은 인민의 뜻이 정책에 제대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대의기구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정확히 같다. 그러나 대의기구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니까 차라리 없애자는 말은 항해중인 배의 엔진이 고장 났다고 엔진을 차라리 내다버리자는 말보다도 어리석고 무책임한 얘기다. 엔진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그때는 고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거나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정치사회의 대의기구는 제대로 작동하도록 고칠 길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정치사에서 인민 전체의 뜻을 헤아려서 상의하고 결정하는 형태의 대의기능은 제도화된 적이 없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지만 평화롭게 공동결정을 내린 다음에, 집행하는 측에서는 혹시 결정을 잘못 내렸을까 조심하고, 반대했던 소수파는 어쨌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협조하는 방식의 행동습관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이나 세종 등, “영명한 군주”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이견과 반대를 반역과 동일시하는 심성으로 쉽게 이어진다. 이순신의 영웅적인 승전보에서부터 강한 민족군대가 있었다면 일제강점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한탄을 거쳐 박정희 독재를 성공작으로 평가하는 개발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우두머리가 명령하고 나머지는 그저 따라가는 병영사회의 모델이 저변에 두껍게 깔린다. 여기에 덧붙여, 일부 학자들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현대에는 행정부와 관료제가 워낙 강력해지다보니 의회는 “고무도장이나 찍어주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 마치 필연적인 사실인 것처럼 광고하면서 정치적 좌절감을 확대재생산한다.

그런데 의회가 “고무도장이나 찍어주는 신세”라고 쳐보자. 그런데도 다른 나라보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정치사회가 있다면, 거기서는 대의의 기능이 그만큼 이뤄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스웨덴,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의 정치체들이 가장 안정적이며,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중부유럽 국가들이 뒤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나라들이 이들에 비해서는 외견상 사회내부의 갈등이 많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된 정치체제를 토대로 시민 개개인의 개성이 과거 어느 시절에 비해서도 잘 발휘되는 삶의 형식을 구가하고 있다. 의회를 비롯한 대의기구들이 그나마 최소한도로는 작동하고 있는 덕택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기구들은 의회만이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까지도 “인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의의 임무를 지닌다. “인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명분은 때로 선동이나 조작으로 여론을 만들어내는 구실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이처럼 타락한 형태는 정상적인 상태로 고쳐야 할 일이지, 타락의 여지가 상존한다고 해서 대의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정부 기구들은 모두 인민의 뜻을 대변해야 하지만, 대의의 메커니즘이 제도화되지 못한 곳에서 대의의 모범을 보여야 할 기구는 바로 의회다. 역사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인민의 요구가 아래로부터 분출할 때, 그 요구는 의회의 위상 강화 그리고 의회의 개혁이라는 형태로 정리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의 경우 1987년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대통령 선거를 제도화했을 뿐이다. 그 후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관료제와 사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와 국회도 대의의 기능을 충분히 잘하는 것은 고사하고 참아줄 만큼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관료제와 사법부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제도적인 원인은 첫 번째로 국회의 감시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의 감시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첫 번째 원인은 국회 안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집권세력이 감시기능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부의 권력이 무능하거나 부패할수록 무능과 부패를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방향으로 권력이 행사되기 쉽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회는 행정부가 무능과 부패를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할 때, 이런 시도를 감시하고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싸고 덮어주는 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의 지방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제도는 대단히 다양하다. 이 제도들 사이에 이론적인 우열 같은 것은 별로 없다. 가령 영국의 중앙의회와 미국의 연방의회는 전형적으로 일등당선제1)에 의해 선출되고, 프랑스 의회는 결선투표제에 의해 선출되며, 오스트레일리아 의회는 대체투표제, 아일랜드 의회는 선호이전식 비례대표제, 덴마크 의회를 비롯해서 유럽 나라 대부분의 의회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독일 연방의회와 뉴질랜드 의회는 보상식 비례대표제2)로 선출된다. 이 나라들은 나름의 역사 안에서 벌어진 내부적 논의 또는 투쟁을 거쳐서 현재의 선거제도를 갖췄다. 모든 나라에서 선거제도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일각에 있지만, 한국에서만큼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는 않다.

한국이 이런 나라들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다수의 횡포에 있다. 세월호 사고와 자원외교 의혹을 처리하기 위한 국회 내 논의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똘똘 뭉쳐서 진상조사를 방해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가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 여론조작을 시도한 사건, 그리고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민주통합당이 의혹을 제기한 이후 경찰이 조직적으로 수사를 방해했는지를 둘러싼 의혹을 다루기 위한 국정조사와 청문회에서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새누리당의 훼방 때문에 진상이 샅샅이 밝혀지지 못했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국회 의석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19대 총선거에서 획득한 정당득표율은 42.8%에 불과하다.
 
<표 1>19대 한국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 비율
 
<표1>에서 정당득표율과 실제의석(비율)은 2012년 4월 총선의 실제 결과다. “비례 배분”이라고 표시된 줄은 국회의석 300석 전부를 정당득표율에 비례해서 배분했다면 각 당에게 돌아갔을 의석수다. <표1>은 정당득표율이 3%를 넘은 정당만을 계산에 넣었고, 3%에 도달하지 않은 정당들은 배제했다. 그러므로 이 표에 나타나는 네 정당이 얻은 의석의 비율은 정당득표율에 비해 조금씩 높다. 득실이라고 표시된 줄은 이렇게 계산한 결과에 비해 현행 제도에서 각 정당이 입고 있는 의석수의 이득 또는 손실을 나타낸다.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일등당선제는 가장 큰 두 정당에게 유리하며, 제2당보다 제1당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설령 다수당이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상식과 규칙을 어기면서 횡포를 계속하다가는 억울한 사람들과 그들의 억울함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1987년 이전까지 그런 형국을 면치 못하여, 권력에 의한 탄압과 고문과 살해 그리고 저항세력의 시위와 폭동 등으로 폭력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결국 6월항쟁이 일어났고, 그러한 희생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한 덕분에 아쉬운 대로 현재와 같은 수준이나마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불과 40% 내외의 지지를 받는 새누리당이 지금처럼 횡포를 계속 부린다면, 한국 정치는 1987년 이전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려면 새누리당이 스스로 개심할 가능성에 의존하기보다 비례성의 왜곡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거제도를 고치는 것이 현명하다. 과반수 지지를 못 받은 제1당이 의석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횡포를 부릴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례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된다. 정치학자들은 보통 아일랜드의 선호이전식 투표제(STV)3)와 대다수 유럽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그리고 독일과 뉴질랜드의 보상식 비례대표제를 비례대표 선거제도로 분류한다. 선호이전식은 복수의 후보를 대상으로 유권자가 선호하는 순서를 적어 넣음으로써 미세한 선호도가 당락에 반영되도록 하는 제도인데, 대학총장 선거라든지 이런저런 이사를 선임하는 경우에 도입하면 바람직하리라고 보지만, 현재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의 횡포를 방지하는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비례성은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겠지만, 지난 70년 동안 의석 대다수를 차지해 왔던 지역구 의석을 한꺼번에 없애는 데 따르는 정치적/문화적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남는 대안은 보상식인데, 독일의 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표 2>독일 연방의회 의석분포 (2013년 선거 결과)4)
*득표율a: 전체 유효투표 중에서 각 정당이 얻은 정당득표의 비율.
**득표율b: 비례대표 의석 배분에 필요한 문턱(sperrklausel, threshold)을 넘지 못한 정당의
득표를 제외하고 나머지 정당의 득표 합계를 100으로 놓고 계산한 비율.
 
<표2>는 2013년 독일 연방하원(Bundestag) 선거 결과다. 득표율b는 의석배분을 위한 계산에 포함된 정당들 가운데서 각 당이 획득한 득표의 비율로서, 소수점 이하의 오차를 제외하면 의석비율이 여기에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제도는 비례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계산 장치를 이중으로 설치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하원의 의원 정수는 원칙적으로 598석이다. 이 중 299석은 지역구에서 선출되고 299석은 명부에서 선출된다. 598석은 인구 비례로 각 란트(Land)에 할당된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에게 한 표를 주고, 정당에게 또 한 표를 준다. 이후 의석 분배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뤄진다.5)

    1단계: 지역구 후보에게 던져진 표는 지역구별/후보별로 집계되어 일등이 당선된다.

    2단계: 정당에게 던져진 표는 란트별로 집계되어 정당별 득표율이 산출된다. 각 란트에 할당된 총의석에 정당별 득표율을 곱해서
    해당 란트에서 각 정당이 얻을 총의석을 계산한다. 이 의석수에서 해당 란트, 해당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를 뺀 만큼의 의석이 해당 란트,
    해당 정당의 명부에서 충원된다. 이때 만약, 득표율에 따라 한 정당에 할당된 의석보다 많은 수의 당선자가 이미 지역구에서 나왔다면,
    그 정당은 지역구 당선자를 모두 보유하게 되고 그 란트에서 선출되는 연방하원 의석은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이것을 초과의석
    (Überhangmandate)이라고 부른다.

    3단계: 이와 같은 계산에 따라 각 정당이 모든 란트에서 얻은 의석을 정당별로 합산한다. 이렇게 합산된 결과를 각 정당에게 할당될
    의석수의 최소기준점으로 잡는다.

    4단계: 한 정당이라도 3단계에서 얻은 최소기준점 아래로 의석수가 내려가지는 않도록, 그러나 각 정당이 최종적으로 얻게 될 의석수가
    연방 전체에서 각 정당이 얻은 정당득표율에 정확히 비례할 때까지, 의석이 득표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분배된 정당부터 의석수를
    늘여나간다. 2013년 선거에서는 이와 같은 계산을 통해서 총 33석이 추가되어 631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다.

초과의석은 란트별로 정치적 성향이 크게 다른 독일 특유의 사정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정리한 계산 순서 중에서 3단계 이후는 초과의석 때문에 발생하는 비례성의 미세한 왜곡까지 보정하기 위해서 2013년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한 새로운 선거법의 규정이다. 2008년에 이와 관련해서 독일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리기 전에는 2단계의 보상만이 시행되었고, 그 후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지금은 2단계와 4단계의 이중 보상이 시행되고 있다. 한국 국회에 이를 적용한다고 하면 초과의석의 발생은 우려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지역편차 때문에 혹시라도 초과의석이 발생할지 모른다면, 권역을 서울/중북부(경기,인천,강원)/중남부(대구,경북,대전,충남북)/남부(부산,울산,경남,광주,전남북,제주) 등 4개로 나누면 된다. 따라서 독일처럼 3단계 이후의 복잡한 계산은 불필요할 것이다.

이 제도는 지역구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에 덴마크나 네덜란드 등지의 전통적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다르다. 그렇지만 의회의 전체 의석을 정당별 득표율에 비례하도록 계산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의 제도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손색이 전혀 없는 비례대표제 그 자체다. 한국은 현재 300석 가운데 54석, 일본의 중의원은 480석 가운데 180석만을 비례대표 계산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한국의 246(82%)석과 일본의 300석(62.5%) 등 의석의 대부분에서는 비례성의 왜곡을 피할 길이 없다. 통상 한국에서는 이를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고 부르며, 줄여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독일식이라는 한정사를 붙이면 틀린 용어는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고유명사가 붙지 않은 명칭이 나을 것이다. 특히 이를 줄여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고 불러버리면, 이 제도의 특색이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따라서 보상식 비례대표제(Compensatory System)라고 부르기를 나는 제안한다.

마침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역구 200석과 명부 100석을 권역별로 선출하는 형태로 보상식을 제안했다. 심상정 의원은 의석을 60석 늘려서 240:120석으로 하는 안을 제안하고 있다. 지역구를 46석 줄이려면 지역구 출신 의원들의 완강한 반대를 뚫어야 할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전통적 공간 개념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역 정치인이 국회의석을 늘리자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만도 획기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비례대표 의석이 지역구의 절반밖에 안 되기 때문에 비례성이 충분하게 보상되지 못할 여지가 남으며, 초과의석이 발생할 확률도 약간이나마 높아질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보상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지역구 246석과 명부 246석으로 의석을 늘리며, 당선자 배분은 권역별로 하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선관위 안이든 심상정 안이든 만약 2016년 선거에서부터 시행될 가망이 있다면, 현행 제도보다는 훨씬 개선된 제도라는 점에서 나는 찬성이다. 관건은 여론에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에서 현역 의원들은 가급적이면 선거제도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 기존 선거제도에서 당선이라는 최대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상유지를 자연히 선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제도 개혁은 국회의원들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인 압박이 국회를 향해 가해질 때에만 성사될 일이다. 반면에 여론의 분수령은 의외로 금세 넘어갈 수 있다. 국회의 대의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헌정주의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첫 번째 열쇠이며, 국회의 대의기능은 선거의 비례성을 높이면 강화된다는 진실이 시민들에게 충분히 전파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거제도에 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인민주권의 수임기관으로 재탄생한 시기와 겹친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비교적 최근에 시작한 일이듯이, 보다 나은 선거제도를 향한 동경과 탐구도 시작한 지 이제 불과 2백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발전 그리고 그 중의 한 갈래인 선거제도의 발전은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보다 앞으로 전개될 역사가 내용면에서 훨씬 풍성하리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실제로 매순간 세계의 여러 나라 중 어느 곳에선가 새로운 방식의 선거제도가 고안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선자 결정방식만도 새로운 고안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명부 작성방식이라든지, 비례대표 의석 분배 계산방법, 투표편의 제공방법, 등등 수많은 측면에서 무한한 개선과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 아울러 선거는 각국의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에서도 치러져야 하며, 주식회사나 협동조합이나 대학이나 병원 등 각종 조직체의 임원을 선출할 때도 다양한 선거방식이 채택될 수 있고, 나아가 복수의 정책 대안 중에서 다수의 선호를 확인할 때에도 선거의 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선거제도에 관한 관심이 일반인은 물론이고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낮은 까닭을 따져보면, 선거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게 별로 없으리라는 일반적인 무력감도 작용하겠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인구 대다수가 선거제도의 다양한 형태들에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라고 하면 으레 일등당선제를 생각하는 빈곤한 안목이 동시에 상상력의 확장을 가로막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대다수는 지역구 일등당선제로 뽑고 54석(18%)을 “비례대표”라는 이름으로 채우는 제도는 비례대표제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대의기구는 언제나 인민의 축소판이어야 한다. 지도가 산과 계곡, 강과 호수, 숲과 평야, 도시와 읍을 표시하듯이, 의회 내의 의견들, 열망들, 소원들은 원본에 정확히 비례해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문장으로써 미라보 백작(Honoré Mirabeau)이 비례대표의 이념을 요약한 것이 이미 1789년이었다.6) 다시 말해, 본래 비례대표의 이념은 의회 의석 전부가 유권자들의 선호에 비례하도록 만드는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서부터 에스파냐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 가까울수록 비례대표제를 일부 의석에만 채택한 나라는 없다.

하지만 한국, 일본, 대만, 타일랜드, 우크라이나, 조지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헝가리, 멕시코 등, 많은 나라가 일부 의석에만 비례대표 계산을 적용하고 있으니, 이 제도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례대표제의 본래 취지와는 다르더라도 부분적으로 응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국회를 이런 방식으로 선출한다고 해서 모든 광역의회와 지방의회도 한결같이 이 방식으로 뽑아야 하는 것일까? 국회의원 선출방식은 접어두더라도, 지방의회 선거를 모두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획일화한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다양한 제도 중에서 최선의 방식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방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규칙을 정한 결과로 보인다.

애당초 지방정부 선거방식을 국회가 법률로 정한 것부터가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초등학교 반장을 그 반 학생들이 선거로 뽑는다면, 당연히 선거의 규칙도 그들이 정하도록 해야 민주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자세일 것이다. 지방의 주민들이 자치를 하기 위해 단체장과 의회를 선거로 뽑는다면, 당연히 선거 방식도 그들이 스스로 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교과서적 원론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각 지방에서 선거제도를 20여 년 전부터 스스로 고안해서 채택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지금쯤엔 이 나라 안에 매우 다양한 선거제도들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7)그리고 지방선거에서 다양한 선거제도를 실시해본 경험은 더 나은 선거제도를 찾아내고 고안할 수 있는 안목의 배양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회의 대의기능이 향상되어야 한다. 국회의 대의기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지지도에 비례해서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현행처럼 300석 가운데 18%인 54석을 선출할 때 비례대표 계산을 적용하는 것은 의석의 비례성을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비례대표의 원래 취지에 맞게, 의석 전부를 비례대표 계산으로 배분해야 한다. 비례대표제 중에서도 특히 현재 독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보상식 비례대표제가 한국의 현실에서 상당한 적실성을 가진다.

선거제도 개혁은 현역 의원들로서는 기껏해야 마지못해 동조할 정도의 의제다. 따라서 국회 바깥에서 개혁을 향한 광범위한 여론이 일어나 국회를 압박하기 전에는 성사되기 어렵다. 한국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향한 여론은 이제 조금씩 일어나는 조짐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시민들에게 선거제도 논의는 생소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제도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다양한 선거제도에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논의와 병행해서, 지방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방식은 각 지방의 자치적인 결정에 맡기도록 관련 법률들이 개정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선거제도의 탐구와 개발은 최근 2백여년 정도의 일이다. 그만큼 장차 무궁한 발전 가능성이 내재하며, 더 나은 선거제도가 고안되어 채택되는 곳에서 민주주의도 그만큼 발전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지방선거는 새로운 선거제도가 개발되어 실험된다는 점에서도 민주주의의 학습장 역할을 맡고 있다.
 
1) 현행 대한민국 국회의 지역구 선거가 바로 일등당선제(FPP:First-Past-the-Post)다. 한국어로는 흔히 소선거구제라고 부르지만,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더라도 결선투표제(TRS:Two Round System)도 가능하고 대체투표제(AV:Alternate Vote)도 가능하기 때문에, 일등당선제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2) 이 명칭 및 작동원리에 관해서는 아래서 논의할 것이다.

3) 영어 명칭은 Single Transferable Vote이다. 전통적인 한국어 문헌에서는 영어 명칭을 단순히 직역한 일본어 번역을 따라서 단기이양식(單記移讓式)이라고 부르지만 (참고로 중국어 번역은 可轉移單票制다), 여기서 단기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21세기 한국어에서는 지나치게 한문 투라서 어감이 전달되기 어렵다. 따라서 선호이전식으로 부르는 편이 소통을 위해 낫다고 판단된다.

4) Wikipedia, “German Federal Election, 2013”, http://en.wikipedia.org/wiki/German_federal_election,_2013 (검색일, 2015. 4. 3).

5) Wikipedia, “Bundestagswahlrecht”, http://de.wikipedia.org/wiki/Bundestagswahlrecht (검색일, 2015. 4. 6).

6) Hoag, Clarence Gilbert Hoag and George Hervey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New York: Macmillan, p. 162.

7) 참고로, 일등당선제의 본산지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영국에서도 스코틀랜드 의회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북아일랜드 의회는 선호이전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등, 영국의 주요 선거에서 사용되는 선거제도는 대략 6가지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