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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91호_박태균_한일양국 시민 사회, 지난 70년 동안 잃어버렸던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5-08-10 10:03:35
  • 조회수 : 2326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기본적 요인은 194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외세의 논리가 동아시아에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1945년과 1965년 과거의 불행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외세의 논리와 그에 편승한 기득권 세력들로 인해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 70년이 지난 지금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 외세의 논리에 편승한 정부 대신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공적 외교를 강화해야 하며, 정치적 현안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서로 분리시켜야 한다. 시민 사회는 공적 외교와 과거사 문제를 장기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한일협정을 맺은 지 50년이 되는 올해,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양국 정상이 서로 상대방 국가에 있는 대사관에서 개최한 만찬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 참석이 마지못해 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하나도 없다. 50주년만 그런 것이 아니다. 10주년이었던 1975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문세광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20주년이었던 1985년에는 독도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30주년인 1995년은 그런대로 넘어갔지만, 2005년의 40주년은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불거졌다. 한일 양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불행했던 과거사를 넘어서 희망의 미래를 열겠다고 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희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양국 사회는 상대방 지도자의 약점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한일협정은 당사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체결되었다. 그리고 그 때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보자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강대국들의 논리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내부의 주체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이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1945년 이후 탈식민지 과정이 지연 또는 왜곡되었다면, 일본의 경우 제3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길 자체가 봉쇄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문제의 시작은 1885년의 텐진조약과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조약들은 한국이 전근대적 중국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강대국 질서에 편입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자유주의적 길이라는 선택지가 없어지면서 제국으로 나아가는 일방적인 길만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일본에게 거대한 재앙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면서 동시에 패전국으로서 일본 열도는 심각한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과 일본이 불행했던 과거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국가를 수립하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본은 무한팽창을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정책을 반성하고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은 19세기 말 동북아시아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경험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정치적으로 제3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이는 마치 1945년 직후 오스트리아가 나아갔던 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첫번째 기회는 1943년 카이로 선언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카이로 선언에서는 ‘노예상태에 있는’ 한국의 독립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이 미래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패전국인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분리하는 것이 그 근본적인 목적이었을 뿐이었다. 이 점은 일본의 점령 하에 있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유렵과는 달랐던 아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전례를 따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모든 공약은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또 한 번의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하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웠던 독립운동 세력들의 공헌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1945년 8월17일 미국 정부에서 승인하고, 소련의 스탈린이 수용한 일반명령 1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지역에서 항복을 받아야 할 주체를 규정한 일반명령 1호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던 어떤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항복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미군과 소련군, 그리고 중국군과 동남아시아 연합군사령부가 그 주체였다. 게다가 4년 후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동남아시아 연합군사령부가 사실상 미국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반명령 1호는 미국과 소련의 아시아 정책이라는 틀 안에서 한국과 일본의 미래가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고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남아시아의 구식민지 국가들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았지만, 한국은 배상은커녕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동남아시아는 식민지가 아니라 전쟁 중 점령지역이었다는 점이 법적으로 고려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점은 중국과 만주라는 경제적 배후지를 상실한 일본에게 동남아시아는 사회경제적 재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다는 사실이었다. 반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에 대한 배상은 모든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반대하는 것이었다. 만약 일본이 배상한다면, 다른 구 제국주의 국가들도 자신들의 구 식민지에 배상을 해야만 했다. 일반명령 1호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의 대일투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는 더더욱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기원은 카이로선언에서부터 일반명령 제1호로 이어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강대국들의 정책을 반영한 것이었다.1)

한국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후 계속된 정전체제로 인해, 일본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의 전쟁특수로 인한 경제성장을 통해 1945년 이전의 문제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한국은 분단 이후 냉전의 각축장이 되어 탈식민화의 과정이 연기되었고, 일본은 1955년 자민당 중심의 체제가 성립되면서 제3의 길이 봉쇄되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미국의 전략에 의해 원자력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역시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불행의 한 요소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기회는 1965년의 한일협정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1945년 이전의 불행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이는 양국이 첫번째 기회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관계 속에서 미래의 길을 스스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도, 일본도 모두 미국과의 동맹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지만, 한국은 남북관계에서, 일본도 북일관계와 중일관계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발휘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2)

그러나 이 기회 역시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것은 한일협정의 동력 자체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비롯되었고, 한국과 일본 역시 강대국의 이해관계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은 케네디 행정부의 새로운 대외원조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스스로의 보수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미일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일본은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한일협정에 소극적이었으며, 1945년 이전의 불행했던 과거의 문제를 청산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3)한일협정의 당사자들은 이 협정을 계기로 해서 상호 간의 이해를 심화해나가는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국 한일협정에서는 양국 정부는 1945년 이전에 있었던 한일 간의 조약에 대해 일치된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주지하듯이 한국 정부는 을사늑약(1905)과 강제병합(1910)이 모두 그 자체로서 무효라고 봤던 반면, 일본은 두 조약이 모두 합법적인 조약이었지만,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인해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상호 간에 서로 다른 인식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하는 이상한 이름을 만들어냈고, 개인에 대한 배상이 청구권 자금 안에 포함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반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청구권 자금에 대한 규정은 1945년 이전의 두 조약이 그 자체로서 무효일 경우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한국과 일본은 현재까지도 역사 인식에 있어서 갈등을 빚고 있다.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에서 체결된 한일협정을 통해 개인에 대한 모든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전쟁 중 점령국과 식민지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주장이다. 최근 중국과 미국의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게는 보상을 하면서 한국인 징용자들에게 보상하지 않고 있는 미쓰비시의 태도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4)

실상 한일협정이라는 두 번째 기회에서는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해 주었어야 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조선에 있었던 일본의 사적 재산에 대한 보상은 1945년 12월에 선포된 미군정 법령 33호로 인해 발생된 문제였고, 독도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초안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수정된 최종본에서는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한 중재를 해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들을 양국 간의 문제만으로 치환했다.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약점과 문제를 노출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고,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한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더 유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는 달리 국제법적으로 모든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국제법을 만드는 주체의 하나로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부터 시작되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완성되는 현재 동아시아 체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강대국의 논리가 그대로 투영된 상태에서 탈식민의 과정이 지연되었고, 커밍스의 주장처럼 1945년 이전의 구조가 1945년 이후 다시 부활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실 현재와 같이 중국이 부상하고 있고, 이에 대응하여 미일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 지역에 강대국의 논리와 질서가 더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중재자 또는 균형자로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한일관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었던 1945년과 1965년으로부터 70년,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 두 사회는 이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만 독자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국과 일본은 독자적으로 세력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상 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쉽지 않다. 이들은 또한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아 왔다. 50년이 넘도록 지속된 자민당 체제를 변화시킨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가 낙마한 것도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옮기려는 시도 때문이었다.5) 그만큼 두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갖고 있는 힘은 공고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의 건설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시민사회밖에 없다. 시민사회는 사회적 공감대를 바꾸어 가야 한다. 주도권과 대결, 그리고 갈등을 앞세운 강대국의 논리에 맞서 홀로서기에 기초한 협조와 공생을 위한 방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현재의 한일관계가 악화된 것도 과거사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사는 하나의 수단과 명분에 불과하다. 역사 인식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강대국의 논리에 편승하고자 하는 현상 유지 세력들의 논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그러한 논리에 휩쓸려 가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한일관계 문제와 과거사 문제를 분리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과거사 문제는 강대국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그리고 양국의 주류 세력들에 의해 단기간에 졸속적으로 처리한다면, 이로 인해 다시 한번 1965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어렵겠지만,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 주도 하에서 강대국의 논리에 편승하지 않는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공공 외교가 필요하다. 정부가 개입하는 순간 공공 외교는 무너지고, 시민사회는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을 통해 지속적, 장기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위안부 문제로 일본 정부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과연 자료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한국 정부와 시민 사회의 주장은 세계 시민사회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는가?

양국의 시민 사회는 지난 70년 동안 잃어버렸던 제3의 길을 되살려야 한다. 시민 사회는 정부로부터 떨어짐으로서 상대 시민사회와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 양국 시민사회의 주장은 또한 세계 시민사회의 보편적 정서로부터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카이로 선언에서부터 일반명령 제1호,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한일협정으로 이어진 강대국 주도 하의 논리를 벗어나 평화에 기초한 미래 번영의 양국 관계를 개척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또 다른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하려면, 또 다른 후쿠시마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1) 이상 졸고,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창비, 1, 2장 참조.

2) 한국은 2000년, 일본은 2002년, 각각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에 있어서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준 경험이 있다.

3) 이상 졸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4, 5장 참조.

4) 경향신문 2015년 7월27일자 참조

5) http://insidetheworld.net/article/view.php?bbs_id=news&doc_num=9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