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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11호_유종일_20대 총선의 역사적 의미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1-04 10:15:35
  • 조회수 : 2086
본고는 2016년 새 해를 맞아 대한민국이 어디에 서 있고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지 점검하면서 다가오는 20대 총선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해보려는 시도이다. 역사적 과제라는 면에서는 지난 2012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 당시와 다름없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여전히 핵심과제이다. 문제는 말만이 아니라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진정성과 유능함 갖춘 정치세력의 부재이며, 이러한 정치세력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양당에 의한 독과점 정치구조다. 20대 총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합의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대 총선이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과연 이번 선거에서 국민은 무엇을 놓고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도 매우 불투명하다. 여당은 여당대로 공천을 둘러싸고 친박과 비박 간에 힘겨루기가 한창이고, 야당은 공천권 갈등이 극에 달해 탈당 사태가 이어지며 아예 파열 상태로 가고 있다. 여야가 모두 무엇을 위해 의석을 요구하는지 분명하지가 않고, 유권자들이 그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더더욱 분명하지 않다. 총선전야는 어수선하기만 하고 국민은 과연 주권자로서 나라의 미래 방향에 관한 진정한 선택권을 가진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은 매우 중요하다. 변화의 전망이 밝아서가 아니라 변화의 필요가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리에게 지금 어떠한 변화가 요구되는지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20대 총선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경제의 침체와 불확실성, 정치적 갈등과 분열, 사회적 불신과 불안이 극에 달해 있다. ‘헬조선’이라는 절망의 언어가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

재벌 대기업 위주의 성장전략으로 일자리 부족이 만연하여 청년들은 취업난에 시달리고 자영업은 과포화 상태에서 빈사상태에 놓여 있다. 대기업의 이익은 큰 폭으로 늘어도 노동자의 임금과 가계소득은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일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기득권이 공고화된 결과, 국민의 80%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상승은 불가능"하다고 믿을 정도로 불공정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n포세대라고 자조하며,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오르는 월세감당하기도 힘든 서민들은 생존투쟁의 전선에서 헉헉대며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없는 형편이다.

민생을 죽이고 경제가 살 수는 없다. 구조개혁은 뒤로 하고 무리한 경기부양에만 매달린 결과 정부·기업·가계가 모두 산더미 같은 부채만 짊어졌고,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가운데 다가올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국론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공안탄압으로 억누르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정부정책에 반대하여 시위를 하는 국민을 테러집단으로 몰아가는 대통령과 정부의 막장 통치는 세계인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급기야 뉴욕 타임스 지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설을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는데, 정치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고 있다. 거대여당은 민의에 입각해서 정부를 견제하기는커녕 대통령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며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성마저 집어던져버렸고, 거대야당도 아무런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이전투구에 날을 새고 있다. 이로써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커지는 가운데 기득권 세력은 남몰래 득의의 미소를 머금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세력들이 서로 다른 미래를 약속하고 경쟁한다면 선거는 미래를 선택하는 행복한 선거가 된다. 하지만 집권세력이 약속을 어기고 무능을 노정하면 과거를 심판하는 착잡한 선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집권세력 못지않게 야당도 믿기 어렵고 무능하다면 ‘울며 겨자 먹기’식 불행한 선거가 된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의회권력과 행정권력을 장악했지만 집권 이후 이 공약들은 점점 축소되었고 급기야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오히려 재벌특혜와 의료민영화에 관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기업활력제고특별법이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그리고 비정규직 오남용을 부추기고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여 지금도 OECD 최악인 고용안정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되는 노동관련법 개정 등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정책뿐만 아니다. 국민통합을 내세웠으나 오히려 갈등을 부추겼고, 신뢰의 정치와 소통을 주장했으나 말 뒤집기와 일방통행이 일상화되었다. 청와대의 수직 통제 아래서 자율적 정책 추진의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정부 부처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복지부동으로 일관했고,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통해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을 노정했다.

사정이 이럴진대, 다가오는 총선은 당연히 야당을 선택하거나 여당을 심판하는 선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야당이 믿음을 주고 대안을 제시하면 야당을 선택하는 선거가 되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적어도 여당보다는 낫겠다고 판단되면 여당을 심판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국민들의 눈에 지금의 야당은 여당보다 나을 게 없는, 아니 오히려 더 문제가 많은 집단으로 보이고 있다. 여당에 비해 현저하게 뒤지는 지지율이 이를 증명한다. 오죽하면 이번 선거는 야당을 심판하는 선거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정부여당이 핵심공약마저 뒤집어버림으로써 정치 불신을 증폭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과연 야당이 집권했으면 얼마나 달랐을까? 국민의 입장에서는 야당에 대해서도 불신이 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재벌개혁과 부동산 투기 근절을 내세웠던 노무현 정부가 결과적으로 매우 친재벌적인 (특히, 삼성그룹에 막대한 특혜를 주는) 정책을 펼쳤고, 부동산 값의 폭등을 초래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미FTA와 영리의료 등 과거 집권 당시에 추진했던 주요 정책을 야당이 되자 특별한 설명도 하지 않고 입장을 바꿔 반대하고 나서니 어떻게 그들의 정책적 입장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정책적 입장은 기회주의적으로 조변석개하면서, 미래의 비전과 정책 개발은 뒷전이고 공천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는 야당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혁신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보면 야당은 여당보다도 못하다. 언필칭 혁신을 입에 달고 사는 야당이지만 수없이 만들어진 혁신안을 한 번도 실천한 적이 없고, 아무런 소신도 헌신도 없이 기득권을 누리며 정치해온 인사들과 부패와 갑질로 얼룩진 인사들이 퇴출되기는커녕 서로를 감싸며 요직을 나누어 맡아왔으니 어떻게 그 진정성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야당이 신뢰를 잃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연이은 패배를 겪으면서도 ‘기울어진 운동장’ 탓이나 하며 제대로 된 평가와 반성조차 하지 않은 데 있다. 그러니 책임도 제대로지지 않고, 혁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여당은 소수 부유층과 특권층의 편이고 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편이라면, 머릿수를 기준으로 경쟁하는 선거에서는 야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야 한다. 여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주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선거지형이 야당에게 유리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며, 실제로 교육감 선거에서는 압도적으로 진보성향 후보들이 승리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새누리당이 당의 존립을 걱정하며 당명과 색깔을 바꿔야 했을 정도로 유리했던 국면에서 온갖 퇴행적인 공천으로 선거를 망친 19대 총선 이후에도 평가와 책임을 극구 회피하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던 소위 ‘친노 세력’의 행태가 이후의 선거에서도 거듭 반복되면서 야당이 신뢰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이고, 오늘날 탈당과 분당 사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12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 당시에 모든 주요 정치세력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주장하면서 이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발전단계가 이를 요구하는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국가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했고, 그 결과 급속한 산업화와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경제구조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정경유착과 관치경제, 재벌독점과 노동탄압, 지역간·계층간 불균형 등 심각한 경제왜곡과 모순을 만들어냈으며, 만성적인 인플레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하여 반복적으로 경제위기를 맞기도 했다. 정치적 억압과 더불어 경제적 모순의 심화는 결국 군사독재정권의 종언을 불러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개발독재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화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때 성립된 민주주의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나 한 표만 더 받아도 모든 권력을 얻는 승자독식 ‘다수제 민주주의’였다. 이 시대에 경제정책의 사조에 있어서는 개발독재 하의 국가주도 관치경제를 민간주도 시장경제로 개혁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이는 분명 필요한 개혁이었지만 동시에 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벌과 같은 경제권력을 규제하며 노동자와 같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재벌개혁, 노동권 강화, 복지와 재분배 등 경제민주화 요구는 힘을 받지 못하였고, 시장개혁이라는 미명으로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 정책이 득세하였다. 특히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러한 정책이 전면화되었고, 한미FTA로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장화의 길을 내달은 한국경제는 근본적인 모순에 봉착했다. 재벌은 문어발 확장에 열을 올리는데 골목상권은 붕괴되고, 대기업 이익은 폭증하는데 임금과 중산층 이하 가계소득은 뒷걸음질 치고, 경제는 성장하는데 대다수 국민의 삶은 팍팍해졌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도로 불행하고 청년은 희망을 잃은 나라, 중장년층은 장시간 노동에 허리가 휘면서도 고용불안과 노후불안에 시달리는 나라, 노인들은 압도적인 빈곤률과 자살률 통계가 보여주듯 삶을 지탱하기도 힘든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국민들의 인식에 대전환이 왔다. 이제는 제발 성장에만 올인하지 말고 분배도 좀 하고 복지도 좀 하자는 것이며, 1% 특권층을 위한 경제가 아닌 99%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경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며, 시장만능주의와 친재벌주의를 넘어서 경제민주화를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2012년의 국민적 합의였다.

이렇게 한국의 현대사는 개발독재 하의 산업화, 다수제 민주주의 하의 시장화 단계를 거쳐 경제민주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공약을 파기하고 역주행을 하고는 있으나, 경제민주화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정권에서 결정적으로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제민주화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상당한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개될 것이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는 경제민주화 논쟁을 더욱 첨예하게 부각시킬 것이다. 20대 총선에서도 여전히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중심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최근 야권은 소득주도성장론이나 공정성장론 등을 내세워 성장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결국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중도지향적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주제의 편곡이기는 마찬가지다. 여당은 비록 박 대통령의 역주행을 감싸 안아야 하고 ‘보수혁신’을 주장한 유승민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결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정면으로 부인하지는 못 할 것이다. 아마도 경제위기를 부각시켜 속도조절과 미세조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고용창출을 내세워 성장지향적인 정책을 옹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경제민주화를 이루기는커녕 시장만능주의 정책이 강화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주요 정당들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외치고, 이를 최고의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도 종국에는 역주행으로 가버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여든 야든 무엇을 내세워도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세세한 이유를 따져보면 많은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근본적인 이유를 다수제 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에서 찾는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를 이루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국민의 인권과 정치적 자유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매우 저급한,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정치란 무릇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갈등을 봉합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정치가 되어버렸다. 독재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권력싸움 위주의 정치문화가 형성된 데다가,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 직선제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등 정치제도가 승자독식 제도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을 만들어내고 갈등을 조정하는 생산적인 정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지역주의를 근거로 기득권화 한 양대 정치 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이 지배하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양대 정당은 승자독식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를 무기로 제3세력에 의한 정치적 경쟁을 배제하고 정치권력을 독점적으로 누려왔다. 실제로 현행 선거제도 하에서는 양대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약 천만표가 사표로 전락하여 민의가 왜곡되어 왔다. 양대 정당이 겉으로는 서로 권력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독점적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시장이 독점화되어 유효경쟁이 사라지니, 아무리 국민의 비판과 질책이 커도 저질 정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공적 가치에 헌신적이며 유능한 인재보다는 당 실력자들에게 유용한 인사들이 공천을 받고, 정치인들의 줄서기 행태가 반복되며, 저질 정치인이 양산되고 있다. 

양당 독점구조에서 양당은 모두 특정 사회집단과 이념보다는 국민전체를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며 (catch-all party), 정책적 입장은 선거전술 상의 이미지 정치와 립 서비스 전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식의 정치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고 기득권 세력의 영향력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뒤로 물러나고 시장에 모든 걸 맡긴다고 하는 정책, 즉 경제 권력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장화 일변도의 정책이 득세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 정치의 두 축을 이루는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다. 양당의 정책적 차이는 대북정책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지적한 사실이다. 양대 정당은 지역할거주의를 활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다수제 민주주의’ 아래서 주거니 받거니 권력투쟁을 벌여온 것이다.

승자독식 선거제도에 기반을 둔 양대 정당의 권력 독점을 깨부숴야 비로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정치적 기반이 형성될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전면적으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승자독식을 구조적으로 방지하고, 정당 간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 비례대표제로 사표를 방지하고, 일반 시민은 물론 사회경제적 약자나 소수자들까지 포함하여 민의가 골고루 대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양당구조는 무너지고 다당구조가 형성될 것이며, 대화와 타협에 의한 연합정치가 일상화될 것이다. 이것이 합의제 민주주의이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정치적 기반이다. 서구의 모든 복지선진국들이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개발독재 아래서 산업화를, 다수제 민주주의 하에서 시장화를 이루었다. 이제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는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과연 20대 총선은 이러한 역사적 과제에 응답하는 선거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정치권에서는 합의제 민주주의가 전혀 거론조차 되고 있지 않으며, 선거구 획정을 위한 여야협상에서 전체의석의 18%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존재하는 비례대표 의석을 더욱 줄이자는 데 여야가 공감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러한 기대는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희망의 근거는 있다.

첫째, 여야협상 과정에서 연동형 비레대표제가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연동형 혹은 보상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석에서 정당득표율과 차이가 발생한 것을 비례대표 의석 배분에 의해 보상해주는 방식으로 승자독식의 폐해를 상당히 보정해줄 수 있는 제도이다. 이는 정의당의 요구였고, 정의당과의 선거연대를 의식한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채택이 되지 않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공식 의제로 논의된 것은 고무적이다.

둘째, 더욱 중요하게는 야권의 분열에 의한 다원 경쟁체제의 형성이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승자독식 양당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야권 분열은 여당에게 어부지리만을 안겨주는 불행한 현상이지만, 합의제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다당제로 이행하는 단초가 될 수 있고 분열된 야권 세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서라도 비례대표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선거연대를 구축한다면 중요한 진전이 될 것이다.

셋째, <비례대표제 포럼>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단체들의 노력에 힘입어 일반 시민들의 비례대표제나 합의제 민주주의에 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정치제도 개혁에 관한 요구로 승화시킨다면, 여론의 급격한 반전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119 교수선언>이 발표되고 <119 포럼>이 결성된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국민적 합의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이러한 합의를 현실 정책에서 관철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의 부재를 실감한 과정이었다. 20대 총선을 목전에 둔 지금 여전히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중심적인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으며, 나아가 이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으로서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과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