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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23호_이나영_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12 28 한일합의의 문제점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4-01 17:49:28
  • 조회수 : 2178
현안과 정책 제123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운동단체들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출범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간 한국 및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제기했던 핵심적 쟁점들은 식민주의 및 민족주의와 젠더 간의 모순적 관계, 포스트식민국가에 잔존하는 식민성, 서발턴의 경험으로 역사 다시쓰기, 초국적 페미니스트 운동(연대)의 가능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015년 ‘12·28 한일합의’는 운동의 역사성과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일본 정부와 군 주도로 이루어진 강제연행과 성노예제에 대한 인정, 진상규명과 공식 사죄, 법적 배상과 재발방지 사업 중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담보되지 않은 수사적 차원의 책임, 사죄, 보상에 불과하며, 당사자들의 열망을 철저히 외면한 정치적 야합일 뿐이다.

이에 한국의 시민사회는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대신 역사적으로 계승된 책임을 다하고자 새로운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당사자들 또한 유엔에 청원서 제출 및 헌법소원을 통해 마지막까지 힘을 모으고 있다. 다시는 환원 불가능한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러한 부정의로 미래를 식민화하지 않도록, 현재의 잘못으로 인해 미래 세대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도록. 새롭게 확산되는 운동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약속과 다짐의 의미를 지닌다.
 
들어가며
 
2015년 12월 28일, 우리는 환원 불가능한 역사적 부정의가 되풀이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죽은 세대의 과오가 다시 우리 자신의 역사로, 미래 세대의 짐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했다. 역사를 지배자의 관점에서 일방 서술하고자 하는 측과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상호 간 죄를 추궁했던 형식적 과정마저 땅에 내팽개치고, 기실 오랜 동지였음을 만방에 공표했다. 그들은 이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로 ‘법적 책임’이 이미 끝났다고 기만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다시 식민화하려 한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애초에 시민들의 의식과 열정, 헌신으로 출발했고 진행되었으니, 마무리도 선조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손에 맡겨진 것인가.

이 글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의미를 개괄하고, 소위 ‘12·28 한일외무장관 합의’의 문제점을 살펴 본 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역사적 부정의를 시정할 책임을 나누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의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는 일제시기 식민지 조선 소녀들의 처참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혹자는 운이 좋아, 더러는 집안이 살만하여 악운을 피했지만 수많은 여성들은 “단지 조선에 태어났다는 죄”만으로1)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명은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고 감추어진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유령들’의 비명이 공적인 장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자신이 직접 행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오랜 고민과 개별적 호기심을 출발점으로 이를 정치적 어젠더로 확대시킨 이화여대 사회학과 이효재 교수, 1970년대부터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 관광객들의 기생관광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교회여성연합회(이하, 교회연)의 조직적 뒷받침에 힘입어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비로소 발아했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윤정옥 교수는 해방 후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던 여성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 연행된 남성들이 속속 귀환하던 당시, 여성들의 귀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윤정옥은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에 재산과 시간과 노력을 다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의 만남이 집단적 운동으로 성장한 배경에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진보적인 여성운동 단체들의 실천적 동력과 적극적 연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운동단체들과 다른 시민, 종교, 학생 단체들이 결집하여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된다. 1991년 8월 14일, 피해자(고 김학순)가 최초로 세상에 스스로를 공개하였으며,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정신대 관련 자료가 발굴되고 공개되고 외국에 관련 여성단체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8일, 정대협 주도 하에 정부의 공식 사과와 만행에 대한 역사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처음 열면서 시작된 수요 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차 기념 평화비(일명, ‘소녀상’) 건립으로 이어졌고, 2016년 3월 현재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위안부’ 운동은 민간단체들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사회·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세계적인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여성) 운동사에 주요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2)특히 여성들의 경험에서 나온 분노와 집단적 저항,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축적, 운동의 조직화 경험이 이론화를 촉발한 사례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을 극명하게 부각한 사례가 되었다.

운동은 고정되어 있거나 단일하지 않다. 시간을 따라, 상황에 부딪히면서 변화한다. 따라서 운동의 의미를 단순화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나, 필자는 편의상 여섯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1991년 당사자인 김학순씨의 최초의 증언으로 촉발된 피해자들의 연이은 커밍아웃은 역사적 부정의에 의해 침묵 당하던 ‘유령’들이 시간을 훌쩍 넘어 비로소 피해자이자 생존자, 동지라는 사회적 형체를 입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운동이 진행되면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드러나고,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게 되면서, 운동은 차츰 당사자들의 트라우마를 해체하고 포스트식민 국가 내/간 서발턴3)들끼리 서로 말을 걸게 하는 효과를 야기했다. 서발턴들이 말할 수 있는 조건의 마련,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운동성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위안소가 단순히 행정 체계도 아니었고, 명령에 복종한 병사들의 일상적 행위도 아닌 조직적 폭력과 인권침해의 현장이었음을 공적 발화 행위를 통해 낱낱이 ‘기록’해 왔다. 여성들의 경험을 무시하거나 배제한 거대 서사에 도전하고 공식적 기록물이 아닌 여성들의 목소리에 기반한 ‘역사 다시쓰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확산되었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초기부터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탈민족주의의 무기력함에 저항하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출발했다. 민족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적대적 공존관계 안의 여성/젠더의 복잡한 위치성을 재고하게 하였다.

넷째, 그러므로 ‘위안부’ 운동은 대한민국에 잔존하는 내부의 식민성(coloniality)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할과 위치성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이효재는 식민지배 당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청산되지 못한 데서 나타나는 가장 상징적 문제”로 위안부 문제를 지목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뿐만 아니라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도 책임을 묻고 있다.4)그의 깨달음은 한국적 민족주의의 발로라기보다는 사실상 우리 안에 숨겨진 종족 민족주의의 비굴함과 식민주의의 불온한 무의식적 그림자에 대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탈식민주의 운동이 단순히 점령/비점령, 식민 종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하면서 동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여성인권 문제를 선제적으로 이슈화하여 적극적 연대를 이끌어 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로컬에서 출발한 초국적 페미니스트 운동의 전형을 구축했다. 지난 25여 년 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활동가와 당사자들은 유엔 등 국제기구 활동과 피해당사국 간의 아시아연대회의를 포함한 국제연대의 구축과 확장 등을 통해 피해자의 존재를 알리고 고통의 성격을 드러내며, 공감된 청중을 새롭게 구성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이들은 민족, 인종, 나이, 문화, 젠더, 언어, 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언젠가는’ 부정의한 사회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지향하면서 국가 간, 민족 간 경계를 넘어 지속적인 활동을 해왔다. 비록 다른 장소에 서 있지만 같은 방향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정의를 위해 책임지고, 응답하고, 대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단편적 분노 표출이나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된다. 공동체 성원들이 국가가 과거에 (공동체 내외부에) 저지른 부정의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및 요구되는 배상을 제공할 책임(liability)을 인지하게 하고, 우리 스스로 부정의를 시정해야 할 의무를 일깨웠다.

예를 들어, ‘소녀상’을 비롯한 전 세계 각 지역의 <기림비(평화비) 건립>,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나비기금>, <나비네트워크> 등은 과거를 단순히 기념하거나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운동의 기원을 계승하고 전승된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실천 행위다. 특히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만든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과 당사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기꺼이 자신의 손을 내밀고자 만든 <나비기금>5)은 덜 부정의한 미래를 위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시 성폭력의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개입을 요구하는 운동의 적극적 계승 방식이다. 이는 정의를 위한 책임 공유의 권유 방식이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소녀상’과 <나비기금>은 역사 속에 반복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대면을 기반으로 전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의 구현에 우리 모두 힘을 기울이겠다는 미래지향적 책임의 상징이다.
 

 
‘12·28 한일외무장관 합의’의 문제점: 당사자들의 열망을 무시한 무책임한 자들의 정치적 야합
 
이번 협상의 문제점은 첫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초창기부터 꾸준히 제기한 일본정부와 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강제연행과 성노예제에 대한 인정,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공식 사죄 및 법적 배상, 재발방지 차원의 역사교육과 추모사업 중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내용 면에서 담보되지 않은 수사적 차원의 책임, 사죄, 보상에 불과하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며 피해의 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지 않고, 책임의 내용과 범위 또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하였지만, 실제 외무상의 기자회견으로 의견을 표명한 선에서 머물러 그간 아시아연대회의가 요구해 온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죄” 혹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요구안인 “국회결의 사죄”와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정부의 예산 10억 엔으로 한국정부가 재단을 설립하여 “前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한 점은 배상의 내용을 왜곡함은 물론 사실인정과 책임, 이에 기반을 둔 법적 배상이라는 생존자들과 지원 단체들의 오랜 요구를 전면 무시하기로 한 결정으로밖에 볼 수 없다.

둘째, 양국은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못 박음으로써 당사자들과 시민들이 그토록 원했던 재발방지에 대한 어떤 약속을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짓고자 했다. 사죄는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잘못을 적시하고 진정 용서를 구할 때, 그리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때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피해자들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누구를 대변하여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일본의 사죄를 받아 주며, 피해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해자 일본 정부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누구의 안녕과 위엄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하기로 한 한국 정부는 세계적 어젠다로 떠오른 이 운동의 깊은 역사와 의미를 스스로 폄훼함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사고하는 인식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는 “실제적으로 그동안 민간 차원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라고 한 김성우 대통령 홍보수석의 발표(2015년 12월 31일)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해졌다. 과연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당사자들의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를 외면한 한일합의의 성격은 지난 2016년 3월 27일,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 대리인 41명이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2·28 한일합의는 피해자와 지원 단체들을 배제한 가해자와 동조자들끼리의 야합이라 규정한다. 한일합의는 도덕적 책임/법적 책임이라는 이분법적 수사를 벗어나 통합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 양국 정부의 무책임함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정의에 대한 무감각함은 물론 부정의를 재생산하는데 오히려 적극적인 지배자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사건이라 하겠다.
 

 
시민사회의 대응
 
한일합의문이 발표된 직후인 2015년 12월 29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그리고 국민들의 이러한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 규정했다. 무엇보다 피해 생존자들은 분노와 울분을 터뜨리며 정부의 결정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용수 할머니는 한일협상에 대한 설명을 위해 외교부차관이 방문할 당시, “당신들 무엇 하는 사람들이냐...어느 나라 사람이냐”며 거세게 항의했고, 2015년 12월 30일, 1211차 피해자 추모제로 열린 수요시위에서 “활동하기 딱 좋은 88세”라며 법적 배상과 공식적인 사죄가 이뤄질 때까지 싸워 나갈 것을 대중 앞에 다짐하기도 했다. 김복동 할머니 또한 인터뷰에서 “자기네들이 타결했다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할머니들과 상의도 없이…우리가 거지도 아니고…”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나눔의 집의 이옥선 할머니는 “이렇게 고생하고 기다렸는데 정부에 섭섭하다. 우리는 돈보다 명예를 회복 받아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희망을 재삼 확인해 주었다. 이들을 포함한 피해생존자 10명은 2016년 1월 28일, “한·일 합의 조사해 달라”며 유엔에 청원서를 제출해, 국제적으로 이번 협상의 문제점을 환기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전 국민적 반발이 조직적 운동으로 확대되어 왔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며 비닐 거적을 쓴 채 매일 밤을 지세고 있으며, ‘소녀상’ 세우기 운동과 수요시위가 전국 각지에 들불처럼 일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운동의 의미를 환기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세계행동이 확산되어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일본 대사관 앞에 교포들과 현지인들이 각종 시위와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조직화하기 위해 2016년 1월 14일, 전국 400여개 단체와 개인들 참여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이 결성되어 ‘합의’ 파기를 위한 지속적인 시위와 단체 활동을 전개 중이다. 그 중 가장 주목할 점은 합의 준수의 조건인 10억 엔과 재단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의 모금으로 2016년 1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손잡는 정의와 기억재단이 정식으로 출범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한국의 시민들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단편적 분노 표출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됨을 분명히 하고 스스로 부정의를 시정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고 있다. 다시는 우리 스스로 환원 불가능한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러한 부정의로 미래를 식민화하지 않도록, 우리의 현재적 잘못으로 미래 세대가 책임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는 것이다. 역사적 부정의의 책임자인 우리 모두는 기꺼이 그 쟁투에 참가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소녀상’의 소녀는 그 발뒤꿈치를 땅에 딛지 못하고 있다. 12월 28일 한일합의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 2015년 12월 마지막 수요시위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
  • 정진성, 1995. “전후처리와 정신대 문제.” 『근현대사강좌』 제7호, 176-191.
  • 서발턴(subaltern)은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주로 하위주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지배집단에 의해 종속된 집단을 의미한다.
  • 이효재, 1992. “한일관계 정상화와 정신대 문제: 민족․여성사적 과제를 중심으로.” 『기독교사상』 8월호(통권 제404호), 8-17.
  • <나비기금>은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생존자인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전쟁과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을 당사자로서 연대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뜻을 강력히 피력했고 이에 2012년 38여성대회를 기화로 공식화하였다. 첫해에는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중 강간을 당한 피해자로서 다른 여성 피해자 및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가인 ‘마시카(Rebecca Masika Katsuva)’가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고, 두 번째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선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대협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womenandwar.net/contents/general/general.nx?page_str_menu=2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