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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193호_선학태_권력구조 개헌과 비례대표제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9-22 17:33:20
  • 조회수 : 2101
현안과 정책 제193호
권력구조 개헌과 비례대표제
선학태 (전 전남대학교 교수, 정치학)
국회 개헌특위 주관 전국순회 개헌 국민대토론회가 진행 중이다. 최대 쟁점은 권력구조 개헌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을 놓고 전문 논객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불붙고 있다. 토론과정을 관통하는 공통 지향점은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다. 그런데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는 다수제 혹은 비례제 등 선거제도 유형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된다. 다수제-권력구조는 집권당의 정치적 의사결정권 독점으로 인한 ‘배제의 정치’를 야기하는 반면, 비례제-권력구조는 다수당-소수당 간 정치적 의사결정권 분점·공유를 통한 ‘포용의 정치’를 유인한다. 비례제 없는 권력구조가 분권-협치 기제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환상일지 모른다. 선거제도는 ‘주춧돌’이고, 정당체제는 ‘기둥’이며, 권력구조는 ‘지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달랑 지붕만 바꾸는 식의 개헌은 절대로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단언컨대, 분권-협치의 권력구조는 비례제와 가장 친화적·순기능적으로 연동한다. 권력구조 개헌 디자이너들이 정교하게 천착해야 할 대명제이다.
 
권력구조 개헌, 비례제와 연계하여 논의돼야 한다
 

국회 개헌특위 주관 전국순회 개헌 국민대토론회가 진행 중이다. 기본권 강화, 지방분권, 정부형태 등이 주요 개헌 의제로 논의되고 있지만, 최대 쟁점은 권력구조 개헌이다.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대통령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 등을 놓고 전문 논객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불붙고 있다. 그럼에도 토론과정을 관통하는 공통 지향점은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다. 그렇다. 권력구조의 분권-협치야말로 ‘87년 체제’라는 승자독식 헌정체제를 합의제 헌정체제로, 한국 민주주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합의제 헌정공학의 핵심 원리는 분권-협치이기 때문이다.


권력구조는 선거제도와 기능적으로 맞물려 작동한다. 그렇기에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는 (소선거구) 다수제 혹은 비례제 등 선거제도 유형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수제는 최다 득표자만을 권력자로 당선시키기에, 51%를 얻은 1등 앞에 49%를 얻은 2등은 정치적 ‘폐족’의 운명을 맞는다. 반면 비례제는 득표율에 비례하여 권력을 배분하기에, 민심이 그대로 정당 간 의석분포에 정확히 투영된다. 따라서 다수제는 승자 권력독식과 패자 권력전실로 인해 권력자의 독치(獨治) 유혹을 자극하는 반면, 비례제는 승자-패자 간의 권력분점·공유를 통해 협치를 유인한다.


그렇다면 비례제 없는 어떤 권력구조도 그 자체만으론 분권-협치를 결코 담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국민대토론에 참여하는 헌법학자·정치학자·정치인들은 비례제와 권력구조의 기능적인 연계성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권력구조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을 개별적·병렬적으로 논할 뿐, 한 패키지로 묶어서 접근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를 순수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 혹은 내각제로 개헌하여 행정부-입법부-사법부 간 권력을 재배분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수평적 권력분점의 헌법적 제도화가 잘 정착된다고 하더라도 비례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권력구조의 협치 기제는 작동하기 어렵다. 권력구조의 작동, 특히 의회-행정부 관계는 결국 정당 간 정책 네트워킹과 입법 파트너십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의사결정권 분점·공유에 의해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를 유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선거제도는 다수제가 아니라 비례제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구조 개헌 논의는 선거제도, 특히 비례제와 연계하여 진행돼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는 비례제의 종속변수다”라는 정치적 명제를 제시한다. 물론 이건 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가설적 명제는 각국 정부제도의 작동을 비교 분석해 볼 때, 경험적으로 상당히 검증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수제-대통령제 vs 비례제-대통령제
 

미국 대통령은 선전포고권·계엄선포권·긴급명령권 등 비상대권(하원)을 갖지 않고, 연방제-양원제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다. 예산편성권, 특히 입법의제 설정권이 의회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단순히 의회를 통과한 법안의 수용·거부(take it or leave it) 여부만을 결정한다. 단순화하면 미국 대통령은 인사권과 외교·국방권 행사에 치중하고, 내정권은 보완적 업무만 갖지 사실상 주정부로 넘긴다. 한마디로 미국 대통령제는 수평적·수직적 권력분점형이다. 어느 의미에서 미국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을 허용하는 프랑스 분권형 대통령제보다 더 분권적이다.


하지만 미국 권력분점형 대통령제는 좀처럼 협치 기제로 작동하지 못한다. 의원과 대통령의 승자독식 단순다수 선거제 때문이다. 물론 ‘주고받는 식’의 협조통과(logrolling)와 자유표결(cross-voting) 방식으로 초당적 입법연대가 간혹 이뤄진다. 그러나 다수제가 유인하는 민주-공화 거대 양당 간 양극적 갈등과 의회-대통령 충돌로 입법지연·실패는 다반사이고, 심지어 국정마비(2013년 연방정부 셧다운 등)의 위험이 상존한다. ‘벼랑 끝 정치’(brinkmanship politics)가 드물지 않게 연출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몰락을 예측했던 미국 스탠퍼드대 후쿠야마 교수는 무늬만 ‘견제-균형’의 대통령제이지, 사실은 다수제-양당정치로 인해 서로의 발목을 잡는 ‘거부 정치’(vetocracy)로 전락했다고 통탄한 바 있다. 작년 ‘센더스·트럼프 현상’은 신자유주의 희생자들의 반란인 동시에, 다수제가 불러들인 워싱턴 기득권 양당정치에 대한 아웃사이더들의 도전이었다. 미국 다수제-양당정치에 조종(弔鐘)이 울리는 듯하다. 미국 대통령제가 미합중국을 ‘두 개의 미국’으로 쪼개는 정치양극화를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하다.


한편 브라질 ‘1988년 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용인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설계했던 한국 ‘1987년 헌법’와 유사했다. 브라질 대통령은 인사권·재정권·비상대권, 특히 사전 의회 동의가 필요 없는 긴급포고권(decretismo)을 발동할 수 있다. 긴급포고권은 대통령의 선제적 입법권뿐 아니라 입법의제 설정의 주도권을 뜻한다. 그래서 미국 주류 정치학자들은 최악의 대통령제로 혹평했다.


그러나 브라질 제왕적 대통령제는 분권-협치 기제를 내장한다. 이런 정치적 패러독스는 선거제도에 연유한다. 브라질의 개방형 비례제는 비록 원내 진출의 ‘진입장벽’ 부재로 정당이 난립하는 부작용이 없지 않지만, 대통령 소속 정당이 항상 의회의석 20% 이하를 차지하는 등 어떤 정당도 과반의석을 점유하지 못하는 여소야대 다당제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의제의 입법화를 위해 이념블록을 넘나들며 다른 정당들과의 연정을 구성한다. 예컨대 사민당 소속 카르도소(1995~2002) 대통령은 중도정당과 보수정당들, 그리고 노동자당의 룰라 대통령(2003~2010)과 호세프 대통령(2010~2016)은 중도좌파에서 중도우파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채로운 초(超)이념블록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런 초블록 연정은 대통령 소속 정당을 비롯한 어떤 정당도 자신의 정책만을 고집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연정 파트너 정당 간의 정책 조율·교환을 통해 대통령-의회 간 입법교착을 돌파한다. 특히 룰라 대통령 시절, 입법 효율성은 80% 수준에 육박했다. 결국 브라질 제왕적 대통령제는 개방형비례제-대선결선제-이념블록다당제-(좌우)연립내각-연정대통령을 통해 마치 비례제-내각제처럼 작동한다. 작년 호세프 대통령 탄핵은 개인 실패이지, 비례제-대통령제 실패가 아니다.  

 
다수제-분권형 대통령제 vs 비례제-분권형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는 무려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여기선 가장 통상적인 두 국가만 살펴본다. 우선 프랑스의 소선거구제-분권형대통령제다. 이 정부제도는 여소야대의 경우 국민 직선 대통령(국가수반·외치)과 의회 선출 총리(정부수반·내치) 간의 거대 양당 동거정부로 국정 주도권이 총리에게 넘어가는 내각제에 근접한다. 이에 반해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당일 경우 조각권 등 국정을 주도하는 대통령제에 근접한다. 따라서 프랑스 분권형 대통령제는 총선 결과에 따라 정부형태가 달라지는 제도적 유연성과 탄력성을 갖고 있으며, 일견 분권-협치의 정치공간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의원 결선투표제에 따른 다당체제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하원의원 소선거구제가 만들어내는 공화당(대중연합)-사회당 중심의 거대 양극 정당체제(5월 대선에서 중도당 앙마르슈 집권에 따라 사회당 정치력은 급락)와 조합돼,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예컨대 1986~88년, 1993~95년, 1997~2002년의 사회당/공화당 동거정부는 대통령-총리 간 이념·권력 충돌로 얼룩졌다.


그래서 프랑스는 헌법개정(2000년)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하고 대선·총선 주기를 일치시켜 여소야대의 동거정부 수립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에 따라 동일 정당 출신이 대통령·총리 모두를 석권하는 여대야소 정국이 거의 언제나 형성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우파 사르코지, 좌파 올랑드, 중도 현 마크롱 대통령에서 보듯, 프랑스의 여대야소 대통령은 대통령-총리 간 헌법적 권력분점에도 불구하고 총리와 의회를 통제하는 사실상 ‘민선 황제’급의 슈퍼 대통령으로 등극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경우 대통령에 대한 야당, 특히 의회의 견제 기능은 무력화된다.


분권형 대통령제의 원조는 핀란드다. 프랑스의 분권형 대통령제도 사실은 핀란드에서 수입됐다. 핀란드는 러시아·스웨덴 식민지 통치 경험 등 역사적으로 숙명적인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국가안보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대통령 우위 분권형 대통령제’(다만 러시아 안보위협 완화에 따른 2000년 개헌으로 현재는 ‘총리 중심 분권형 대통령제’에 근접)를 채택했다. 즉 외교안보·군통수권은 대통령의 전적인 재량권으로 전문화시키고, 선전포고권·계엄선포권 등 비상대권과 총리 제청에 따라 의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반면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는 경제·교육·문화 등 내정권 전담을 헌법적으로 보장 받는다.


프랑스와는 달리, 핀란드 분권형 대통령제에선 분권-협치 기제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이건 분권형 대통령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비례제에 의해 가능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핀란드 비례제는 전통적으로 득표율·의석율의 30%를 상회하는 지배정당을 불허한다. 따라서 좌우 이념블록 교차의 정당연합이 제도화된다. 사민당, 중앙당, 국민연합 등 세 메이저 정당들 중 두 정당이 군소정당을 내각 연정 파트너로 참여시켜 연립정부를 구상하는 게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로써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의 ‘무지개’ 공동정부 구성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연립 공동정부는 통상 3~5 개 정당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안정적 의회 의석(60% 이상의 점유율)을 동원하는 정치력을 구사한다.


핀란드의 이런 정치지형은 특정 파트너 정당이 특정 이념적 정향과 정책 프로그램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행태를 구조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핀란드 초이념블록 연정은 대통령·총리가 어느 정당 출신이든 상관없이, 분권형 대통령제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는 대통령-총리 간 권력갈등이 순탄하게 조정·해소되고, 의회-행정부 협치 공간이 확장된다.


그렇기에 한국 학자들이 분권형 대통령제의 약점으로 늘 비판하는 ‘외치와 내치의 경계 모호성’으로 인한 대통령-총리 간 정책갈등은 핀란드 분권형 대통령제에선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선 논의를 생략하겠으나, 우리 정치권 일각에서 선호하는 오스트리아의 ‘비례대표제-총리 중심 분권형 대통령제’ 작동 또한 핀란드 분권형 대통령제와 궤를 같이 하며 매우 정상적으로 순항하고 있다. 요컨대,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총리 협치, 대통령-의회 협치, 총리-의회 협치는 비례제가 유인하는 합의제 정당정치 동학에 의해 매우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다수제-내각제 vs 비례제-내각제
 

내각제가 권력분산형 정부제도라는 인식은 오류다. 권력독점의 정부제도는 통념과 달리 의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내각제다. 영국 소선거구제는 여러 군소정당을 출현시키지만, 실제론 보수-노동 거대 양당체제를 고착화한다. 이런 거대 양당정치와 맞물린 영국 내각제는 집권당·총리의 권력독점 현상을 드러낸다. 보수당/자민당(2010~2015), 현 보수당/민주연합당 연정이 구성되기도 하지만, 이건 매우 예외적 현상이다. 실제로 2010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득표율 23%로 하원 650석 중 57석을 얻어 유력한 제3당의 지위를 획득했으나 2015년 총선에선 불과 8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보수당/민주연합당 연정도 ‘브렉시트 소용돌이’에 따른 조기 총선과 보수당의 과반 실패라는 특수상황에서 급조됐다.


영국 내각제에선 다수당이 단독으로 행정부는 물론이고 입법부를 통째로 장악하는 집권당독재-제왕적총리가 등장한다. 야당은 국정 비판·반대의 자유만 있지, 협치의 파트너가 아니다. 따라서 영국 내각제의 정책동학은 집권당 단독정부가 특별한 정치적 비토권자(veto players)의 견제 없이, 노동당 정부 보수당 정부 가릴 것 없이 노동·복지 등 정책개혁 과정에 노사 이익단체들은 물론이고 야당의 참여를 배제하며 일방통행적인 권위주의적 방식에 매우 익숙해 있다.


이로 인해 영국 내각제는 정치양극화 현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라틴유럽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소득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정부제도로 변질되고 있다. 일본의 ‘소선거구제-비례대표 병립제’+내각제인 경우도 영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자민당은 상·하원을 장악하며 사실상 영구 집권을 꾀한다. 일본 민주당은 장밋빛 무상복지 로드맵을 제시하고 소비세 인상을 추진하다가, 2012년 12월 총선에서 불과 집권 3년 만에 자민당에 정권을 헌납하지 않았던가.


대조적으로 게르만 국가들의 비례제는 어느 정당도 과반의석을 획득할 수 없어 정책·입법연합-정부연합의 내각제를 강제한다. 예컨대 독일의 간선대통령-내각제가 그렇다. 사실 독일 내각제는 총리의 의회해산권 불허와 의회의 대(對)총리 ‘건설적 불신임투표제’ 등 스위스식 집정부제(Direktorialregierung)의 수입으로 인해, 총리의 의회 해산권과 의회의 총리(내각) 불신임권 사이에 균형적인 견제 기제가 작동하는 순수 내각제에서 이탈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내각제의 정책결정 프로세스는 (연방대통령)-연방정부-연방하원-연방상원-주정부-주의회 간의 촘촘한 수평적·수직적 분권-협치로 작동한다. 그 연결고리는 비례제와 소선거구제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연동형 비례제다. 연동형 비례제는 의회권력을 독과점하는 패권 정당을 구조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방정부와 주정부 차원에서 기민당/사민당 좌우 대연정이 구성되거나, 아니면 단독 정부구성이 어려운 메이저 정당 간 경쟁구도에서 마이너 정당(자민당·녹색당·좌파당)이 국정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며 상·하원-연방정부 간, 주의회-주정부 간 협치를 견인한다. 이런 수평적·수직적 분권-협치의 합의제 헌정체제가 독일통일의 강력한 제도적 인센티브·촉매제였다는 관점은 향후 남북한 통합 국가 설계에 의미심장한 함축을 갖는다.
노르딕 비례제-내각제 국가들은 어떤가? 주지하듯, 핀란드를 제외한 노르딕 내각제 국가들은 입헌군주국이다. 국왕은 통치권은 없으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통적 존엄성의 위상으로 숭배되고 초당적으로 군림하며 내각제의 국정혼란이 국가혼란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구심력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내각제는 1970년대의 좌우 이념블록 간 양극정치 시기를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국왕의 도움이 없이도 매우 안정적이다. 비례제-다당제로 인해 통상적으로 구성되는 정당 간 정책·입법연합 혹은 정부연합의 협치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노르딕 내각제 국가들의 입법 효율성이 80% 안팎에 이르는 이유이기 하다.


덴마크 비례제-내각제에선 급진자유당·기독교인민당 등 중도 군소정당이 정책·법안 사안별로 때론 사민당을, 때론 우파블록(보수당·자유당 등)을 번갈아 오가며 연정 파트너로 선택하곤 한다. 글로벌화 이후 빈발하는 사민당 소수정부는 내각 차원에선 연정을 좀처럼 구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의회 차원에선 좌우 정당을 가리지 않는 입법연합을 구성한다. 반면 우파블록 정당들은 정부 내각연합을 형성한다. 이로써 덴마크 내각제는 국정을 매우 안정적으로 이끌어 간다.


덴마크와는 달리, 스웨덴 비례제-내각제에선 중도정당의 정치력이 점점 쇠잔하여 정당정치가 이념적으로 블록화 현상을 보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스웨덴 내각제에선 거의 언제나 사민당과 우파정당 블록 사이에 순환적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스웨덴 사민당은 행정부 차원에선 단독 소수내각 구성을 보편화하지만, 의회 차원에선 좌파블록의 야당인 좌파당(구공산당) 혹은 녹색당과의 입법연합을 추구한다. 자유당·보수당·기민당 등 우파블록인 경우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런 블록정치 속에서도 스웨덴 내각제는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분권-협치의 권력구조는 비례제와 친화적이다
 

선거제도와 맞물린 정부제도의 작동 사례들이 던지는 함의는 명료하다. 다수제-권력구조는 집권당의 정치적 의사결정권 독점으로 인한 ‘배제의 정치’ ‘상살(相殺)의 정치를 연출하는 반면, 비례제-권력구조는 다수당-소수당 간 정치적 의사결정권 분점을 통한 ‘포용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견인한다. 비례제는 정당 간 수평적 권력분점과 연정 협치(coalitional governance)에 의해 매개되는 다양한 정부연합 유형, 의회-행정부 협치로 이어지는 합의제 의사결정 기제를 유인한다. 사실 비례제는 역사적 기원을 따져 볼 때 “의사결정권의 나눔을 통해 이해관계를 협의·조정·타협”하는 태생적 DNA를 갖는다. 비례제의 잉태 과정을 추적해 보면 그렇다.


확언하건대, 분권-협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 내각제 등 특정 권력구조의 택일적 개헌 논쟁은 주요 변수가 아니다. 아니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다. 권력구조의 분권-협치는 어떤 유형의 비례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례제 이외의 선거제도 개혁은 개악이다. 다당체제 구축이라는 명분을 걸고 야권 일각에서 선호하는 중대선거구제는 이미 일본에서 실패했고,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선거제를 채택한 나라는 이 지구촌에 없다.


따라서 노르딕·게르만(독일 제외)식 전면 비례제 채택이 비현실적이라면, 적어도 독일식 연동형 비례제가 비록 만병통치의 처방은 아니지만, 한국 제왕적 대통령제의 비정상과 적폐를 바로잡아 줄 가장 정답에 가깝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제는 계층대표성과 지역대표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주는 선거제도다. 이런 의미에서 비례제와 조합되지 않는 권력구조가 분권-협치 기제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신기루’를 잡으려는 환상일지 모른다.


비례제는 (순수)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 내각제 등 어떤 형태의 권력구조와도 조응이 가능하다. 권력구조 형태와 비례제 사이에 논리적, 인과적 필연성이 존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 중임제를 집요하게 고집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엔 비례제로 선거제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떤 권력구조 형태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관측된다. 선거제도는 ‘주춧돌’이고, 정당체제는 ‘기둥’이며, 권력구조는 ‘지붕’에 불과하다. 달랑 지붕만 바꾸는 식의 개헌은 절대로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단언컨대, 분권-협치의 권력구조는 비례제와 순기능적으로 연동한다. 따라서 권력구조 개헌이 꼭 필요하다면 비례제와 가장 친화적으로 연계하여 작동할 수 있는 정부형태를 설계해야 한다. 권력구조 개헌 디자이너들이 지혜롭고 정교하게 천착해야 할 대명제이다. 미흡한 글줄이지만, 다소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주장을 펼친 이 짧은 글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권력구조 개헌 토론과정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의견을 쌓아가는 데 ‘한 장의 벽돌’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