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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384호_홍경수_스트릿우먼파이터와 콘텐츠의 미래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2-25 13:06:02
  • 조회수 : 178

현안과 정책 제 384호


스트릿우먼파이터와 콘텐츠의 미래

 

​글 / 홍경수 (아주대학교 교수)



요 약 문 

 

오징어게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2021년 흥행작으로 떠오른 스트릿우먼파이터는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에 텔레비전과 OTT의 미디어 믹스 전략을 통한 성과로 볼 수 있다. 더 이상 지상파의 독점 매체가 아닌 텔레비전은 일종의 앰비언트 미디어로 가족구성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스우파가 초기에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수용되다가 중장년층의 수용자로 확대된 데에는 텔레비전의 앰비언트 미디어로서의 기능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OTT 플랫폼인 티빙을 통해 20개의 채널을 라이브로 방송하여 안방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쉽게 본방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나, 본방을 보지 못한 경우에는 티빙의 다시보기(SVOD)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구조는 티빙의 구독자를 의미 있게 증가시켰다. 유튜브에 다양한 영상클립들을 올리고, 각 팀 영상의 조회 수와 좋아요 수치를 합산하여 평가에 반영함으로써 잠재 시청자를 본방송과 다시보기로 끌어들이는 전략도 주효했다. 내용면으로는 K POP이 세계적 현상이 되고, 기획사가 문화재벌이 되어가는 중에도 거대한 엔터산업의 밑단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문화산업의 필수요원(essential workers)인 댄서들은 수출역군들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으며 산업의 기초를 단단히 했다.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 한 가운데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자 대중은 환호했다. 실력을 갖춘 주인공이 내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결국 정당한 평가를 받는 인간승리의 과정에 시청자들이 열광한 것이라면, 여성서사라기보다는 인간서사로 볼 수 있다. 스우파라는 콘텐츠를 라깡의 욕망 공식에 대입해보면 멋진 쇼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루한 코로나 시기를 넘어가고 싶다(욕구), 예전 오디션처럼 공정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요구), 공정성에 문제가 없을뿐더러, 그동안 조명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빛나는 공의로운 인생 콘텐츠를 만나고 싶다(욕망)로 분석할 수 있다. 대중들의 결핍에서 근원한 욕망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억눌린 누군가가 제대로 평가를 받는 공의로운 콘텐츠를 보고 싶은’ 마음이다. 앞으로의 방송 콘텐츠가 채굴해야 할 광맥은 사회에서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폄훼당한 사람들 혹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담대하게 공론의 장에 제시하는 것이다.

어릴 적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을 볼 때부터 궁금증이 있었다. 가수들과 함께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삶은 어떠할까? 어떻게 연습을 하여 가수와 호흡을 맞추는지, 더불어 은퇴한 뒤의 모습을 방송에서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2021년 여름 막연한 개인적 궁금증에 답을 제시한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스트릿우먼파이터다(이하 스우파). 넷플릭스 오징어게임과 거의 겹쳐진 방송으로 인해 다소 여론에서 불리한 환경이었으나, 각종 화제성지수 1위, 유튜브 조회 수 3억 이상, 틱톡 조회 수 2억 이상 등을 기록하며 세계적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방송이 끝나고 이름 없던 출연자들은 스타덤에 올라 각종 프로그램에 초대됐고 광고 모델로도 인기를 끌었다. ‘프로듀스 101’과 관련한 추문과 잡음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첫 방송을 앞두고 시청자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눈덩이가 뭉쳐지듯 커진 반응은 놀랍기 그지없다. 혁신적인 콘텐츠는 적은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는 효율성과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글에서는 혁신적인 콘텐츠라 할 수 있는 스우파가 어떻게 대중의 응원을 얻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이것이 콘텐츠의 미래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텔레비전과 OTT의 미디어믹스: “아직도 스우파를 모르는가?”

이제는 텔레비전이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을 뛰쳐나온 미디어의 탄도는 인터넷방송과 유튜브를 거쳐 이미 OTT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으며, AR,VR 등 XR을 통과하여 메타버스에 돌입했다. 스우파는 이러한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에 텔레비전과 OTT의 절묘한 미디어믹스로 텔레비전의 효용을 극대화시켰다. 롯츠(Lotz)가 지적한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란 텔레비전 방송사가 주된 역할을 했던 이른바, 네트워크 시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멀티 플랫폼 콘텐츠 시대를 가리킨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독점했던 텔레비전이라는 상자를 이제는 PP와 IPTV, 그리고 티빙, 넷플릭스와 같은 OTT들과 함께 사용하는 시대다. 텔레비전 상자의 가장 큰 장점은 어느 모니터보다 크고, 텔레비전 상자가 가진 다른 미디어와의 차이점은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댄스실력을 갈고 닦았거나, K POP 무대를 반짝반짝 빛나게 한 칼로 썬 듯한 군무로 이름난 젊은 여성들이 팀의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건 경쟁을 한다. 이들이 유명한 스타가 아니기에 이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스펙터클할 것임은 당연하다. 매 경연마다 아름다운 신체가 빚어내는 역동적이고도 조화로운 움직임은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에 더할 나위 없는 스펙터클한 소재다.

게다가 텔레비전은 일종의 앰비언트 미디어(주변환경을 구성하는 미디어)로, 집안의 형광등처럼 우리 삶을 감싼다. 혼자 사는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켜놓는 것도 텔레비전을 친숙한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텔레비전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어도 가족 중 어느 한명의 선택으로 열려있다면(텔레비전은 일종의 창문이니), 다른 가족들도 끌어들일 수 있다. 스우파가 초기에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수용되다가 중장년층의 수용자로 확대된 데에는 텔레비전의 앰비언트 미디어로서의 기능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MZ 세대에게 호소력이 강한 콘텐츠가 전 연령대로 시청자 폭이 넓어짐으로써 스우파는 국민 콘텐츠로 변모했다.

여기에 스우파는 자신의 OTT 플랫폼인 티빙을 통해 20개의 채널을 라이브로 방송하여 안방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쉽게 본방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티빙을 통해서 본방을 보지 못한 경우에는 티빙의 다시보기(SVOD)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스우파 방송과 더불어 티빙의 구독자가 의미 있게 증가했다는 회사 관계자의 발언은 한국형 OTT의 새로운 전략이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2020 인터넷 이용실태 조사결과 한국인의 92.7%가 사용한다는 유튜브에 다양한 영상클립들을 올리고, 각 팀 영상의 조회 수와 좋아요 수치를 합산하여 평가에 반영함으로써 잠재 시청자를 본방송과 다시보기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활용했다. 유튜브의 조회 수를 반영함으로써 문자투표가 갖고 있는 불투명성을 어느 정도 해소함과 동시에 글로벌 시청자를 확보하는 부수적인 이득도 얻었다.

최종회는 생방송으로 진행함으로써 즉시성과 현장성을 극대화 했고 시청자를 참여시켰다. 텔레비전은 처음 등장한 1930년대에만 해도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생방송으로 진행됐는데, 녹화장치인 VTR이 1956년이 되어서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생방송에는 녹화물이 넘볼 수 없는 ‘살아있음’이 존재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미디어 이벤트도 이런 특성 때문에 가능해졌다. 미디어학자 메이로비츠(Meyrowitz, 1983)는 시청자로 하여금 사회공동체의 일 구성원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생방송을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연루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고 설명했다. 생방송을 연구한 동덕여대 이동규 교수에 따르면 텔레비전의 생방송이라는 특성은 수용자를 직접적으로 관여시켜 시청률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때 방송사들이 너도나도 생방송을 뜻하는 LIVE라는 자막을 화면에 고정시킨 것도, 심지어는 녹화중계마저도 LIVE라고 우겼던 것도 TV가 갖고 있는 생방송이라는 아우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생방송을 생맥주에 비유한다면, 녹화방송은 병맥주에 해당하는 것처럼, 생방송의 현장성과 즉시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우파가 텔레비전과 OTT를 활용한 미디어 전략은 옴니채널 전략을 연상케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까다로운 소비자를 붙잡기 위해 기업들이 사용하는 온라인 오프라인 통합 채널 전략인 옴니채널 전략은 곳곳에 덫을 놓음으로써 소비자들이 특정 제품을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프라인 환경을 지배하는 가정의 텔레비전을 통한 시청자의 확장, 자사 OTT 플랫폼인 티빙을 통한 생방송과 다시보기를 통한 시청자의 확보, OTT의 최강자인 유튜브에 짧은 영상을 올려 잠재적인 수용자를 끌어들이는 미끼전략에다가 다양한 포털의 뉴스들이 시청자를 포획한다. “아직도 스우파를 모른 척 할 수 있느냐?”질문하는 듯하다. 현재 지상파 방송의 쇠락은 영향력이 줄고 있는 지상파라는 매체에만 과도한 가중치를 두고, 자사 OTT플랫폼과 유튜브 무료 플랫폼, 그리고 인터넷 여론이라는 핵심 요소를 저글링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이것은 예능인가, 아니면 드라마인가?

이제 내용면으로 들어가 보자. 방송 내내 화제는 넘쳤고, 스토리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 스승과 제자 관계라 할 수 있는 허니제이와 리헤이의 대결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삶에서 드문 일이 아닌 만남과 이별을 둘러싼 ‘운명의 장난’을 목도했다. 흡사 보스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제자가 뭔가 안 맞아서 스승과 5년간 함께 해온 크루(정확히는 팀이다)를 뛰쳐나가 자신의 팀을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해를 쌓으며 연락을 하지 않다가, 노리스펙이라는 이름의 약자지목 경쟁에서 스승을 약자로 지목하여 한판 승부를 본다. 무협지도 아니고, 소림사 영화도 아니지만, 댄스 경연 프로그램은 다리 위에서 피하고 싶은 인연을 마주하게 하는 서사를 빚어냈다. 이 경쟁에서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었고, 경쟁에서 진 허니제이는 제자를 껴안으며 그동안 쌓인 복잡한 감정의 실마리를 풀어냈다. 어느 드라마보다 극적인 구성이다.

그 후 허니제이는 계속되는 경쟁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자신의 새로운 제자들로 이뤄진 팀원들에게 얼굴이 많이 깎였다. 옛 제자에게 패하고, 현재의 제자들에게 체면이 안서는 스승은 결국 팀원들의 의견을 수용하며, 메가크루 미션 등에서 승리하며 팀원들을 다독인 뒤 최종 우승을 거둔다. 어떻게 보면 스우파는 허니제이를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드라마였던 셈이다. 대중은 완벽한 주인공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결함 있는 주인공, 상처 입은 주인공, 힘을 잃은 주인공에 더 감정이입을 하고, 주인공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실력과 인성이 돋보이는 허니제이가 상처받은 영웅이었기에 스우파라는 드라마의 주연으로 제격이었다.

드라마의 성공에는 일종의 방백이라 할 수 있는 ‘속마음 인터뷰’ 장치가 잘 활용되었다. 방백은 곁에 사람을 두고도 홀로 하는 말로, 곁에 사람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 방백의 효과는 살아난다. 관객은 ‘속마음 인터뷰’를 통해 어떤 정보, 예측, 기대심리를 갖게 되고, 스우파의 명대사들 대부분이 속마음 인터뷰를 통해 탄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리정이 ‘내가 약자? 난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는데’라고 말하며 상대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출연자의 속마음을 언제 인터뷰를 땄을까 궁금할 정도로 긴장감과 진실함이 느껴지는 인터뷰 덕분에 시청자들은 잘 짜인 스토리의 양면을 들여다보며 몰입하게 되었다. 전지현, 고현정, 송혜교 등 내로라하는 명배우들이 대거 드라마에 출연한 2021년 가을, 이번 드라마 전쟁의 최종 승자는 어쩌면 스우파가 아닐까?

 

이것은 여성서사가 아니다. 인간서사다

일부 미디어에서는 스우파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며 새로워진 여성서사를 들었다. 즉,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의 서사를 활용하지 않았으며, 선곡을 통해서 여성을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체로서 드러내보였다는 것이다. 타당한 지적이기는 하지만, 스우파는 엄밀하게 여성서사라기보다는 인간서사로 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동안 특정 성별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배틀, 싸움, 경쟁, 리더십뿐만 아니라, 화해, 용서, 화합, 사랑 등의 가치가 한 콘텐츠 안에서 자연스레 용해되어 양성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더 근원적으로는 여성으로서의 댄서들의 경쟁 과정 대신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오로지 실력경쟁을 통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섬세한 지향성이 스우파를 단순한 여성서사 이상이게 만든다. K-POP이 세계적 현상이 되고, 기획사가 문화재벌이 되어가는 중에도 거대한 엔터산업의 밑단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이돌 연습생, 연주자, 코러스, 그리고 댄서들이라 할 수 있다. 문화산업의 필수요원(essential workers)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노동 없이는 아름다운 무대도 음악도 불가능해진다.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수출역군들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으며 산업의 기초를 단단히 했다. 여유로울 수 없는 환경에서 치열하게 춤추었지만,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한(실제 무대에서 조명은 이들을 피해간다)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 한 가운데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자 대중은 환호했다. 실력을 갖춘 주인공이 내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결국 정당한 평가를 받는 인간승리의 과정에 시청자들이 열광한 것이라면, 여성서사라기보다는 인간서사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는다.

프라우드먼이 여성인권선언을 낭독하는 곡에 맞춰 춤을 추거나, 훅이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를 선곡한 것 역시 여성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서사로 보이기보다는 조명 받지 못한 댄서들이 우리 사회에서 조명 받지 못한 또 다른 존재인 여성과 엄마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치카가 혼성팀 미션에서 성소수자를 연상케 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말하고 조권이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춘 것 역시 또 다른 소수자를 격려하는 관심의 확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행동은 공감의 철학자 시몬 베이유를 연상시켰다. 에릭 와이너는 <소크라테스 엑스프레스>에서 여섯 살 때 군인들이 설탕을 먹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설탕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난방용 기름을 살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이 안쓰러워 아파트 난방을 하지 않았던 베이유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고 말했다. 관심의 확장된 모습이 바로 사랑이라면, 댄서들의 선곡과 안무, 퍼포먼스는 삭막한 세상을 따듯하게 보듬었다. 심지어 출연자들의 속옷차림과 다소 민망할 수도 있을 춤의 동작들도 인간서사라는 큰 우산 안에서 자연스럽게 용해된다. 육상 선수의 짧은 반바지를 보고 누구도 중계방송이 선정적이라고 흠을 잡지 않는 것처럼.

 

대중은 콘텐츠에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가?

대중들이 콘텐츠에서 무엇을 추구하느냐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다. 우선 니드(need)와 원트(want) 론(論).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하고 콘텐츠는 대중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령 청소년들이 밥보다는 라면을 더욱 선호한다고 할 때, 라면을 공급하는 것이 원트를 제공하는 것이고, 영양가 있는 밥을 주는 것이 니드를 채워준다고 비유할 수 있다.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게 결핍 론이다.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대중에게 결핍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핍을 설명하려면, 라깡의 욕망이론을 지나칠 수 없다.

라깡은 주체를 허구적 대상에 대한 결핍을 가진 존재로 상정한다. 라깡은 욕구(want)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바람, 혹은 조건에 대한 소망충족이라고 설명한다. 즉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싶어하며, 배가 부르면 배설을 하고 싶은 것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근본조건이다. 욕구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요구와 욕망이다. 우선 요구(demand)는 자신에게 충족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언어로 번역된 소망충족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타고 싶다, 식사 때 엄마와 이야기하며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소망은 모두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들은 대부분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요구 중에서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분명 생겨나게 마련이다.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욕구이고, 엄마와 이야기하며 밥을 먹고 싶은 것이 요구라면, 요구와 욕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욕망(desire)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욕망은 항상 요구를 넘어서서 혹은 요구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이 라깡의 주장이다. 욕망이 요구를 항상 넘어서서 존재한다면, 욕망이 요구를 초월하며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욕망은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구는 욕망을 반드시 언어형태로 표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욕망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어렵다고 라깡 연구자 아니카 르메르는 말했다. 종합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결핍된 존재이며, 욕망은 자신의 욕구와 요구 이전에 그리고 이 둘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콘텐츠 기획에서 수용자의 결핍의 지점을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작업이다.

필자는 스우파를 보면서 대중에게 결핍된 것은 공의(公義, rightness)로운 세상이며, 콘텐츠에서도 이러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스우파라는 콘텐츠를 라깡의 욕망 공식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다.

 

멋진 쇼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루한 코로나 시기를 넘어가고 싶다(욕구)

예전 오디션처럼 공정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요구)

공정성에 문제가 없을뿐더러, 그동안 조명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빛나는 공의로움이 있는 인생 콘텐츠를 만나고 싶다(욕망)

 

위와 같이 구분해본다면, 대중들의 결핍에서 근원한 욕망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억눌린 누군가가 제대로 평가를 받는 공의로운 콘텐츠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그동안 억눌려서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이 바로 세워져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살맛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의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이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서 인기를 끌었다는 담론을 빌려 오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의 양극화 정도는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다.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는 것은 공의롭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누군가가 작은 성공을 일궈낸다면, 그것은 공의가 실현되는 순간이며, 누구라도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조명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일이 공의의 영역이라면, 경연 내에서의 비교적 정확한 심사는 공정의 영역일 것이다. 전체 프로그램을 통틀어서 심사위원인 보아, 황성훈, 태용이 내리는 심사 결과 중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심사결과는 없었다. 물론, 더 많은 심사위원들이 춤동작의 의미를 분석하고 자세하게 설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나마 생길 여지가 있는 논란은 출연자들이 멋지게 승부를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잠잠해졌고, 이것이 다시 콘텐츠의 매력요소로 자리 잡았다. 제작자가 출연자 복도 많기도 하다.

 

방송 콘텐츠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30만 명의 구독자와 5만~15만 정도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MBC 소속 브이로거 ‘오느른’은 한국판 유튜브 리틀포레스트라 할 수 있다. 수백 개의 댓글을 읽어보고 느낀 점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구가 줄어들고 폐가가 늘어나는 농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최별 PD를 전심전력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악성 댓글은 찾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선한 댓글 일색이다. 대중은 누군가가 우리 사회의 억눌리고 왜곡된 문제를 바르게 펴고자 하는 노력들을 큰 박수로 응원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스우파가 대중의 환호를 받은 근원적인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조명 받지 못한 이른바 언더 댄서에게 타당한 인정을 돌려주는 콘텐츠의 취지는 기획만으로도 응원하고 싶어진다. 게다가 방송에서 이야기했듯이 출연자들 대부분은 춤추는 것이 정말 좋아서 사회적 인식을 이겨내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의 방송 콘텐츠가 채굴해야 할 광맥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폄훼당한 사람들 혹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담대하게 공론의 장에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소재가 될까? 라는 기획초기의 질문은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대중의 무의식의 작용에 따라 쓸 데 없는 기우로 드러날 것이다. 스우파가 일궈낸 멋진 성공은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에 콘텐츠의 앞길을 이와 같이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