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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222_구갑우_평창 임시평화체제에서 판문점 평화체제로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8-05-01 00:28:49
  • 조회수 : 1288
현안과 정책 제222호
평창 임시평화체제에서 ‘판문점 평화체제’로
-제3차 남북정상회담과 연합적 평화의 길- 1)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2018년 4월 26일 한반도의 판문점에서는 평화의 대서사시가 펼쳐졌다. 2017년 4월과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실험이 결합되어 전쟁위기를 겪었음을 생각할 때, 극적 반전의 절정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정부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하고 북한이 핵·미사일실험을 중단하면서 만들어진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산물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사실상의 개혁·개방선언을 했다. 핵을 포기하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도 반영되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문인 판문점 선언은 판문점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연합적 평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의 길잡이가 될 판문점 선언의 주요 내용을 해석하고, 연합적 평화의 길에 놓여 있는 난관을 검토한다.
 
평창 임시평화체제와 제3차 남북정상회담 합의
 
2018년 4월 26일 한반도의 판문점에서는 평화의 대서사시가 펼쳐졌다. 2017년 4월과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실험이 결합되어 전쟁위기를 겪었음을 생각할 때,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극적 반전의 절정이었다. 특히 2017년 11월 29일 북한이 미국본토를 위협하는 핵무기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을 고각발사로 실험하고, “핵무력완성”을 선언했음에도, 이 선언 이후 북한이 계획된 전략수정을 했기 때문이란 가설도 있지만, ‘4개월여’ 만에 남북한이 서로를 주체로 호명하고 인정하는 대서사극이었다. 정상회담의 개최 장소가 판문점 ‘남측지역’이었지만, 판문점이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엔군사령부와 북한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구역이라 할 때, 3차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이 남한을 정전체제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이 ‘4개월여’의 반전의 한반도정세를 평창 ‘임시평화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평창 임시평화체제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평창 임시평화체제가 형성된 원인과 그 체제의 전개과정 속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수 있다.

2017년 11월 13일 제72차 유엔총회에서는 2018년 2월 9일부터 3월 18일까지 개최되는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 동안 군사적 분쟁을 중단하자는 ‘휴전(truce) 결의안’(“Building a peaceful and better world through sport and the Olympic ideal”)을 채택했다. 핵심 내용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통행, 접근,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올림픽 기간의 휴전은, 기원전 9세기 고대올림픽 기간 ‘휴전’(ekechei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1993년부터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으로 채택되어 왔다. 2017년 9월 한국이 초안을 제출한 이 결의안에는, 한반도적, 동북아적 특수성도 담겼다. 2018년 평창올림픽은 2020년 토쿄올림픽, 2022년 베이징올림픽으로 이어지는 최초의 3연속 동북아 올림픽의 시발점이었다. 휴전결의안을 알린 국제올림픽위원회 보도자료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차기 올림픽 개최국인 일본, 중국, 프랑스, 미국이 결의안의 합의에 포함되었음을 강조했다. 이 결의안에는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 발전, 관용, 이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의미 있는 기회”로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이 표현되었다. 휴전의 기간은,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전후 일주일이 포함된 2월 2일부터 3월 25일까지였다.

그러나 유엔총회의 휴전결의안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도발은 아니었지만 2017년 11월 20일 미국은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미국은 2008년 11월 북한의 핵불능화의 대가로 테러지원국 지정을 철회했었다. 2017년 9월 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맞서 2017년 9월 11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유류공급 제한, 북한 섬유 및 의류제품 수출금지, 북한 선박에 대한 검색, 북한의 노동자의 해외송출 제한 등의 내용을 담은 보다 강화된 대북제재 결의안 2375를 채택한 바 있었다.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이 대북제재의 연장이자, 군사적 긴장을 야기할 수 있는 ‘정치적 도발’이었다. 11월 29일 북한은 자신의 핵억제력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실험을 하고, 정부성명으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대북제재의 강화와 북한의 핵·미사일실험 재개라는 한반도 국제정치의 법칙과도 같았던 악순환의 극단인 전쟁위기가 2017년 11월 말 그 모습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그러나 정세를 역전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19일 서울에서 강릉을 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평창올림픽 미국 주관 방송사인 NBC와 회견하면서, 북한인 도발을 중단한다면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과 겹칠 수 있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2015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과 자신의 핵·미사일실험의 중단을 교환하는 이른바 ‘쌍중단’을 제안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도 이 의제를 재설정한 바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12월 19일 기차회견은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이란 천재일우의 역사적 계기 속에서 평창 임시평화체제를 형성할 수 있게 만든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의 종언이 선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전협정’(armistice agreement)으로 소극적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유엔총회 결의안을 수용하여 일시적이지만 역사상 최초로 일방적 ‘휴전’(truce)을 통해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 평창 임시평화체제였다.

두 측면에서 평창 임시평화체제는 미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예시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첫째, 문재인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처럼 군비증강을 통해 자신의 안보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행위가 상대방의 군사적 대응을 야기해 자신의 안보이익을 감소키는 한반도 ‘안보딜레마’(security dilemma)의 한 축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선제적으로 연기했다. 즉 한미동맹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안보딜레마를 벗어나고자 했다. 둘째, 안보딜레마의 탈출을 위해 북한이 제안한 쌍중단을 사실상 수용했다. 안보딜레마 게임에서 선제적으로 양보와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2017년-2018년의 촛불혁명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없었다면, 한반도에서의 전쟁불가란 원칙을 제도화하는 방식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면,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이 없었다면, 한미동맹의 한 당사자인 미국이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북한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정부는 1월 2일 남북회담을 제안했고, 1월 4일 한미 정상은 전화통화를 통해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연기에 합의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제재 국면에서 열리는 남북대화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하여 어떠한 언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리는 남북대화와 사실상의 쌍중단에 동의한 것이었다. 1월 9일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북한의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참가가 결정되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의 김여정 조선로동당 제1부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대남특사의 자격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리고 3월 5일-6일 북한을 방문했던 남한의 특사단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4월말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북한이 체제안전이 보장되면 한반도 비핵화의 길을 가겠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언명과 함께였다.

2018년 3월 29일 남북한은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시간과 장소를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으로 확정했다. 북한은 4월 9일 조선로동당 정치국회의를 거쳐 10일 남북정상회담의 시간과 장소를 보도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5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던 것처럼, 2018년 3월 25일-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국을 방문했고, 하루 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시간과 장소가 확정되었다. 3월 31일-4월 1일 한국예술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초 복잡한 정치일정 때문에 1일 공연에 참석했다고 말했을 때,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이자 당시 국무장관 내정자였던 마이크 폼페이오(M. Pompeo)도 3월 21일-4월 1일, 아일랜드섬 평화과정이 1998년 부활절 바로 전 금요일인 성금요일에 타결되었던 그 날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 날에, 평양을 방문했다. 폼페이오 내정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비핵화 의지와 북한이 원하는 체제안전 방안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북한의 조선로동당 정치국원인 리용호 외무상이 아제르바이잔(Republic of Azervaijan)의 수도 바쿠(Baku)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국제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기”(Promoting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for Sustainable Development)란 주제로 열린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작은 국가의 주권이 큰 국가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침해되고 있음을 언급하며 국제적 정의(justice) 없이 국제평화와 안보, 지속가능한 발전은 없음을 강조했다.2) 그리고 리용호 외무상은 투르크메니스탄을 경유하여 러시아를 방문해 10일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했다. 러시아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환영의사를 표했고, 남북러 경제협력 추진의tk도 밝혔다. 남북관계의 발전방향과 북미대화 전망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한 4월 9일 북한 조선로동당 정치국회의는 이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의 개혁·개방 선언(?)과 제3차 남북정상회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19일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연기를 제안했을 때, 북한은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의외의 반응은, 2017년 12월 23일 북한은 평양시 외곽에 “강남경제개발구”를 설립하겠다는 발표였다. 도농복합도시인 평양의 강남군 고읍리는 2007년 11월 남북한이 양돈협력사업을 모색했던 장소다.

북한은 2013년 3월 경제건설과 핵무장을 동시에 진행하는 이른바 ‘병진노선’의 수립 후인 2013년 5월 「경제발구법」을 제정하고, 10월에는 경제개발구 사업을 추진하는 중앙기관으로 ‘국가경제개발위원회’와 민간단체의 형태인 ‘조선경제개발협회’를 설립했다. 2013년 10월에는 ‘개성첨단기술개발구’ 추진을 발표하고, 11월에는 ‘개성고도과학기술개발구’ 착공식을 진행했다. 2013년 11월 21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13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와 중앙급으로 ‘신의주 특수경제지대’를 지정했다. 현재까지 북한의 경제개발구는 기존의 라선과 같은 경제특구를 포함하여 19개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의 경제개발구 만들기는, 1980년 중국이 개혁·개방의 일환으로 선전(深圳)을 경제특구 1호로 지정하고 1984년 경제기술개발 제도를 실시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외자유치정책이자 김정은시대 병진노선 속의 경제발전노선이었다.3)

그러나 2013년 3월부터 김정은정권은 핵개발에 방점을 찍은 병진노선을 전개하면서, 4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인공위성 발사를 포함하여 11여회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실험을 했다. 2013년 3월과 4월에는 헌법개정을 통해 핵국가를 전문에 포함시켰고, “자위적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한 법령”을 국내법으로 제정하기조차 했다. 그리고 북한의 핵·미사일실험이 있을 때마다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이 채택되고, 북한의 핵·미사일실험이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맞물릴 때마다, 한반도 안보딜레마는 심화되었고 분단국가들 사이의 안보딜레마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전쟁위기가 초래되곤 했다.4) 이 위기의 전개 속에서 정치군사적 안정을 투자의 한 조건으로 생각하는 국제자본을 북한의 경제개발구에 유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018년 4월 20일, 북한은 2013년 3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발전을 이룩할수 없다고 위협공갈하는 동시에 다른 길을 선택하면 잘살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회유”는 거부한다고 말하며 병진노선을 선택할 때처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근본적인 노선전환을 밝혔다. 핵국가 대신 “전략국가”란 표현을 사용하며,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병진노선의 “력사적승리”를 선언하고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할데 대한 새로운 전략적노선”을 제시했다. 첫 번째 중앙위원회 결정서인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병진로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함에 대하여”(On Proclaiming Great Victory of the Line of Simultaneous Development of Economic Construction and Building of Nuclear Force)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5)

첫째, 핵·미사일실험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여” “핵무기병기화”(the work for mounting nuclear warheads on ballistic rockets)를 실현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2018년 4월 21일부터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실험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장을 폐기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셋째, 핵실험 중단이 “세계적인 핵군축”(worldwide disarmament)의 과정이며 “핵실험의 전면중지를 위한 국제적인 지향과 노력”에 합세하겠다는 것이다. 넷째, 북한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섯째, “강력한 사회주의경제(powerful socialist economy)를 일떠세우고 인민생활(people’s living)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투쟁에 모든 힘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여섯째, “사회주의경제건설을 위한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며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하여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련계와 대화(close contact and active dialogue)를 적극화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결정서는 무엇보다도 2017년 12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사실상의 쌍중단을 수용하면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선제적으로 연기했지만. 북한은 암묵적으로 핵·미사일실험의 중단의사를 밝히거나 2018년 3월 5일 대북특사가 방북했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구두로만 밝혔던 사실상의 쌍중단 수용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일차적 의의가 있다. 즉 평창 임시평화체제가 체제(regime)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했던 공유된 규범(norm)이었던 사실상의 쌍중단을 북한이 공식적으로 수용한 결정이었다. 남한은 4월 23일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을 야기하는 장치 가운데 하나였던 대북 확성기방송을 중단하는 조치로 북한의 결정에 호응했다. 또한 4월 23일부터 시작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키리졸브 연습에도 핵관련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예전과 같은 참수작전이나 상륙작전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언론을 통한 훈련공개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획 결정서에서 자신의 핵실험의 중단을 1996년 9월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지만 결국 미국은 참가하지 않은 ‘핵무기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Nuclear Test Ban Treaty, CTBT)과 암묵적으로 연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017년 7월 ‘핵무기폐기국제운동’(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 ICAN)이 핵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 통과시킨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과는 암묵적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전략국가”가 된 조건 하에서 비핵화과정이 핵군축이며 핵선제공격과 핵확산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포명이었다. 핵군축이 미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라면, 핵비확산은 미국의 우려를 반영한 발언이었다.

4월 20일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두 번째 결정서는, “혁명발전의 새로운 높은 단계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할데 대하여”(On Concentrating All Efforts on Socialist Economic Construction to Meet Requirements of New High Stage of Developing Revolution)였다. 주요 내용은,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기 위한 투쟁에서 당 및 근로단체조직들과 정권기관, 법기관, 무력기관들의 역할을 높일것이”고 “각급 당조직들과 정치기관들은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전원회의 결정집행정형을 정상적으로 장악총화하면서 철저히 관철하”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서에 제시된 과업을 관찰하기 위한 법적, 행정적,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남긴 시점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는, 경쟁하는 해석이 나을 여지가 있지만, 이른바 개혁·개방을 결정했다고 알려진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의’를 연상하게 한다.6)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의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문제들의 해결과 사상해방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경제개혁의 토대인 정치개혁을 만든 중대한 전환점이었지만, 경제와 관련하여 “당 사업 중심의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의 전환”이란 표현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결절점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는 11기 3중전회의를 역사적 전환점이라 평가했다.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의 이전에 36일 동안 중국공산당의 ‘중앙공작회의’와 같은 회의가 북한에서 개최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4월초 복잡한 정치일정을 언급했을 때, 중앙공작회의와 비슷한 제7기 3차 전원회의를 위한 준비모임들이 있었으리라 추론해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의와 조선로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의 차이는 후자가 역사적 전환을 “새로운 전략노선”(new strategic line)으로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경제에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새로운 전략노선이 핵무기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던 “보검”(treasure sword)의 또 다른 형태라 묘사하고 있다. 중국은 1978년 12월 개혁·개방선언을 한 후 1979년 1월 미국과 수교했다. 소련을 포위하려는 미중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1980년 4월 중국은 시장경제로 이행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만을 대신하여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World Bank) 회원국이 되면서 자본주의세계체제에 참여하여 자금지원을 받으며 국제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위해 필요했던 세 요소가 중국공산당의 정책전환, 미국과의 수교, 국제경제기구 가입이었다.7)

북한은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두고, 후대의 평가로 판단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개혁·개방을 선언했다. 2017년 12월 21일 북한이 사회주의의 “심장”이라 부르곤 하는 평양시 주변에 ‘강남경제개발구’를 지정한 것은 이 개혁·개방을 암시하는 전조였을 수 있다.8) 중국공산당이 1978년 12월 발표한 11기 3중전회의 “공보”(公報)에서 쓴 “사회주의 현대화된 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장정”이란 표현과 닮은꼴을,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하고 그 이유를 미제의 적대시정책 때문이고 궁극적으로는 핵페기를 위한 핵개발이란 이유를 달았고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그 논리를 반복했던 것처럼 거기에 더해 평화애호국가나 평화애호인민이란 표현조차 반복했던 것처럼, 담은 조선로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 이후 북한은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나섰다. 평창 임시평화체제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로 가는 제도화의 시발점이 되는 중대국면(critical juncture)에서 북한은 개혁·개방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북미수교로 가기 위해, 한국의 언론이 예측하지 못한 베이징을 경유한 이후,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과 ‘연합적 평화’의 길: ‘판문적 평화체제’
 
2018년 4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북한의 표준시로는 9시경,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사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르면 판문점에는 군사분계선이 없었다. 1976년 8월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군이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를 자르려 할 때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장교 두 명을 살해했고, 이 사건 이후 정전협정의 부속조항의 보충조항으로 판문점 내에 군사분계선이 마련되었다. 그 군사분계선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넘나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점 북측지역에 발을 디딘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순간적 초대로 가능했다. 군사분계선이 ‘평화분계선’이 되는 순간이었다. 평화는 분리와 통합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분리를 통한 평화도 통합을 통한 평화도 있을 수 있다.

판문점 남측지역에 진입한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한민국 군의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측보다 전향적인 말을 쏟아냈다. “잃어버린 11년”이란 말로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2018년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혔다. 남북한의 합의가 실행되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반성과 함께였다. 방명록에는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썼다. 문재인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의 표어를 “평화, 새로운 시작”으로 쓴 것과 상통하는 표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심은 정전협정과 같은 나이인 1953년생 소나무 앞의 표지석도, 노무현정부의 두 구호를 담은 “평화와 번영을 심다”였다. 그 장소는 남북한의 기능주의적 협력의 문을 연,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지난 군사분계선 인근의 길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일정은, 정상회담 전 날인 4월 26일, 대통령 비서실장인 임종석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일산의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공개한 서사극의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않았다. 각본에 없던 장면은, 점심 직후의 정상회담이 취소되고 남북정상이 수행원 없이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도보다리”에서 30여분 동안 회담을 진행했던 것이었다.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한 대화가 오고 갔을 거란 추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 독대는 남북정상의 개인적 신뢰구축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되었다. 임종석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제시한 시나리오의 또 하나의 밖은, 정상회담의 의제였다. 임종석 준비위원장은 26일 브리핑에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에 집중된 회담이라 밝힌 바 있다. 예상되는 합의문과 관련하여서도 “정상들의 몫”이란 여운을 남겼다. 남북관계와 관련된 합의는 부차적일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긴 브리핑이었다.

그러나 4월 27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 종료 후 발표된 합의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은, ‘남북관계의 발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합의문 제목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과 비슷한 제목이지만, 남북관계는 “한반도”로 바뀌었고, “통일”과 “판문점”이 추가되었다. “한반도”란 표현은 두 주체의 관계보다는 한 주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판문점”이란 표현은 분단과 정전의 상징을 드러낸다. “판문점 선언”(Panmunjom Declaration)은 정전체제인 ‘판문점 체제’를 남북이 주체가 되어 ‘판문점 평화체제’로 바꾸겠다는 의지로 읽힌다.9) 판문점 선언의 전문은,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을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는 것이었다.

“통일”이 담긴 제목은 처음이다. “남북공동선언”이란 제목을 단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까리”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등이 내용으로 담겼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는, 6·15공동선언의 “고수”와 “구현”과 더불어 “남북관계 문제들을 화해와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 나가기”,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등으로 통일이 언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6일 ‘신베를린선언’을 통해 북한의 붕괴나 흡수통일 또는 인위적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던 만큼 남북 모두 통일을 합의에 의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통일이란 표현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세 주제로 구성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 안보딜레마의 탈출, 즉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평화에서 구조적 폭력의 제거된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사회·문화·경제교류, 즉 기능주의적 협력을 통한 길과 평화의 제도화의 길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길은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안보까지 포함하여 공동의 이익을 모색하는 ‘연합적 평화의 길’로 정의할 수 있다. 지구화 시대에 주권국가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면서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규범적 처방인 ‘연합적 거버넌스’(confederal governance)는, 주권국가체제의 대체가 아니라 그 체제에 접목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관계 및 정치적 질서의 도입, 안보에 초점을 맞추는 거버넌스의 형태, 이 거버넌스 형태의 경제적 영역으로의 확장, 각 구성국가 시민의 일상을 최소한으로 침범할 정도의 최소주의적 거버넌스 형태, 거버넌스 형태에 부과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수입의 원천확보, 소속된 주민들이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인 연대의 형성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10)

연합적 평화의 길은, 개인, 사회, 국내정치, 남북관계 및 한반도, 주변국과의 양자관계, 다자적 관계 등 각각의 수준에서 규범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후 연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연합적 평화의 길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다. 이 시각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의 주요 내용을 해석하고, 그 길 위에 놓여 있는 난관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판문점 선언 ‘이후’를 예측해 본다.

(1) 합의문 1항: “남과 북은 남북 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다”

합의문 1항의 ①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이다. 북한은 2017년 6·15공동선언 17주년을 맞이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발표한 남북관계 발전과 통일에 관한 입장을 2017년 6월 23일 ‘민족화해협의회’의 공개질문장 형태로 남한에게 물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이었다. 첫 번째 질문이, “외세와의 공조를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리념에 토대하여 북남관계를 자주적으로 풀어나갈 의지가 있는가”였다. 이른바 민족공조의 대척에는 ‘한미동맹’이 있었다. 이 질문장에는 핵문제가 남북대화의 의제가 아님을 밝혔지만, 판문점 선언에서 핵문제가 논의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족공조 대 한미동맹이란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북한이 포기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북미관계의 정상화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민족 자주의 원칙”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다가올 북미정상회담에서 핵문제에 대한 일괄타결이 이루어질 때, 북한은 어떠한 형태든 한미동맹을 인정하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후 한 연설에서, “혈육”, “동족”, “민족”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남북이 “하나의 핏줄, 하나의 언어, 하나의 력사, 하나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북한은 1964년부터 언어에 강조점을 둔 스탈린적 민족개념을 수정하여 “피줄과 언어”를 민족의 구성요소로 설정한 바 있다. 김일성 주석의 이 수정을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계승해서 1980년대 중반 핏줄의 공통성이 인종학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은 ‘김일성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고, 2015년 8월 15일 탈식민적 기획의 하나로 표준시를 30분 늦춰 동경(東經) 127도 30분(국제표준시(UTC)+8시간 30분) 기준으로 변경하고, 이를 ‘평양시간’으로 불렀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3일 후인 2018년 4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평양시간을 다시금 동경 135도의 ‘서울시간’으로 재조정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구두로 통보한 조치를 실행에 옮긴 사건으로, 민족개념의 사실상의 재수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변화였다.
1항의 ②의 내용인 남북관계의 개선과 발전을 위한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대화와 협상”은 정상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조명균 통일부장관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축으로 하는 고위급회담, 장성급 군사회담, 군사당국자 회담이 열릴 것이지만, 남북경제협력과 관련한 대화와 협상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해제되지 않는 한 의제로 상정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북한으로 초청하면서 비행기를 이용할 것을 권유하면서 평양에서 판문점까지의 도로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 것은 파격 가운데 최고의 파격이었다. 우회적이지만 북한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경협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분야보다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북미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전제 하에, 대북제재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냈다는 미국의 인식을 수정할 수 있는 담론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방법을 설계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반도 핵문제와 관련하여 양심적 중재자가 되고자 하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스웨덴이 대북제재의 해제를 제기하게끔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항의 ③은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joint liaison office)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성이란 지역에 설치하는 합의는 개성공업지구의 재개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공동연락사무소는 연합적 거버넌스의 제도화란 폭발력을 담지하고 있다. 공동연락사무소에 파견되는 남북 “당국자”의 지위에 따라 공동연락사무소는 남북이 안보를 포함한 공동이익 또는 한반도적 이익을 관리하는 초국가성(supranationality)이 내장된 ‘한반도 기구’가 될 수도 있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만들어진 유럽적 이익을 관리하는 초기의 초국가 기구인 ‘고등행정청’(high authority)이나 현재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맹아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1항의 ④⑤은 이산가족 상봉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교류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사실 평창 임시평화체제와 이후의 대화국면은 시민사회의 개입이 배제된 채 정부중심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남한 시민사회의 촛불혁명과 반전·반핵·평화운동이 사실상의 쌍중단을 이끌어낸 동력 가운데 하나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정치군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시민사회의 교류협력을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의 여부다. 대북제재가 하나의 장벽이라면 남남갈등은 또 다른 장벽이다. 남북 시민사회의 교류협력이 판문점 평화체제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한반도의 ‘평화만들기’, ‘사회만들기’, ‘경제만들기’의 역할을 한다는 전환적 사고가 요구된다. 평화는 궁극적으로 “공감, 비폭력, 그리고 창조성을 가지고 갈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11) 이 능력의 제고가 평화교육이고 그 교육의 주체는 바로 시민사회다.
1항의 ⑥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언급하고 있다. 2007년 10·4공동선언의 연장이다. 구체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의 연결이 제시되고 있다. 경제와 평화가 선순환하는 방식으로 판문점 평화체제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걸림돌은 역시 대북제재다. 관념적 문제이지만, 스탈린적 민족정의의 한 구성요소였던 ‘경제생활’을 민족개념에서 삭제했던 북한이 민족개념을 재정의하는 방식으로 대응할지도 주목의 대상이다.
다른 한편 “민족경제”를 ‘한반도 경제네트워크’란 상상력으로 확대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신북방정책과 신남방정책이 북한경제와 연계되는 방식에서 협소한 의미의 ‘민족경제’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동북아 경제협력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개성공업지구에 외국자본이 들어와 있었다면, 남북한 모두 개성공업지구의 일방적 폐쇄를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을 아시아투자은행(AIIB)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가입하게 하여 북한의 인프라 재건과 같은 사업에 소요되는 자본을 국제적으로 동원하여, 북한의 개혁·개방을 비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단 이 경로를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경제기구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 UNDP가 개입할 수 있는 남북러협력도 한반도 경제네트워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북한의 정상적인 국제경제활동을 가로막는 미국 국내법의 개폐가 요구된다. 북미관계의 개선과정이 고위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타협과 합의뿐만 아니라 북한을 악마화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결정자, 의회, 전문가, 시민사회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공공외교와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2) 합의문 2항: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다”

합의문 2항은 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적대행위의 중단과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의 평화수역화 등이 주 내용이다. 적대행위의 중단은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사실상의 쌍중단으로 그 일단을 드러낸 상태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는 정전협정의 준수이면서도 보다 적극적인 평화를 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남북이 ‘대인지뢰금지협약’(Mine Ban Treaty, Ottawa Treaty)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에 대한 국제적 약속을 할 수도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의 평화수역화는 박근혜 대통령을 선출한 대통령선거에서 드러난 것처럼 남남갈등의 폭발을 내장하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판문점 선언이 마련되면 국회비준을 받겠다고 했지만, 정상회담 이후 만찬에 야당인사로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민주평화당의 박지원의원만 참여한 듯 보인다. 판문점 평화체제의 국내적 토대 또한 연합적 길을 필요로 한다. 승자독식을 배제하고 권력분점을 추구하는 협의주의(consociationalism)를 제도화할 수 있어야 한다. 판문점 평화체제 구축의 최대의 걸림돌은 한국과 미국의 국내정치일 수 있다. 두 국내정치에서 모두 평화협정의 입구론, 남북의 민족공조, 비핵화에 대한 대가지불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3) 합의문 3항: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다”

합의문 3항은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1차, 2차와 구분되게 만드는 부분이다. 북한이 핵억제력을 확보하려는 정세 하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남북대화에서 최초로 한반도 비핵화가 의제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합의문 3항의 ①은 “불가침”의 재확인이었다. 소극적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 원칙이다. 남북은 반복적으로 불가침을 언급해 왔다. 그러나 불가침의 물적 토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합의문 3항의 ②에 “군축”이 등장했다. 한반도 안보딜레마의 근본적 탈출을 모색하려는 남북의 의지의 반영이다. 북한은 1960년 4·19혁명 직후부터 남북의 병력을 10만 이하로 줄이는 것을 포함한 군축제안을 해왔다. 군사적 신뢰구축, 운용적 군비통제, 구조적 군비통제를 거치는 군축의 과정은, 남북 모두에게 군사적 방법에 의한 안보와 방위라는 기존 패러다임의 전환을 야기하게 할 수 있는 평화체제 구축의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다. 더불어 “군축”이란 의제는 국방비의 축소가 복지비의 증가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전환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평화는 복지의 토대이고, 복지는 적극적 평화의 한 형태다.
합의문 3항의 ③은 2018년 안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담고 있다. 정전협정 4조 60항에 근거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한 구성요소로서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화했다는 점에서 판문점 선언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두 가지 쟁점을 해결해야 한다. 첫째,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란 의제가 일괄타결의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비핵화의 실행과정에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라 하더라도 상당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비핵화의 과정 중에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둘째,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는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 1990년 후반의 4자회담, 2005년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에서 지속적으로 쟁점이었다. 2007년 10·4공동선언에서 3자 또는 4자가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다고 했던 것처럼, 판문점 선언에서도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이 언급되었다. 북한은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했고 중국이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긴장을 야기하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긍정적 이유로 중국을 평화협정의 당사자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8년 3월 25일 전격적인 중국방문은 대북제재의 실질적 해제를 의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북한의 ‘친미국가화’를 경계하는 중국의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은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미중의 양자회담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한중정상회담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가능하다면, 북중관계는 물론 한중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관계까지 평화체제 구축과정에 고려되어야 한다면, 남북미중의 평화협정 체결이 적절한 대안으로 보인다.
합의문 3항의 ④는 “완전한(complete) 비핵화”와 “핵 없는 한반도”(a nuclear-free Korean peninsula)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에 대한 확인이다. 예측과 달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정상회담에서 “주동적으로” 제기했다고 한다. 북미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의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도 5월 중에 공개적으로 폐쇄될 예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한 3항의 ④는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길잡이로서 간략하게 제시되었다.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verifiable), 비가역적인(irreversible) 핵폐기 가운데 검증과 비가역은 남북대화의 의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호하게 표기되었지만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한 핵심 쟁점은, “핵 없는 한반도” 또는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있다.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던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안전이 평화협정과 같은 ‘종이뭉치’로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북한이 자국의 비핵화에 동의하더라도 한반도 차원의 비핵화가 담겨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한국정부는 평창 임시평화체제에서 드러나듯 한반도 비핵화, 한미동맹의 지속, 한반도 평화체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삼각모순(trilemma)에 직면해 있다. 북핵 대 한미동맹이 서로 적대적으로 경쟁해 온 한반도 안보딜레마를 한 축의 조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북한은 비핵화의 대가로, 주한미군의 철수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의 폐기는 아니지만, 언론보도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 핵 전략자산의 한국에서의 철수”, “한미 전략자산 훈련 중지”, “재래식 및 핵무기 공격 포기”, “평화협정 체결”, “북미수교”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즉 한미동맹의 인정과 수정이 폼페이오 내정자가 종이뭉치에 더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미국의 매티스(J. Mattis) 국방장관은 2018년 4월 27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미협상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이 의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만약 한미동맹의 수정이 의제화된다고 할 때, 두 쟁점이 발생할 수 있다. 첫째, 한국 내에서의 반대다. 둘째, 북한이 미국과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평화적인 관계정상화에 도달하면서 한미동맹의 수정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 수정된 한미동맹의 존재이유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중국에게 새로운 한미동맹은 중국견제용으로 읽힐 수 있다. 한중정상회담과 남북미중의 평화협정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다.

(4) 판문점 선언의 말미에는 남북정상의 정기적인 회담과 직통전화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신뢰구축의 첫 단계이자 연합적 거버넌스의 대표적 형태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 가을에는 북한이 2018년 신년사에서 “민족적 경사”로 치르겠다고 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이 되는 9·9절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2018년 8월에 개최예정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어떤 형태로 조절될 것인가도 문재인 대통령의 가을 평양방문과 연계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북한이 대한민국 국가창건 70주년이 되는 8·15에 대표단을 파견한다면, 남북과 주변국들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연합적 평화의 길을 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이 글과 관련하여 토론과 자료를 제공해 주신 프레시안의 박인규 대표와 중앙대학교의 이혜정 교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https://news.az/articles/politics/130134.
  • 경제특구는 라선(1991), 황금평·위화도(2010), 개성(2002, 2013), 금강산(2002), 신의주(2002, 2013) 등이 있고, 경제개발구는 2013년에 지정된 와우도수출가공구, 압록강경제개발구, 만포경제개발구, 위원공업개발구, 북청농업개발구, 흥남공업개발구, 어랑농업개발구, 청진경제개발구, 온성섬관광개발구, 혜산경제개발구, 현동공업개발구, 신평관광개발구, 송림수출가공구 등이 있고, 2014년에는 청수가 관광개발구로, 진도가 수출개발구로, 숙천이 농업개발구로, 은정이 첨단기술개발구로, 강령이 국제녹색시범구로 지정된 것처럼 보인다. 퉁일부 『북한종합포털』의 http://nkinfo.unikorea.go.kr/nkp/trend/viewTrend_m.do?diaryId=116976&trendMenuId=ECNMYISS와 산업은행 『북한이슈』의 “북한 경제특구·개발구의 현황 및 전망” http://businessnews.chosun.com/nmb_data/files/economic/kdb_28.pdf 참조.
  • 구갑우, “북한 핵 담론의 국제정치: 북한적 핵 개발의 이유와 김정은 정권의 핵 담론,” 『동향과 전망』 99 (2017).
  • 북한의 기간 통신사인 『조선중앙통신』은 영문으로도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의 국문기사와 영문기사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문기사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보내는 신호이기에 국문기사보다 온건한 내용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 영문기사에서는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첫째 의정”에 대한 보고를 한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인 최룡해, 내각총리 박봉주, 총정치국장 김정각 등이 토론하면서 북한을 “전략국가”로 언급한 부분이 있지만, 영문기사에서는 그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국문기사와 영문기사에서 모두 김정은(Kim Jong Un)을 굵은 글씨로 표기하면서도 3인칭으로 지칭할 때 국문기사는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으로 쓰지만 영문기사에서는 3인칭 단수인 “He”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중국정치 연구자인 인천대학교 안치영 교수의 지적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의 11기 3중전회의에 대한 이 글에서의 인용은, 안치영, “모호한 전환점: 중국공산당의 11기 3중전회의에 대한 재고,” 『국제·지역연구』, 17: 4 (2008) 참조.
  • 베트남은 1976년 9월 IMF에 가입했고, 1986년 12월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모이’를 선택했고, 1995년 7월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 이종석,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와 ‘강남경제개발구’,” 『한겨레신문』, 2018년 3월 26일.
  • 정전체제를 판문점 체제로 정의하는 글은,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서울: 후마니타스, 2015).
  • F. Lister, The European Union, the United Nations, and the Revival of Confederal Governance(London: Greenwood Press, 1996).
  • J. Galtung, C. Jacobsen, and K. Brand-Jacobsen, Searching for Peace(London: Pluto Press,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