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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과 정책 제202호_김학진_사건 인물로 돌아본 2017년 한국의 과학기술계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11-26 13:05:22
  • 조회수 : 1238
현안과 정책 제202호
사건, 인물로 돌아본 2017년 한국의 과학기술계
공론화 위원회, 창조과학, 교육
김학진 (충남대학교 화학과 교수)
넓은 의미에서 정치는 여러 사람들이 관계된 일을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정치적이지 않은 일은 없겠지만 2017년 과학기술계에는 다른 해에 비해 정치와 연관된 일들이 많았다는 느낌이다. 금년에 일어난 ‘사건’과 인물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계를 돌아보고자 한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론화 위원회
 
과학기술과 관련되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위원회이다. 여러 언론 매체에서 공론화 위원회의 활동에 관하여 상세히 소개하였고, 이에 대한 평가와 개선 방향은 3주 전 본 이슈페이퍼에서 다루었지만1)그 중요성에 비추어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전의 건설 재개는 지지하지만 향후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시민참여단의 결정은 과학기술계의 문제를 공론화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는 점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이 결정의 주요 요인에는 전력 공급의 경제성, 지역 및 국가산업, 전기요금, 환경성 등이 있어 과학기술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원전의 안전성과 안정적 에너지 공급이 꼽혔다는 점에서 과학기술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를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결정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견제의 대표적 사례로, 앞으로 과학기술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의 해결책을 결정하는 데 시민의 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원전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뉜다. 안전성 때문에 원전 축소에 찬성하는 측과 원전은 위험하지만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고 실보다 득이 많기 때문에 원전 확대에 찬성하는 측으로 나뉜다. 원전 확대에 긍정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전 전문가들의 주장대로 충분히 안전하다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팽창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원전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의견이다. 필자의 입장은 원전 축소에 찬성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원전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금년에 일어난 사고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8월에 일어난 아직도 그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평택 국제대교 붕괴사고이다. 1994년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사고치고는 아주 조용히 넘어가는 느낌인데, 다행히도 사상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대교 붕괴는 사고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보여준다. 한빛 4호기(원전)의 증기발생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11 cm 길이의 망치 형태 금속 이물질은 환자의 신체 내부에 남겨두고 봉합해버린 수술기구와도 같다. 문제는 이런 의료 사고는 재수술로 수습할 수 있지만 이 망치 형태 물질은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증기발생기에는 외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방사능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증기발생기를 개봉하여 금속 이물질을 제거할 수 없다. 만일 이 망치 형태 물체가 증기발생기에 구멍이 내 방사능 물질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가장 이목이 쏠리는 국가적인 교육 ‘행사’인 수능까지 연기시킨 포항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원전의 부실공사가 안전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평택 국제대교나 한빛 4호기는 현대 기술이 거대하고 복잡하여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국가적인 규모의 안전 문제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번 공론화 위원회의 결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은 지역 및 국가산업이라고 한다. 이는 원전 축소 결정이 국가 경제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독일, 대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탈원전은 이제 세계적인 추세이며, 원전의 안전한 폐쇄 기술은 앞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중요한 기술이 될 전망이다. 원전은 건설 못지않게 폐쇄에도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거대과학기술인 원전 폐쇄에 소요될 엄청난 비용을 사전에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앞으로 이어질 폐로 작업에 필요한 기술 확보는 원자력공학자들이 집중해야 할 당면 과제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인간 세상을 아주 길게 또 긍정적으로 본다면 현재 전세계 핵탄두들에 탑재되어 있는 상상을 넘어서는 양의 방사능 물질을 안전한 폐기하는 기술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이 방사능 물질을 안전하게 이용하는 기술보다 안전하게 폐기하는 기술이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원전을 대신할 에너지원에 대한 시각은 <그림 1>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재생가능(renewable) 에너지의 총량은 원자력 에너지보다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부분은 수력(Hydro)이다. (수력은 재생가능 에너지로 분류된다.) 수력의 성장이 에너지 수요 증가를 감당하지 못하며 다른 재생가능 에너지의 성장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설이 쉬운 원자력 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림 2에 나와 있는 풍력과 태양 에너지로부터 얻는 전력의 성장 곡선은 그런 전망이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재생가능 에너지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성장 속도는 장기적으로 원전을 폐쇄하더라도 재생가능 에너지가 에너지 수요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원에 대한 기술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이다. 관련 장비를 모두 수입하고 거기에 기술료까지 지불해야 한다면 경제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화석 연료, 즉 석유 석탄 천연가스의 비중은 절대적인데, 이를 이용하는 화력발전보다 원전이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탈원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유명 과학자의 지적도 있다. 이는 재생가능 에너지가 가진 잠재력을 원자력보다 낮게 보기 때문인데, 유명 과학자의 중요한 예견은 맞을 때보다 틀릴 때가 더 많다는 점도 염두에 두자.

<그림 1> 세계 에너지 소비 추세2)

<그림 2> 풍력과 태양 에너지에서 얻는 전력 비율 추세3)

시민참여를 통한 원전의 미래에 대한 결정은 전문가주의에 대한 타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많은 현대 과학기술 활동이 국가적 지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당연하지만 전문가 영역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에 의한 통제는 쉽지 않다. 중이온가속기와 같이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거대과학기술 시설 건설에 대해서는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학기술계 내부에 존재하는 세부 분야들을 나누는 칸막이로 인한 또 다른 전문가주의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밀실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JSA 귀순병사 사건과 관련되어 언급된 외상센터 문제는 국민 의료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와 관련된 전공의(專攻醫) 쏠림 현상 방지 정책 역시 의료계라는 매우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전문가 집단이 주도적으로 결장하며, 여기서도 여러 세부 전공의 칸막이에 따른 분야 이기주의가 개입된다. 이런 문제들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라 시민참여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에게 모두 맡기기보다 전문가는 상황 판단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최종 결정은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들은 꽤나 많다.
 
창조과학
 
지난 8월 24일 정부는 포항공대 박성진교수를 신설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후보자로 지명하였는데, 박성진교수는 인사청문회 사흘 후인 9월 15일 사퇴하였다. 문재인 정부의 기조와는 크게 다른 역사관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사퇴에 작용하였겠지만 과학자들의 커다란 반발을 부른 요인은 창조과학이라는 후보자의 과학관이다. 창조과학은 근본주의 신앙에 기초하여 과학을 받아들이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과학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사이비 과학이다. 기독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에서는 창조과학과 관련된 유명한 법정 다툼들이 있었고 대통령을 포함한 유명인들이 이를 옹호하는 공개적인 발언을 하는 지경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공계 현직교수가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삼 심각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답을 찾는’ 학문이 아니라 ‘답을 만들고’ 그 답에 대해 과학자 사회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과학이 만든 답에는 항상 오류가 있어왔으며 어느 과학자도 현재의 과학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사, 문학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 분야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 과정에도 포함시킨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과학사에 도입된 이래 과학사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 여러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과학사를 예비과학자인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하는지는 논쟁거리였다. 과학사에서 다루는 고대 그리스, 중세, 근대 과학은 현대 과학에 비추어보면 오류로 보이기 때문에 과학사가 예비과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과학사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그 내용으로부터 잘못된 개념을 습득할 수도 있고, 선배 과학자들을 멍청한 사람들로 오해할 수도 있다. 과학은 주어진 증거들로부터 그에 대한 답을 만드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그 답은 항상 불완전했으며 계속 불완전할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과학이 만든 답에 대한 끊임없는 크고 작은 수정 과정들로 이루어진다. 창조과학은 이런 과학의 본질을 망각하고 실재를 왜곡하는 데 과학의 이름을 사용한다. 박성진교수 ‘사건’은 이런 왜곡 현상이 사회적으로 그 세를 불려 과학에,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지진이 정부 탓이라는 생각은 창조과학과 맥을 같이 하며, 일식(日蝕)이 임금의 실정 때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세태를 일과성이라고 넘겨왔기 때문에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과 증거를 통해 성경 내용을 정당화하려는 창조과학은 과학을 도구로 보는 시각의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을 도구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말 서양의 과학기술에 압도된 동양에서 내세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사가 깊으며,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학을 일종의 물리적 도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만든 설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지식체계로, 유력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면에서 과학은 기(器)라기보다 도(道)이다. 현대 과학이 높은 수준의 기술에 힘입어 발전하고 있고, 과학 지식이 기술로 매우 빠르게 응용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과학 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받기 위해 과학의 경제적 가치를 과장하고 강요받은 역사적 배경도 과학과 기술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구로 동일시하는 분위기에 일조하였다.

과학을 경제적 도구를 넘어 정치적 도구로 생각한 결과가 과학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친 예는 쉽게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을 홀대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홀대한다는 표현은 과학을 정치적 도구로 생각하여 지원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노벨상과 같은 대중적 선전 효과에 중점을 두고 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예는 황우석 사건인데, 이 사건에서 황우석 개인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를 이용하려는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 8월 7일 과학기술 혁신본부장에 선임되었다가 서울대 교수들의 퇴진 서명 운동이 있었던 8월 11일 사퇴한 박기영교수의 재등장 시도는 문재인 정부가 가진 과학기술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 사건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황우석 사건에 깊이 연루된 박기영교수를 재기용하려 한 것은 황우석 사건에서와 같이 과학을 정치적 도구로 생각하여, 선전 효과가 큰 신화를 재현하고 싶은 욕구를 과학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이 든다.

두 박교수 ‘사건’은 한국 과학기술계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준다. 박성진교수와 관련하여 등장한 ‘생활보수’라는 표현은 과학기술자를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며, 박기영교수의 재등장 시도는 정치적 도구화에 부응할 수 있는 경우에만 과학기술자가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자괴감을 갖게 한다. 이는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제대로 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자들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시스템을 갖추지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과학이 그 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가치 창출의 도구인 하드웨어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방식의 틀을 제공하는,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역할 역시 수행하고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산시키기 위한 시스템이 미흡해 보인다.
 
다른 교육과 다르지 않은 과학교육
 
과학기술이 인문 사회과학의 대상과 동떨어진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이들 학문 분야들과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론적인 면에서 다른 학문 분야와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을 추동하는 메커니즘 역시 교육과 연구인데, 둘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며, 교육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17년 대통령 선거 과정 중에 한국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안철수 후보의 연설 목소리였다. 그의 연설 목소리는 웅변 전문가에게도 새로운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라도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하여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으며, 의학박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공계 교육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람인데, 그가 겪어온 모든 교육 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독학’이며, 이는 한국 교육의 중요한 특성이다.

40여 년 전 이루어진 고교 평준화 이후 중고등학교 수업은 대체적으로 하향평준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우수한 학생들이 학교 수업에서 새로운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배울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평준화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 평준화 이후 그 정도가 심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고교 평준화의 공과를 논할 의도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 강의 중 질문하는 학생은 거의 없으며, 간혹 새로운 교수법을 시도하는 교수들이 있긴 하지만 학생이나 교수에게나 모두 낯설다. 많은 대학교수들은 자신이 경험한 배움의 방식에 기초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이 결과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의 대부분은 흔히 가장 중요한 공부 방법이라고들 말하는 ‘독학’으로 채워진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50 과목 이상의 강의를 수강하였겠지만 기억에 남는 강의를 꼽는 일은 교수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석-박사 과정에서의 주된 배움의 방식은 여전히 ‘독학’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교육을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근래의 풍경은 공교육의 기능이 학생을 평가하는 것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선행 학습 과목은 주로 수학과 과학인데,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선행 학습은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런 교육 환경은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교사의 역할은 배움의 범위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며, 교사로부터 모르던 것을 배웠다는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면에서 학생들은 ‘독학’을 하고 있다. 궁금한 것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 깨닫는 가장 편리한 배움의 방식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던 식민지 시대의 교육 분위기가 쇄신되지 못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학’으로 경험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과 배려이다. 소통과 배려를 경험해보지 않고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 사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 사람들은 이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를 실천하기도 힘들다. ‘배려 없음’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교육 환경도 분명히 일조하고 있다.

현역 시절 ‘독학’으로 뛰어난 선수였던 감독이 부진한 선수들을 배려하여 지도하기보다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질책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도 아니다. 특정할 필요도 없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전공의들에 대한 의대 교수들의 ‘갑질’은 그들이 배려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면 당연한, 자신이 경험하였던 학창시절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려는 배려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학창시절과 비교하며 퇴행적 ‘갑질’을 하기 쉽다. 지난 6월 일어난 모 대학교수에게 일어난 폭발물 배달 사건의 원인이 오롯이 폭발물을 만든 학생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갑질’, 성범죄 등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위협 받는 직업 중 하나로 교사가 꼽힌다. (어떤 사람은 교사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망 직종이라고 한다.) 훌륭한 ‘독학’의 방편으로 인터넷 강의와 인공지능을 통한 교육이 보편화되겠지만 이를 통해 교육받은 학생들을 다른 이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쌍방향 대화를 잘 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국에서 소통과 배려에 능한 ‘좋은’ 교육용 인공지능이 만들어지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새로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은 엄청나지만 제대로 된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과 배려의 경험이 절실하다.

  • 2017년 11월 6일 프레시안 발간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박태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평가와 개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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