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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새판짜기’가 필요한 이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7-01 10:44:25
  • 조회수 : 1528

경향신문 오피니언[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 산길을 내려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손전등이 있다면 도움이 될까?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고, 일행이 여러 명 있다면 손전등은 오히려 하산을 지체할 수 있다. 손전등은 시야를 제한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는 반면, 손전등 없이 어둠에 적응하면 오히려 빨리 걸을 수 있다. 미국에서 어떤 철학교수가 실화라며 해준 얘기다. 그는 넓은 시야의 이점을 강조했는데, 필자는 이와 함께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중요성도 지적하고 싶다. 지난 20년 동안 서서히 장기침체의 나락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한국경제를 생각하며 떠오른 이야기다.

 

한국경제의 ‘낮’은 추격형 성장의 시대였다. 이미 선진국들이 지나온 길을 좇아가며 내달릴 수 있었다. 급속한 자본축적과 선진국 따라잡기로 손쉽게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정부는 ‘선택과 집중’ 원칙에 의거한 산업정책으로 성장을 주도하며 관치금융과 재벌체제를 조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3저 호황’을 끝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이미 상당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져 더 이상의 자본축적이 가져오는 성장효과가 급격하게 작아지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수확체감’에 맞서 자본의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서 자본을 도와주는 노동력의 증대나 기술의 고도화가 이뤄져야 하는데, 높은 투자율에 비해 노동력 증가율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선진기술의 모방과 응용도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은 대개 이루어져서 기술 고도화도 과거에 비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추격형 성장의 밝은 빛이 비쳐오는 낮이 지나갔음을 인식하고 어슴푸레한 달빛에 적응했어야 했다. 속도를 줄이더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전등을 켜고 어둠과 싸우며 과거와 같이 환한 빛에 의존해 계속 내달리고자 했다. 하지만 눈앞의 돌부리들을 살피느라 시야가 제한돼 걸음은 지체됐고, 마음이 급해 조금만 내달리면 돌부리에 채였다. 손전등으로 햇빛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성장률은 속절없이 하락을 거듭했다. 1990년대 7%대에서 2000년대 5% 그리고 2010년대에는 3%대로 주저앉았다. 이제는 2%대 성장이 익숙하다. 급한 마음에 단기적인 부양책을 일삼았지만, 이는 더 큰 화를 자초하기 일쑤였다. 역대 정부를 거치며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카드채 위기, 부동산 광풍과 가계부채 폭등, 제2의 외환위기와 저축은행 사태를 겪었다. 지금도 대규모 기업 부실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며, 시한폭탄 같은 가계부채는 마냥 증가하고 있다.

 

성장률이 하락하면서 분배도 악화됐다. 고도성장이 가져오는 낙수효과가 사라지자 중산층이 붕괴하고 빈곤층이 늘어났다. 성장률의 하락은 또한 기회의 감소를 초래했고, 기득권층이 아니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회를 잡기가 너무나 어려워졌다. 국민의 70~80%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상승은 어렵다고 느끼게 됐고, 젊은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성공의 기회는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

 

고도성장이 가져오는 역동성과 기회가 소멸하다 보니 정직한 땀과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권력을 이용해 남들이 생산한 가치를 빼앗아 차지하려는 소위 이권추구 행태가 팽배하고 있다. 모피아, 정피아, 해피아, 산피아, 메피아 등등 요즘 무슨 사건만 터지면 등장하는 각종 마피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에 기대어 먹이사슬을 형성하는 집단들이다. 전관예우를 고리로 사법권력을 사익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행태도 기승을 부린다.

 

재벌그룹들의 비자금 조성이나 일감 몰아주기 등은 기업지배권을 이용한 총수들의 이권추구에 다름 아니며, 하청기업 쥐어짜기는 시장권력을 이용한 이권추구다. 대형 국책사업 유치를 놓고 벌어지는 극단적 지역갈등도 따지고 보면 타 지역 사람들이 낸 세금을 가지고 공사판을 벌여서 떡고물이라도 챙겨보자는 이권추구 행태의 소산이다. 이권추구가 만연할수록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는 커간다.

 

이제라도 우리는 어둠에 눈이 적응하는 암순응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낮보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야겠지만, 최대한 멀리 보고 방향을 잘 잡아서 적절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자본축적 극대화에서 자본의 생산성 제고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업이윤을 늘려서 투자를 확대하는 정책에서 인구의 재생산과 이들의 숙련도 및 지식수준의 제고에 역점을 두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추격형 성장에서 선도형 성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분배를 골고루 하고 복지를 제대로 하며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선진기술의 모방과 습득을 넘어선 내생적 혁신을 고취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입식, 습득형 교육에서 토론식, 창의형 교육으로 변화해야 하며, 목전의 이익만을 좇는 응용연구에 치중하는 풍토에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를 고취하는 풍토로 전환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아닌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을 추구해야 한다. 정부주도 산업진흥정책과 관치금융의 유습을 청산해 재벌 중심 독점구조를 타파하고, 중소기업과 혁신적 창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해 이권추구사회를 혁신추구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이 모든 변화의 원칙이고 토대다.

 

그동안 말로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혁신주도, 창조경제 등 온갖 좋은 얘기들을 했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더디고 부족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제도와 관행, 기득권과 사고방식이 변화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득권을 고집하고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집착하다가는 모두가 공멸할 절박한 상황이 됐다. 자본축적 극대화를 바탕으로 한 성장전략에 내재한 최고의 모순은 인구문제다. 자본의 입장만 배려하고 두둔하다 보니 노동공급이 줄어드는 것이다. 경쟁은 격화되고 복지는 부실하니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생산성 저하와 수요부족을 초래해 성장을 방해한다. 한국경제는 내년이면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인구절벽에 맞닥뜨린다. 이제는 근본적 전환, 새판짜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하나씩 새판짜기 과제를 짚어본다.

 

유종일(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입력: 2016.06.30 21:10:00 수정: 2016.06.30 21:11:4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302110005&code=9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