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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과잉축적’이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5-11 11:43:32
  • 조회수 : 1370

경향신문 오피니언[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한국 경제의 활력이 예전 같지 않음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년째 2만달러대에 머무르고 있으며, 성장률이 2%대를 넘어서지 못한 지 오래다. 문제의 핵심은 과잉축적이고, 해법은 경제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다.

 

과잉축적이란 노동에 비해 자본이 과도하게 많아 자본의 생산성이 낮은 상황을 의미한다. 적은 양의 자본에 많은 노동이 달라붙어 일할 때에 비해 많은 양의 자본에 적은 노동이 달라붙어 일하는 경우에 자본 한 단위의 생산량이 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일한 원리를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본 것이 ‘수확체감의 법칙’이다. 자본이 부족할 때는 자본을 조금만 축적해도 생산을 크게 증가시키지만, 자본이 풍부해질수록 그러한 효과는 작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부고속도로를 처음 건설했을 때는 물류 개선에 의한 생산증가 효과가 컸지만 최근 건설한 고속도로들은 그런 효과가 미미하다.  


수확체감의 법칙 때문에 자본축적에만 의존하는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해법은 기술진보를 통해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본축적과 함께 기술진보가 충분히 이루어지면 자본의 생산성이 유지되고 경제성장이 지속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본의 생산성은 떨어지고 1인당 소득의 증가율도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과잉축적은 단순히 인구에 비해 자본이 많이 축적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정도에 걸맞은 기술진보와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소득 비율을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과 분배를 분석하기 위한 핵심 지표로 제시한다. 피케티는 이 비율이 높으면 노동소득에 비해 자본소득의 비중이 커진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이미 축적된 자본에서 나오는 재산소득에 비해 상대적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벌어지고, 심지어 상속부자들이 부와 특권을 독점하는 ‘세습자본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자본/소득 비율은 소득/자본 비율, 즉 자본생산성의 역일 따름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은 생산 과정에 투입하는 자본만이 아니라 소득을 발생시키는 모든 형태의 부를 통칭하는 개념이어서, 피케티 비율을 자본생산성의 역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부는 직간접적으로 생산에 활용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따라서 피케티가 제기하는 과도하게 높은 자본/소득 비율의 문제는 사실 과잉축적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피케티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선진국을 대상으로 국부/소득 비율을 평가한 결과 미국 4.45, 영국 4.92, 캐나다 5.03, 독일 5.67로서 국부가 국민소득의 4.5~6배 수준이고, 이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나라들이 호주 7.07, 프랑스 7.34, 일본 7.95로서 약 7~8배에 이른다. 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2012년에 한국의 피케티 비율은 무려 9.45였다.


분배의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선진국들에 비해 자본소득 비중은 매우 높고 노동소득 비중은 매우 낮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런 현실을 ‘수저계급론’으로 풍자하고, 자영업자들은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고 자조한다. 또한 피케티의 우려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한국은 자수성가한 부자는 적고 상속부자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세습자본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분석에 의하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인 억만장자 중 상속부자의 비율은 74.1%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 비율이 중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2%와 18.5%에 불과했으며, 미국은 28.9%, 유럽도 35.8%에 그쳤다.


과잉축적은 한국 경제의 활력을 죽이고 분배를 악화시키는 근본 원인이며, 그 근저에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박정희 모형의 핵심은 정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 전략이며, 이는 투자율 제고와 자본축적 가속화를 요구했다. 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는 자본에는 특혜를 주고, 노동운동은 탄압하여 저임금 노동을 강요했다. 인구과잉 시대에 이러한 전략은 주효했고, 그 결과는 고도성장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자본도 빠르게 축적되었고, 1980년대 말 ‘3저호황’ 이후에는 자본과잉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은 인구과잉 시대의 친자본·반노동 기조를 유지해왔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세계은행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지수에서 세계 최상위를 기록하는데, 국제노동조합연맹의 ‘노동자의 권리’ 평가에서는 세계 최하위 수준에 있다.


한국의 높은 피케티 비율 혹은 과잉축적 문제가 한국의 1인당 자본스톡이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많아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미국이나 프랑스의 1인당 자본이 우리보다 훨씬 많다. 문제는 우리의 생산성이 낮아 자본에 비해 소득이 낮은 것이다. 따라서 과잉축적은 결국 기술진보, 즉 혁신이 부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항상 투자 부진을 문제의 근원으로 진단하고 자본을 더욱 우대함으로써, 법인세 인하나 규제완화 등을 통해 투자를 증대하려는 정책을 취해왔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과잉축적의 문제는 심화할 뿐이었다. 반면 노동시장 유연화로 포장된 노동하대 정책은 극단적 저출산과 인구절벽을 초래하여 자본과잉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노동을 하대하니 아이를 낳아 기를 능력도 떨어지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며, 인적 자본의 질도 떨어지는 것이다.


과잉축적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자본에 대한 규제와 과세를 강화하고, 노동 보호와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다. 자본이 아닌 사람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탄핵되었고, 이제 곧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영원히 땅에 묻고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입력 : 2017.04.27 20:46:01 수정 : 2017.04.27 20:54:15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272046015&code=990100#csidx7f1e201c2664e99a942a0fd1f80a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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