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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은 와야 한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3-14 10:09:10
  • 조회수 : 1220

경향신문 오피니언[유종일의 경제 새판짜기]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에서 멕시코를 제외하고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2015년 기준으로 2113시간을 일해 OECD 평균보다 무려 347시간이 많았다.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이 과거에 지금 우리나라의 소득수준과 유사했을 때와, 혹은 현재 우리나라와 소득수준이 유사한 나라들과 비교해보아도 대체로 이 정도의 차이가 난다.

 

장시간 노동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고, 가정생활을 방해한다. 저출산이나 여성 차별 등에도 일조한다. 여가가 부족하다보니 교양과 전문지식 획득이나 시민적 활동을 위한 여유가 없고, 집중력 부족 등으로 생산성이 저하된다. 거시경제적인 차원에서는 장시간 노동이 소비수요의 부족과 일자리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이 모든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지난 18대 대선 당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선거구호로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변화의 핵심을 시적으로 표현한 걸작이었다. 조기대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가운데 대부분의 유력 대선 주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으며, 특히 이것이 일자리 창출의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대다수 한국 기업은 종업원들을 최대한 부려먹는 것이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늘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밤사이에 혹은 주말에 업무지시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동자들도 노동시간 단축이 행여 소득의 감소로 이어질까 우려하여 적극적이지 않다. 노동시간 단축이 가져올 효과에 대한 판단이나 그것이 초래할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치인들 공약은 또 한 번 빈말이 되고 말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자의 건강과 가정생활이나 자기계발 등 복지를 개선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제적 효과에 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노동시간 단축이 얼마나 생산성을 증가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변수다. 만약 노동시간 단축 이상으로 생산성이 늘어난다면 걱정할 일이 없을 테지만, 편견과 관행 때문에 장시간 노동이 지속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헨리 포드는 1914년 노동자들의 임금을 두 배 이상 올리는 일당 5달러 정책을, 1926년에는 주5일 근무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면서 계급의 배반자라는 공격까지 받았지만, 이러한 정책이 노동자의 충성심과 생산성을 제고한 덕분에 “가장 성공적인 비용절감책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IBK기업은행을 비롯하여 일부 기업들이 노동시간 단축이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것을 자각하여 실천하는 경우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노동시간 단축만큼 생산성이 충분히 증가하지 않는다면 단가상승이 불가피하고, 이 경우 기업이윤이나 임금 축소로 단가상승을 막거나 아니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쟁 때문에 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는 없으니까 결국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부담을 어떻게 나누어질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미시적인 효과인데, 거시경제적인 효과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만약 총수요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노동시간 단축 대비 생산성 증가가 낮은 만큼 생산량 유지를 위해 고용이 늘어날 것이다. 이것이 여러 대선주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일자리 나누기 효과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총수요가 변화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단가상승 부담을 어떻게 나눌지에 달려 있다. 현재 한국의 상황처럼 임금소득의 비중이 낮아 소비수요가 부족한 경우에는 이윤 몫을 줄이고 임금은 가급적 보전하는 것이 총수요의 확대, 즉 일거리의 증대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면 일자리 나누기 효과가 배가된다. 또한 기업에 따라서는 생산성이 빠르게 많이 오를 수도 있고 느리게 조금 오를 수도 있는데, 당연히 후자의 경우에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반대가 심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여 경제가 새로운 균형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산성 증가가 낮은 산업에 유리하게 상대가격이 조정됨으로써 경제 전체의 평균적인 생산성 증대 혜택이 골고루 퍼지게 된다. 이러한 거시경제적 효과는 시간도 걸리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기업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미시적 효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삶의 질과 복지의 향상뿐만 아니라 생산성 증대에 크게 기여한 것은 자본주의 역사가 보여주는 명확한 사실이다.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농업혁명으로 농업부문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산업부문에서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가 일어났어도 인구증가에 발맞추어 전체적인 일자리가 늘어난 데는 서비스부문 등 새로운 분야의 일자리 창출과 함께 노동시간의 감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 선진국의 노동시간은 주당 60시간 정도였는데, 21세기 초까지 절반으로 하락했다. 일자리를 두 배로 늘리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더욱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장기적이고 거시경제적인 혜택이 큰데도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기업이나 노동조합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법과 제도에 의한 단축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기적인 비용부담과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유도하며 공공부문에서부터 노동관행의 변화를 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서울시는 노사정 합의에 입각하여 일부 투자출연기관의 연간 노동시간을 300~600시간이나 감축하는 과감한 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내년까지 모든 투자출연기관으로 확대하기로 하였다. 중앙정부와 기업들도 서울시의 이러한 선도적 노력을 벤치마킹하여 장시간노동체제에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입력 : 2017.03.02 21:20:01 수정 : 2017.03.02 21:29: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22120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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